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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왕조 멸망사 : 간신은 죽었으나 - (7)
게시물ID : history_134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elisarius
추천 : 29
조회수 : 188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1/07 14:43:12
 
 
- 동림당(東林黨)의 몰락 -
 
 
 
 
동림당의 상소사건은 위충현(魏忠賢)에게 동림당을 정계에서 완전히 내칠 마음을 품게만든 결정적 계기였다. 실권에서 거리를 두는 것으로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이대로 두었다간 자신의 권력이 위태로울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아무 구실도 없이 동림당을 싸그리 잡아다 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적당한 명분이 필요했는데 이때 고병겸(顧秉謙)이란 사람이 위충현에게 접근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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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겸(顧秉謙).
 
동림당을 죽입시다. 동림당은 나의 원수.
 
 
 
고병겸(顧秉謙)은 평소 동림당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던 사람으로 환관의 엄당세력과 결탁한 경력도 있는 반(反)동림파였다. 그는 동림당의 핵심인사 명단을 가지고 있었는데 여기서 고병겸은 위충현에게 그 명단을 넘겨준다.
 
 
동림당에 관한 정보가 부족해 조정 내의 신하들 중 누가 동림당이고 아닌지를 구별하기 힘들었던 위충현에게는 고병겸이 넘겨준 블랙리스트는 희대의 득템이었을터.
 
 
그 명단 가운데 반드시 제거해야 할 대상들을 미리 골라놓은 위충현은 자신의 장기인 중상모략을 발휘하여 작업에 들어갔는데 그 작업이란 동림당에게 본격적으로 칼을 휘두르기에 앞서 먼저 동림당에 대한 여론과 평을 깎는 일이었다.
 
 
당시 한창 유행처럼 퍼지고 있던 <수호전(水滸傳)>과 결부시켜 동림당을 반동패당으로 낙인찍으려 든 것인데 좀더 자세히 풀이하자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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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전>에 실린 삽화.
 
명(明) 말인 만력시절부터 유행타던 베스트셀러.
당시 명 말기의 혼란한 세태가 소설에서의 그것과 유사했기에 민간에서는 인기가 많았던 반면
높으신 분들은 '도적질을 가르치는 소설' 이라 하여 금서로 규정하고 있었다.
 
 
 
<수호전>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수호지는 송(宋) 말 무렵을 배경으로 하여 혼란했던 세태를 개탄한 영웅호걸들이 속세를 버리고 의적활동을 벌이던 다양한 인간군상들을 다룬 소설로 반봉건적 성향이 강한 작품이다.
 
 
조정을 무능하게 그려놓은 점도 그렇고 '양산박 108인' 으로 불리우는 주인공들의 도적질을 미화시켜 놓은 감도 있어 당시 조정에서는 이를 불온도서로 분류하여 금서(禁書)로 정해 놓고 있었다.
 
 
여기서 위충현은 <수호전>의 주인공들인 '양산박 108인' 과 동림당 핵심인사 108명을 교묘하게 매치시킨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이때 위충현은 <수호전>과 비스무리한 서적 7권을 만들어다가 퍼뜨렸는데 그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죄다 동림당 인사들의 실명으로 설정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이렇다.
 
 
흑선풍(黑旋風) 위대중(魏大中).
 
 
흑선풍(黑旋風)은 <수호전>에 등장하는 양산박 108인 중 한명이고 위대중(魏大中)은 동림당의 거물인사다.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둘의 이름을 엮어서 위마치 대중이 도적놈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무의식속에 '동림당=양산박 도적놈' 이란 이미지를 심어주는 효과랄까.
 
 
그럼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법도 하다.
 
 
왜 하필 <수호전>인가?
 
 
이유는 이미 위에서 설명했다. 이 <수호전>만큼 당시 명나라 사회에 널리 퍼져 그만큼 대중적인 책도 없거니와 그 말은 곧 그만큼 많은 이들이 대번에 이해할 하고 원하는 효과를 보다 쉽고 확실하게 얻어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만큼 대중적인데다 뭣보다 조정에서 반역의 무리로 취급하는 양산박 일당과 교묘하게 동일시 해버렸으니 동림당의 이미지는 자연스레 반동무리로 굳어질 터였다.
 
 
특히 조정에서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위충현에게 동림당 명단을 넘긴 고병겸(顧秉謙)처럼 동림당에 대해 불만을 품는 세력은 환관의 엄당세력 외에도 존재했다. 너나 할 것없이 또 그와 비슷한 아류작들을 생산해내어 흑백논리 잣대로 관원들을 동림당이냐 아니냐로 가르던 엄당의 환관들에게 바치며 아부하기에 바빴다.
 
 
결국 작전은 주효했고 동림당은 뭣도 모른채 졸지에 반동의 무리가 되어버렸다. 이제 남은 일이라고는 어육이 나는 일뿐이었다. 
 
 
 
천계(天啓) 4년, 서기 1624년 7월, 위충현의 농단에 항거해오던 동림당의 영수 섭향고(葉向高)의 사직을 시작으로 동림당 숙청은 시작되었다.
 
 
동림당 몰락의 과정은 기록의 형식으로 대신하겠다.
 
 
그해(1624년) 10월, 이부상서(吏部尙書) 조남성(趙南星)과 좌도어사(左都御史) 고반룡(高攀龍)이 뇌물을 받은 최정수(崔呈秀)를 탄핵했으나 최정수는 위충현의 양자였기에 위충현의 변호로 죄를 벗었다. 위충현이 성지를 조작하여 조남성과 고반룡이 붕당을 이루어 정치를 어지럽힌다는 죄명을 씌워 탄핵하니 조남성과 고반룡이 삭탈관직 당하고 낙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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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반룡(高攀龍).
 
 
파직 이후 동림서원(東林書院)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일에 몰두했지만 탄핵했던 최정수(崔呈秀)의
앙심을 샀기에 최정수가 보낸 군사들이 체포하려 오자 자결했다.
 
 
천계(天啓) 4년(1624년), 위충현이 원화중(袁化中), 위대중(魏大中), 주조서(周朝瑞), 고대장(顧大章), 양련(楊漣), 좌광두(左光斗) 등의 여섯 명을 뇌물혐의로 체포했다. 
 
 
이 여섯명은 '6군자(六君子)' 으로 불리우며 동림당을 주도하던 핵심인사들이었다. 핵심 중의 핵심이었으니 자연스레 먼저 위충현의 타겟이 되었던 것.
 
 
그해 11월, 위충현이 죄명을 날조하여 부도어사(副都御史) 양련(楊漣)과 첨도어사(僉都御史) 좌광두(左光斗)를 삭탈관직하고 옥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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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련(楊漣).
 
일찍이 동림당의 상소운동에도 참가한 바 있었기에 위충현의 눈 밖에 난 지 오래였다.
윗 기록대로 여섯명의 동림당 핵심인사들과 함께 투옥되었고 그 중 양련과 좌광두는 갖은 고문을 당하다 옥사했다.
다른 네명은 모두 평민으로 강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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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광두(左光斗).
 
동림당의 수뇌로 누명을 쓰고 양련(楊漣)과 함께 옥살이 도중에 위충현에 의해 죽었다.
 
 
천계(天啓) 5년(1625년), 산해관(山海關)을 지키던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이 황제를 알현하고자 했으나 그가 동림당의 일파라는 이유로 기각당했고 내각수보 한광이 위충현의 핍박으로 사직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천계(天啓) 5년(1625년) 12월, 동림당의 명단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이름까지 도합 309명의 이름을 적은 방을 전국에 퍼뜨렸다.
 
 
위의 내용대로 이 309명 중에는 죽거나 살은 동림당 인사들 외에도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이름 석자 적힌 이들도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 이 방에 이름이 적혔다는 이유만으로 산 자들은 모두 관직을 박탈당했고 죽은 자는 그나마 명목상으로 추증된 관직조차 다시 추탈되었다.  
 
천계(天啓) 6년(1626년), <삼조요전>이란 책을 지어 동림당을 박해하고 삭탈되어 집에 근신 중이던 고반룡(高攀龍)을 포함한 주순창(周顺昌), 무창기(繆昌期), 주기원(周起元), 황준소(黃遵素), 이응승(李應昇), 주종건(周宗建) 등 일곱명을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로 군사를 보내 체포했다.
 
위의 6군자와 동일하게 이들도 7군자로 불리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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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순창(周顺昌).
 
 
위충현의 군사들이 주순창을 체포할때 의사(義士) 다섯 명이 민중을 선동하여 막으려 했는데
이들 다섯명도 함께 연행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중 한 사람이 남긴 말은 이렇다.
 
"대장부가 병이 들어 죽으면 그 시체는 풀과 나무처럼 썩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악한 자에게 해를 입어 죽으니 우리의 이름을 천고에 남기겠구나."
 
 
 
앞서 밝혔듯이 고반룡은 자신을 체포하려 위충현이 보낸 군사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자 자결했고 나머지 6명은 혹형을 당해 죽었다.
 
 
흔히 '동림안(東林案)' 으로 불리우는 이 동림당 탄압사건으로 동림당 인사는 물론이고 그에 연루되어 피해를 본자가 수백에 달했다.
 
 
명나라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에서는 당시 동림당의 참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줄줄이 묶여서 끌려나와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위충현은 동림당을 몰아낸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의 기반이 되는 서원들과 사상까지 뿌리뽑아 동림당의 흔적도 아니 남기려 들었다.  
 
 
동림당이 신봉하고 받들며 사상의 근본을 이루던 주자학(朱子學)을 전수하는 강학(講學)은 금지되었고 기반이 되었던 동림서원을 비롯한 여러 서원(書院)들은 모두 폐쇄되어 그 자리에는 위충현을 받드는 사당들이 대신하여 들어섰다.
 
 
아예 동림당이 재기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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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림서원(東林書院).
 
동림당의 기반이자 사상과 뜻을 이어받을 후계자 양성에 힘쏟던 곳이다.
 
 
 
이로써 전대 만력제(萬歷帝) 때부터 불거져오던 환관세력의 엄당(閹黨)의 악정과 폐단으로 인하여 파국으로 치닫는 정국을 어떻게든 되살려보려던 개혁파 동림당은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이는 곧 명(明) 왕조 최후의 자정노력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더는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 위충현(魏忠賢)의 죽음과 숭정제(崇正帝) 즉위 -
 
 
 
지금 서술하는 내용으로 봐서는 마치 위충현이 장기간 동안 국정을 농단하며 국운을 쇠하게 한 것처럼 보이는 감이 있지 않나싶다. 실상 위충현의 집권기간은 3년 반 남짓에 불과했다.
 
만력제(萬歷帝)가 이미 거덜내놓은 나라였다고는 하지만 불과 수년 남짓한 기간동안 이 동림당을 붕괴시킨 것 하나만으로 나라의 쇠락을 가속화시켰으니 그 전횡을 짐작할 만하다.
 
그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던 위충현도 종말을 맞이하는 때가 온다. 바로 천계제(天啓帝)의 죽음과 함께였다.
 
 
재위기간은 7년. 전편에서 언급했다시피 차라리 황제보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어야 마땅했을 정도의 손재주를 지녔던 천계제는 자기가 직접 궁궐의 축소버전을 만들정도로 그 실력이 뛰어났다고 하는데, 재위 7년간 그 실력만 한껏 키우다 절명하고 만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황제로 즉위한 이는 천계제의 동생 주유검(朱由檢).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다.
 
 
허구헌 날 목수질만 했던 탓인지 천계제에게는 후사가 없었던 관계로 동생 숭정제에게 황위를 물려준 것인데 천계제는 죽으면서 숭정제에게 "넌 현명하니 이 난국을 잘 헤쳐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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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 의종(毅宗) 숭정제(崇禎帝).
 
비운의 황제 라스트 엠퍼러 되시겠다. 다만 훗날 명(明)의 망명정권이라 할 수있는 남명(南明)까지 치자면 마지막은 아니다.
형 천계제의 말대로 현명한 군주였는지는 차차 살펴볼 일이다.
 
 
 
 
어찌보면 위충현의 실각은 이미 예고된 일이기도 했다. 
 
 
천계제가 죽음이 임박하여 사경을 헤맬 때 흐리멍텅했던 천계제와는 달리 똘똘한 숭정제가 황위에 오르는 일만은 꺼려했던 위충현이 웬 갓난 황자(皇子)를 데려다가 후계자로 삼으려고 애쓴 적이 있는데 (결국은 천계제의 거절로 무마되었지만) 이는 숭정제 본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자신을 제치고 다른 황자를 황위에 앉히려 들었으니 위충현이 곱게 보였을까. 게다가 숭정제는 위충현이 탄압한 동림당을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위충현이 벌인 동림당 탄압사건에 대해 강한 불만을 품고 있었고 아니나 다를까, 즉위하자마자 파직당한 동림당 인사들을 사면시키고 복직시켰는데다 이미 죽은 이들에게는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동안 나라를 말아먹은 원흉 위충현을 숭정제의 즉위로 비로소 숨통이 트여 벌떼같이 일어난 위충현의 반대파 및 동림당 잔재세력의 빗발치는 탄핵을 받아들여 좌천시켜서 귀양 보내버린다.
 
 
이미 자신의 최후를 짐작했을 위충현은 귀양길 도중에 자결했는데 그 시체는 수천 수만갈래로 찢겨 거의 나노분해 수준으로 분해 되었다고 한다.
 
 
간신은 죽었다라지만 그 영향은 참담했다. 만력제 치세 이래로 나아질 기미 없이 국고는 바닥을 드러낸지 오래였고 윗대가리들의 폭정으로 민심은 흉흉하여 불만은 쌓여만 갔고 만주에서는 후금(後金)이 점차 성장해가고 있었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게 없는 실정이었던 것이다.
 
 
다음에는 잠시 관점을 바꿔서 후금(後金)에 대해 써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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