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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에서의 현채
게시물ID : history_2349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도시
추천 : 0
조회수 : 66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10/03 16:50:16

현채 玄采│1856~1925
조선사편찬위원회 위원

1856 5 18 태어났다. 본관은 천령(川寧)이다. 호는 백당(白堂)이고, 필명은 백당촌수(白堂村叟)

1873식년시(式年試) 역과(譯科) 한학(漢學) 3위로 급제했다

1892 부산항감리서 역학(譯學)으로 있다가 12 번역관에임명되었다

1894 7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 주사에 임명되었다

1895 5 관립외국어학교부교관과 한성사범학교 부교관을 지냈다

1896 1 평강군수에 임명되었다가 같은 달에 사직했다

1899 학부 편집국위원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1907 1월까지 학부 주사 보좌원으로 활동했다. 학부 재직 시절인 1899 학교용 국사교과서인 《동국역사(東國歷史)》의 편찬을 담당했다

1900년에는 장지연(張志淵) 함께 기존의 시사총보사(時事叢報社) 광문사(廣文社) 개칭하고 고서출판사업을 일으켜, 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牧民心書)》와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을 간행했다

1905 1 사립 한성법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1906 10 대한농회 의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국민교육회 보강요원으로 참여했다

1907 3 대동학회 평의원에 선출되었다. 대동학회는 유림계를 회유하기 위해 통감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 후원으로 조직되었다

1908 기호흥학회 찬무원(贊務員) 지냈고, 9월에 대한중앙학회 평의원을 맡았다. 통감부 시기에 저술했던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유년필독(幼年必讀), 《유년필독석의(幼年必讀釋義), (중등교과)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은 1909 출판법에 의해 압수되어 판매가 금지되었다. 합병 , 1910 11 《동국역사(東國歷史), 《대한지지(大韓地誌) 등이 발매·반포 금지 처분을 받았다. 이해 최남선·박은식 등이 주도하여 설립한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 통해 고전의 간행과 보급에 참여했다

1911 7 한문교양, 문자 저술, 서적 편찬 간행을 사업 목표로 문예구락부의 편집장을 맡았다

1918 6 서화예술의 진흥 서화취미 보급을 목적으로 서화협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19 12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대동사문회는 3·1운동 이후 친일단체 육성책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의 후원으로 조직된 유교단체다

1922 개최된 1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서예 사군자 분야 3등에 입상했다. 이해 12 조선사편찬위원회 조직과 함께 위원에 임명되어 1925 2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조선총독부 산하의 조선사편찬위원회는 1925 6조선 사료의 수집, 편찬 조선사의 편수를 담당하는 조선사편수회로 확대 개편한 , 《조선사》 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했다. 조선사편찬위원회 재직 시절인 1924년에는 판금되었던 《동국사략》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수정해서 《동사제강(東史提綱)》을 출판했다. 

1915 7 21일부터 23일까지 《매일신보》에 게재한 〈일선고석관계(日鮮古昔關係)〉에서일본에 이르러서는 역사를 말하는 사람이 아주 없으니 그러한즉 예전에 서로 사신을 보내 교류할 때도 오히려 이렇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은 양국이 일가(一家) 됨에 또한 방관하는 것이 옳겠는가라고 하면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것을 일가가 것으로 표현했다. 이어서황후[신공황후(神功皇后) ― 인용자] 섭정하였고 웅습(熊襲) 쳐서 평정하고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황제인 보이도록 머리를 묶어 남장을 하고 선함(船艦) 바다를 덮었고 신라를 이겨 임나(任那) 수비병을 두고 돌아왔으니 일본이 타국에 병사를 보낸 것이 이때부터이다. …… 또한 신라와 고구려가 함께 백제를 공격하자 백제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허락하고 따라서 병기를 보내었으며 백제에게는 의사, 역산, 박사를 보내라 하고는 병사를 보내어 백제를 구원하였다.…… 신라가 임나를 멸하고 일본이 설치한 일본부를 헐어버렸으니, 대저 임나 신공황후가 삼한을 공격했을 당시 관부(官府) 설치했던 것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 것이 삼백삼십 년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망하고 …… ”라며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인정했다

같은 9 4일부터 9 7일까지 《매일신보》에 게재한 〈감시이언사기회(感時而言史奇懷)〉에서는또다시 군졸이 변란을 일으키고(임오군란 : 인용자) 또다시 신당이 거사(갑신정변 : 인용자)하였으며, 또다시 동학이 난을 부르짖으며 또다시 일청(日淸) 군사를 일으키고(청일전쟁 : 인용자) 또다시 을미정변과 또다시 갑진전쟁(러일전쟁 : 인용자) 일어났으니 무릇 모든 일들이 주마등이 사람들의 눈을 아찔하게 하는 일일이 쫓아서 생각하기 힘들다. …… 만일 실제의 사실들을 파고들어 곧은 말을 피하지 않으면, 반드시스스로 화를 부른 화인(禍因)’이라고 말하니 어찌 그리 얘기하는가? ……생각건대 갑오갑진의 () 어찌 우리 스스로가 도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계기가 없었다면, 일본의 10 군대가 만주의 벌판에서 가히 시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허나, 동아(東亞) 아무 없이 관계를 유지해 나갈 있을 것인지도 또한 아직 없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사람들을 걱정하는 것이니 사린(四隣) 위한다는 것이 정말 어렵지 않는가?라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일본이 도발한 것이 아니라 조선에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1925 2 5 사망했다.

[참고문헌]

《朝鮮時代雜科合格者總覽》 ; 《日省錄》 ; 《承政院日記》 ; 《舊韓國官報》 ; 《大韓季年史》 ; 《韋庵文稿》 ; 《高純宗實錄》
; 《朝鮮總督府官報》 ; 《朝鮮總督府及所屬官署職員錄》 ; 《皇城新聞》 1905.1.17, 1906.10.17,

1908.9.25, 12.2 ; 《大韓每日申報》 1907.3.24, 1908.9.25 ; 《每日申報》 1911.8.1,

1915.7.21~7.23, 9.4~9.7, 1918.6.27, 1920.1.28, 1922.6.2, 1923.1.9 ;
《朝鮮日報》 1925.2.7 ; 《新韓民報》 1925.3.5 ; 《大東學會月報》 1(1908.2) ; 《畿湖興學會月報》
1(1908.8) ; 《大東斯文會報》 1(1920.4) ; 《開闢》 57(1925.3) ; 〈朝鮮史編修會
事務報告書(1912.1.8~1.10)·〈朝鮮史編纂委員會 委員會議事錄(大正11~大正13)(《中樞院調査資料》) ;
《朝鮮史編修會事業槪要》(1938.6) ; 《李儁先生傳》(1947)


말년에 거시기하게 말아놓고 졸하셨네요.

출처 민족문제연구소 http://www.minjok.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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