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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은 알고 있다] 이인호교수 문창극 적극옹호
게시물ID : history_1646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igprison
추천 : 1
조회수 : 198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6/20 15:24:38

뉴스

정확도 | 최신
1-10 / 약 6,140건



예전엔 이런 말도 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지난 13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국가 원로급 인사 12명과 오찬을 함께 했다. 박 대통령의 오른쪽에 앉았던 이인호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러시아 대사)은 박 대통령에게 "'백년전쟁'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때 일을 많이 왜곡해서 다루고 있다"며 "이런 역사 왜곡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청산운동을 하는 단체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이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아니기 때문에 '좌파'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조선일보, 신동아, 이인호 이사장이 민족문제연구소의 활동이 불편한 이유가 뭘까.

도대체 왜?

이인호의 할아버지 이명세 그는 누구인가?
왜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을 올렸을까?
우선 이런 얼굴이란다. 

 
<친일인명사전>의 내용 - 일부만 발췌(이름과 창씨명 이외에 한자 포기)


이명세1 李明世│春山明世, 1893~1972, 경학원 사성·조선유도연합회 상임이사


1893년 11월 30일 충청남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도, 호는 의산이다.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유도황민화를 위해 전 조선 유림을 동원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의 상임참사 겸 참사를 지내다가 1941년 6월 상임이사에 올랐다. - 여기서 유도는 스포츠 '유도'가 아니라 통상적으로 '유교'라 생각하면 됨


1941년 4월 이석구가 설립한 보학원의 감사를 맡았다. 같은 해 8월 각 종교단체 대표들이 모여 초비상시국에 직면한 종교계의 총동원을 의논하는 시국간담회를 개최할 때 조선유림연합회 대표로 참석했다. - 여기서 초비상시국은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


조선유림연합회는 1936년 10월 창립 후 1937년 8월 비상시국에 대응해 ‘천명황도 존정국시, 보합대화 혁고국본, 후원황군 앙양국위 등의 5대 강령을 발표했고, 이후 북지위문 등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1942년 5월 발간된 <유도> 창간호에 '동아공영권과 유교의 역할'을 게재해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며 이에 적극 협력할 것을 선동했고, '신가파함락일지희'라는 한시에서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며 대동아공영권의 형성에 적극 협력할 것을 주장했다.


10월에는 함경남도 홍원군유도회 총회 및 읍면유도회 지부 결성식에 참석해 ‘시국하 유림의 책무’를 주제로 강연했다. <유도> 1942년 10월호에 조선에서 징병제 실시 결정을 축하하는 한시 '축징병제실시'를 실어,


 “집안에선 아들 난 것 중한 일임을 더욱 알고 / 나라 위해 죽는 것은 가벼이 여겨야 하리 / 우리들은 후회 없나니 / 하루빨리 전란의 시대가 평화의 시대 되길 바랄 뿐이라네"


라고 축하했다. 1942년에는 조선을 떠나는 총독 미나미와 정무총감 오노의 치적을 찬양하는 한시를 썼다. - 한시에 나타난 '나라'는 일본


1943년 8월과 9월에 경기도 각 군 유도연합회에서 개최한 강연회에 강사로 선발되어 경기도 여주·김포·광주군 등지에서 강연했고, 12월에는 전라북도유도연합회가 주최한 강연회 강사로서 전라북도 고창·정읍·부안·김제 등지에서 강연했다. 이 강연의 주요 내용은 결전하의 유림으로서 국체관념 명징, 황도유학 진흥, 시국인식 철저를 통해  황국신민의 자질을 연성하고 전력의 증강에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4년에는 경학원 사성으로 활동했다. 같은 해 <유도> 4월호와 11월호에 일본의 전승을 기원하며 상무 정신을 고취하는 '정기가의 해설'을 실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조선사회교육협회(이사장 조동식)가 창설될 때 부이사장을 맡았다. 1946년 10월 성균관대학교 강사와 재단법인 성균관대학교 상임이사를 맡았다. 1954년 4월 재단법인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에 취임해 1957년 10월 물러났다가 1960년 11월부터 1962년 6월까지 다시 이사장을 지냈다. 1954년 6월 대한유도회 총본부 부위원장을 맡았고, 1955년에는 재단법인 동덕여학원과 재단법인 영우학원 이사를 맡았다. 1960년 7월 성균관장에 올라 1962년까지 재임했다. 1963년에 유학연구회 고문과 타이완 아주시단 명예사장을 지냈으며, 1965년에는 한성문우사 사장을 맡았다. 1972년 7월 28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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