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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자" 이병도는 한국 고대사를 어떻게 보았는가?
게시물ID : history_248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에뮤다
추천 : 6
조회수 : 1172회
댓글수 : 12개
등록시간 : 2016/01/07 11: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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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도의 모습

단군에 대한 이병도의 인식
세간에는 흔히 "친일 식민사학자" 이병도가 단군 조선의 존재를 말살하려했네, 죽기 전에 재야사가들의 꾸짖음을 듣고 이를 참회했네 하는 식의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그러나 이런 말이 과연 사실일까? 이병도의 책을 직접 읽어보면 그 실체를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다.

북단 서북행열사회의 역사에서 뿐 아니라, 우리 국사 첫머리에 봉착되는 중요한 문제가 단군에 관한 문제라 하겠다. 단군에 관한 고기록이 너무도 단편적인 데다가 설화적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또 그것이 비교적 후세의 서(書)에 수록된 까닭에 혹은 황탄시(荒誕視), 혹은 후인의 날조라 하여 이를 말살, 부인하려는 무리도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경솔하고 무모하고 또 비과학적 태도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단군에 관한 기록 중에는 거기에 약간 후인의 윤작이 가해진 곳도 있지만, 대체로 볼 때 이를 후인의 조작으로 단정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고, 도리어 음미 검토할수록 이것이 고인(古人)의 오랜 설화를 전해주는 귀중한 고전임을 인식하지 아니할 수 없다. 특히 설화학적·민속학적 방법에 의하여 이를 연구한다면 자못 흥미있고 중요한 시사와 발견이 수반될 것이다.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1976, p.27

이처럼 이병도는 굳이 단군의 실체를 부인하려 한 적이 없는 사람이며, 해당 구절을 인용한 책의 뒷부분을 보면 단군 설화 등의 기록을 음상사적으로 재해석해서 설화 상에 등장하는 아사달의 위치를 고증하려는 시도도 선보였다. 물론 이러한 발상은 음상사에 의존한 한계가 커서 그가 주장한 여러 학설들이 그러하듯이 오늘날의 학계에서는 통용되지 않고 있다. 

(사실 음상사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는 비단 이병도 뿐 아니라, 일제 사학자들은 물론이요, 단재 신채호와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도 피해가지 못한 오류였다. 고고학을 비롯하여 현대적인 역사연구방법론 자체가 아직 미발달 상태였던 때에 활동한 사람들이기에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었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해방 이후의 책이라 믿을 수 없다는 분도 본 일이 없는데, 그런 분들 위해서 간략히 자료를 공개한다. 이병도가 1923년 10월 1일자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조선사개강" 3편의 글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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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도, 조선사개강 3, 동아일보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조)

이 글은 이병도가 1919년에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후에 신문에 연재한 "조선사개강"의 일부이다. 조선사개강은 20년대에 연재되었으나 이단군 설화에 대한 이병도의 견해는 그 당시에도 물론이고, 이후 70년대에도 크게 달라진 부분이 없다. 즉, 사람들이 흔히 선동당하는 바와는 달리 이병도는 생전에 단군의 존재를 허구로 치부한 일은 없다. 거꾸로 말해서 단군의 존재를 부인한 일로 회개를 할 필요도 없는 사람이 바로 이병도였다. 더욱이 생전에 고집이 강하기로 악명높았던 이병도는 자신의 학설을 스스로 부정한 일이 거의 없었다.



고대 한일관계사에 대한 이병도의 인식
이른바 식민지사관에서 일제 사학자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다루었던 문제 중 하나가 다름아닌 임나일본부설과 야마토 정권에 의한 한반도 남부 경략설이었다. 이는 곧 제국주의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하여 지배하는데 있어 역사적 구실을 제공하고 더 나아가 이를 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작업으로써, 특히 광개토왕비가 발견되어 소위 말하는 신묘년 기사가 세간의 이목을 끌면서 본격적으로 불이 붙었다. 그렇다면 식민지사관의 핵심이랄 수 있는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식민사학자" 이병도의 입장은 어떠하였는가?

일본사상의 소위 임나일본부 (일본부 즉 ヤマトノミコトモチ는 倭宰의 義요, 宰는 使臣의 義다.)란 것도 나의 소견으로는 후세의 왜관관리(倭館官吏)와 같은 종류의것으로서 이때에는 다소의 정치적활동을 겸하였든 것인듯 하거니와, 이 역시 본질적으로 구명하면 철 금은 직물 재보(주옥) 기타곡물의 교역취인(取引)을 주로 맡는 일종의 공적 상관(商官)이 아니었든가 한다.
- 이병도, 삼한문제의 신고찰(6), 진단학보 7, 1937

이병도는 이미 30년대부터 임나일본부가 정치적으로 가야를 지배하거나 간섭했다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을 따르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 읽는 발음이 "ヤマトノミコトモチ"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이를 왜에서 파견한 사신, 혹은 가야와 왜 사이의 무역을 담당하던 공적인 무역기관의 일종으로 보았다. (이러한 이병도의 견해는 훗날에 임나일본부의 실체를 가야가 왜를 외교적으로 이용하여 백제와 신라의 견제를 피하려 했다는 이른바 "안라왜신관"로 보는 학설로도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한편 이병도는 일본서기 신공기에서 신공황후가 병력을 파견하여 근초고왕의 남방 경략을 도와주었다는 기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도대체 일본서기 등서(等書)에는 일본의 연대기년이라든가, 기타에 있어 너무도 과정적인 또 설화적인 요소를 많이 내포하고 있으므로 기사 그대로 보아서는 아니되겠지만, 소위 신공시대가 백제의 근초고왕 때에 당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고 근초고왕 부자가 지금의 전남지방에 출정하여 마한의 잔여소국을 경략한 것도 의심없는 사실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때 왜국의 응원군이 래회(來會)하여 그를 도와주었다는 것은 자못 신용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근초고왕 부자의 이 방면경략으로 인하여 지금의 전라남도 지역이 완전히 백제의 소유가 되자 왜국과의 정식교통이 이 방면의 루우트를 통하여 처음 열리게 된 것과 또 왜사(倭使)의 제일차 래도(來都)를 계기로 여러 가지 선인우호(善隣友好)의 책(策)을 구(講)하여 서로 영구히 우의를 맺기로 맹약한 것이 위와 같은 형식의 설화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해석한다.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1976,  p.514

일본서기의 해당 기록에서는 가야와 "남만" 침미다례를 평정한 주체를 어디까지나 왜군이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이병도는 이러한 일면을 전면 부정하고 당시 출정하여 한반도 남부를 경략한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였다고 말하고 있다. 일본서기에 그런 기록이 남은 것은 후대에 백제와 왜가 통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설화가 전해진 것 뿐이라고 하고 있다. 이러한 설은 후에 백제와 왜의 관계사를 연구했던 천관우, 김현구, 노중국 등 여러 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어 해당 기록의 주체를 왜가 아닌 백제로 보게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칠지도 문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후명문을 통해 볼 때, 왜왕도 후왕(侯王)과 같이 취급하여 상위자가 하위자에게 내리는 형식으로 되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백제의 독자성과 주체의식 내지 우월감을 이에 의하여 재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 이병도, 한국고대사연구, 1976, p.530

이렇게 이병도는 칠지도의 명문을 통해 백제가 왜왕을 후왕으로 인식하며 그 관계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보다 다양한 해석이 제기된 바 있지만, 이병도의 이러한 해석 또한 후에 칠지도를 통한 고대 한일관계사의 재인식에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ps. 
옛날에 쓰다가 만 글인데 어쩌다가 올리게 되었습니다. 사실 두계 이병도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 결국은 소극적 친일이라는 타이틀을 벗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와는 별개로 말년에 보여준 다소 독선적인 일면에서 있어서도 비판을 받을 만한 측면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일제 사학자들의 의견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영향을 받은 면도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친일 경력을 문제삼아 그의 학문 자체를 식민지 사관으로 몰아가고, 황당하게도 이러한 이미지를 현대의 한국사학계에도 덧씌워 비슷한 무리로 몰아가는 행태를 무척 많이 보아왔기에 직접 이병도의 책을 읽어보고 생각을 해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어 내용을 어느정도 발췌해서 글을 꾸며 보았습니다. 

더불어서 이병도라는 인물 자체가 후대의 학자들에게 준 영향은 분명히 있지만,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이병도의 학설이라는 것을 그 제자들이나 후대의 학자들이 아무런 비판없이 수용한 것도 결코 사실이 될 수 없다는 점도 밝혀두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이병도가 주장했던 것 처럼 풍납토성은 백제 왕성이 아닌 사성이라던가, 삼한 중 진한이 한강 유역에 붙어있었다고 했던 썰을 그대로 되풀이 할 정도로 어리석은 학자는 제가 알기로는 현존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내용을 좀 더 보강해서 올려보고 싶습니다.
---------------------------------------------여기까지가 펌-----------------------------------------------------------------
검색하다 찾은 글 게시해봅니다.
 
개인적으로 이병도에 대해 아무런 유감도, 호감도 없습니다. 이미 옛적에 세상을 뜬 사람에게 그런 감정을 느낄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지극히 단순한 논리의 흐름으로 친일파→친일사학자→식민사학자 라는 결론을 도출하게 되고 이는
엄청난 비약이 되어 식민사학자 이병도→그의 제자들 또한 식민사학자→현 '강단사학계'는 식민사학의 온상! 이라는 결과까지 내놓게 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논리죠.
물론 이병도가 비판할 점이 없다는게 아닙니다. 그도 사람이니 학문적 허점이 존재하겠죠(정말 당연한 소리입니다만 잘 이해를 못하는거 같아서)
역게에서 이병도를 '옹호' 하는 분들은 이 점을 눈감는게 아닙니다. 하지만 온당한 비판이 되기 위해선 온당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예컨데 이완용의 조카라던지...설혹 진짜 조카, 삼촌간이어도 그를 향한 학문적 비판은 별개여야 하죠)
 
뭐 이 정도 말을 이해하고 납득할 정도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지만 요는 그렇다는 겁니다.
'온당한 근거로 온당한 비판을 하자.'
 


 
출처 [출처] http://blog.naver.com/superman2208/220327220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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