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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에서의 이병도
게시물ID : history_234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도시
추천 : 2
조회수 : 1638회
댓글수 : 54개
등록시간 : 2015/10/03 10:03:58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 및 분야별 세부기준

 

수록대상

5.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으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5-1.
종교계 지도자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5-2.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 등 문화예술 부문에서 창작과 공연 활동으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을 적극 미화 찬양하고 선전 선동한 자
 
5-3. 교육ㆍ학술, 언론계 인사로서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의 논리를 적극 수용하여 확산시킨 자
 5-4. 친일, 전쟁협력 단체의 핵심 간부로 활동한 자
 5-5. 기타 전문분야에서 일제의 식민정책과 침략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자

분야별 세부기준

18. 교육ㆍ학술
18-1.
교육ㆍ학술계에 종사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 이론을 합리화하고 이를 확산시키는데 앞장선 자
18-2.
각급 교육기관과 각종 교육ㆍ학술단체의 설립자ㆍ책임자ㆍ운영자로서 전쟁동원을 독려한 자
18-3.
고등관 이상의 교육관리
18-4. 조선사편수회(반도사편찬사업ㆍ조선사편찬위원회)의 편수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한 자
18-5.
기고ㆍ저술ㆍ좌담ㆍ강연 등을 통해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자

 -     위의 파란색과 밑줄은 이병도를 친일파로 삼은 기준인  싶은 저의 주관적 생각을 표시한 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서의 이병도


이병도 李丙燾│1896~1989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촉탁

1896
814 태어났다.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본관은 우봉, 호는 두계(斗溪). 19093 한성 보광학교(普光學校)에서 수학한 19103 사립 중동학교(中東學校) 졸업했다. 19123 일본인이 세운 불교고등학원(佛敎高等學院) 예비과를 수료했고, 다음 보성전문학교 법률학과에 입학해19153 졸업했다. 졸업하던 4 일본으로 건너가 다음 7월까지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예과 문과를 수료했고, 후인9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학급사회학과(史學及社會學科) 들어가19197 졸업했다. 처음에는 서양사를 전공하고자 했으나, 당시 일본사의
권위자였던 요시다 도오고(吉田東伍)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 영향을 받아 조선사연구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후 귀국해 191910월부터19258월까지 경성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원을 지냈다. 19207 김억(金億나혜석(羅蕙錫염상섭(廉想涉) 등과 잡지 《폐허》를 창간한 동인으로 활동했고, 192212월에는 염상섭·오상순(吳相淳) 등과 문인회(文人會) 발기해 창립했다.
1925
8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修史官補) 임명되었다. 19275 수사관보를 그만두고 촉탁을 맡아1938 6월경까지 활동했다.

조선사편수회는19256 조선 사료의 수집, 편찬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하기 위해 조선사편찬위원회를 확대 개편한 조선총독부 직속기구로, 《조선사(朝鮮史) 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활동하면서 이마니시(今西龍) 함께 《조선사》 1 〈신라통일 이전〉, 2 〈신라통일시대〉, 3 〈고려시대〉의 편찬을 담당했다. 수사관보로 재직하던19261 조선사편수회 소속 학자들의 공동 연구기관인 조선사학동고회(朝鮮史學同攷會) 편찬원을 맡았다. 19308월부터193910월까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청구학회(靑丘學會) 위원을 지냈다. 청구학회는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극동문화 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학술연구단체로, 최남선(崔南善이능화(李能和신석호(申奭鎬) 등이 참여했으며, 《청구학총(靑丘學叢)》을 발간했다. 19334월부터 1943년까지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로서 조선유학사(朝鮮儒學史) 강의했다. 19345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해 학회 창립과 함께 상무위원에 선임되었고, 학회지 《진단학보(震檀學報)》의 편집위원(편집인) 발행인을 맡았다. 19366월에는 진단학회 위원을 맡았다. 193911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단체를 연합하여 총후봉공(銃後奉公)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평의원에 선임되었다. 19414 이화여자전문학교 강사를 맡아1943년까지 사학강좌(史學講座) 담당했다.


해방 , 19458 창설된 조선학술원의 역사철학부 학부장을 맡았고, 진단학회를 부활시켜 상임위원을 맡았다. 1945 12 경성대학 법문학부 조선사 교수로 임용되었고, 19469 학제 개편에 따라 서울대학교 문리대학 교수로 발령받아 1961 정년퇴직할 때까지 재직했다. 19493 한국사료연구회 고문과 서울시 문화위원회 학술부 위원에 선임되었다. 195010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아1954년까지 활동했다. 19539월부터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 관장을, 19545월부터19604월까지 서울대학교 대학원 원장을 지냈다. 19545(사단법인)진단학회 이사장에 취임했고, 19556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19573 사회과학연구회 회장, 같은 5 동아문화연구위원회 이사, 195910 동아문화연구위원회 회장을 맡았다. 19604 과도내각의 문교부장관으로 입각해8월까지 재임했고, 같은 기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했다. 같은 7 대한민국학술원 회장에 취임했으며, 9월부터 서울대학교 대학원 원장과 행정대학원 원장을 겸했고, 12월에는 중앙교육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 퇴직 후인19614월부터9월까지 국민대학교 학장을 지냈다. 196510 민족문화추진회 발기인으로 참여해11 이사 부회장을 맡았고, 19663 5·16민족상 심사위원회 고문이사를 맡았다. 19664월부터19692월까지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1970 2(재단법인)민족문화추진회 이사를, 19724 진단학회 평의원회 의장을 맡았다. 19822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선임된 19884 고문으로 추대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임했다. 19628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비롯해 5·16민족상과 학술원상 등을 수상했다. 1989814 사망했다.


[
참고문헌]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美軍政廳官報》; 《東亞日報》1922.12.26, 1934.5.9, 10.3 ;
《朝鮮中央日報》1934.5.9, 10.2 ; 《每日新報》1945.9.14 ; 《獨立新聞》1949.3.3 ; 《京鄕新聞》
1949.3.24 ;
《朝鮮史學》 1~6(1926.1~1926.6) ; 《靑丘學叢》 1~30(1930.8~1939.10) ; 《朝鮮》 194(1931.7) ; 《經學院雜誌》 45(1940.12) ; 《震檀學報》 57(1984.6), 68(1989.12) ; (朝鮮史編修會)庶務綴(昭和九年)(1934) ; 《早稻田大學一覽》(1936.12) ;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1938.6) ; (普成專門學校)會員名簿》(1940.12) ; 《朝鮮의 將來를 決定하는 各政黨 各團體 解說》(1945.10) ; 《大韓民國人事錄》(1949.12) ; 1955 서울都市要覽》(1955.2) ; 《大韓民國建國十年誌》(1956.5) ; 《斗溪雜筆》(1956) ; 《韓國名士大鑑》(1958.2) ; 《韓國紳士大鑑》(1966.3) ; 1966年版 韓國·北朝鮮人名辭典》(1966.5) ; 《現代韓國人名辭典(合同年鑑67年版)(1967.1) ; (나의 인생관)풀뭇간의 쇠망치》(1971.3) ; 《早稻田大學韓國同窓會 會員名簿》(1987.5) ; 《國史編纂委員會史》(1990.3) ; 《歷史家의 遺香-斗溪李丙燾先生追念文集》(1991) ; 《大韓民國歷代三府要人總鑑》(1993.10) ; 《震檀學會六十年誌》(1994.5) ; 《민족문화추진회30년사》(1995.11) ; 《韓國近代文人大事典》(1990.7)





출처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 및 분야별 세부기준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백문백답)
이병도 -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http://www.minj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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