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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개전 초기 전개와 한국군에 대한 변호
게시물ID : history_2579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나리온
추천 : 14
조회수 : 1785회
댓글수 : 64개
등록시간 : 2016/03/30 12:07:47
전개도.jpg
 
대표적인 장비, 병력의 열세는 초등교육만 수료해도 다 배우셨을 테니 넘어가겠습니다.
개전 초기 한국군의 가장 큰 문제점은...망할 보직이동 이었습니다.
 
아 물론 높아져 가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여 군 인사를 효율적으로 배치하겠다는 본래의 취지는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행정이 그러하듯, 이 정도 군을 처음 운용해보는 한국군으로서는 말 그대로 구구주먹식.
더욱이 큰 문제는 개전 직전인 1950년대 1~2분기에 이러한 대규모 인사이동이 집중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장, 연대장 뿐아니라 각종 참모들의 보직 바뀌기가 종잇장 뒤집기 보다 쉽게 계속 이어지고,
더 나아가 편제 자체를 막 섞어 버리죠.
대표적 사례로, 그 유명한 6사단 김종오 장군님도 불과 개전 2주전에 6사단장으로 부임합니다.
그 중요한 사단장 인사가 이러할진데 다른 인사는 어떨지 불보듯 뻔한 지경.
쉽게 말해서 개전 직전 대부분 제대의 장교들과 병사들은 서로 처음 보는 사이인데다가,
보직을 맡은 지 채 반년도 안된 상태.
이러니 제대로 굴러갈리가....
고마해 이 미친 놈들아.jpg
그나마 이 모든걸 컨트롤 할 육본이라도 제대로 된 전문가가 있음 모를까, 육본은 더 심할 지경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 우두머리가 X맨으로 유명한 채병덕...
우린 안될거야 아마.jpg
그럼 미군은 무얼 했느냐?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 점이 있는데, 좀 과격하게 말하면 6.25 개전 직전까지 미군은 한국군에게 쥐뿔도 도움 준게 없습니다.
1950년 1월에 미국국무 장관 딘 애치슨이 말한 에치슨 라인. 뭔지 쉽게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일본만 지키면 된다. 나머지는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
Acheson_line-00001.png
애초에 미군은 2차 대전 직후 대대적인 군축이 있었고, 저 선언으로 한반도는 미국의 방위라인에서 벗어납니다.
그나마 입수한 첩보도 일본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로 다 들어가는데, 맥아더가 다 씹어버립니다. (뭐 이쪽도 정신이 없었겠죠.)
아! 물론 경제적 원조는 좀 있었습니다. 근데 그거랑 군 원조랑은 전혀 별개의 이야기.
(애초에 미군이 이렇게 지원을 안해준 이유는 이승만의 호전적 태도에 있었습니다. 그게 뭔소리냐? 군사를 지원했다가 이승만이 북진이라도 할까 걱정했다는 거죠. 물론 이승만의 발언으로 확인해 봤을때 이건 단순한 기우는 아니었습니다.)
 
그나마 후방이라도 안정적이면 모를까.. 그 유명한 지리산 빨치산이 후방에서는 활개를 치고
정치권은 파행을 거듭해 갔습니다. 경제는 당연히 추락...이랄 것도 없이 이미 바닥.
이러니 당연히 보급도 딸리겠죠? 개전 초기 한국군은 많게는 15일~당일치 탄약밖에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냥 맨주억으로 싸웠다는 이야기가 헛소리가 아닌거죠.
 
그럼 훈련도는?
첫 문단에서 말씀드렸듯이 모든것이 개판인 상태에서 당연히 훈련이 제대로 될까요? 아직 개국 초기.
국군으로선 모든 것이 처음이었습니다..
그나마 전방 부대는 급한대로 연대급 훈련이라도 한 상태였습니다만 부족했죠.
 
북한은 이미 군단급 훈련까지 마친 상태였거든요.
 
자, 그럼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우리는 살아 남았을까요?
간단합니다.
 
정말 국군이 눈물나게 잘 싸웠기 때문이죠.
이건 뭐 따로 붙일 수식어가 떠오르질 않네요. 개전 초기 한국군이 보여준 분투는....그냥 대단하다고 밖엔 이야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옹진반도에 있던 독립 17연대는 포위된 와중에 제대를 유지한채, 배를 타고 철수하고
문산 방면에 있던 백선엽장군의 1사단은 도리어 역공을 가해 북진해 버리십니다;;;
춘천-홍천에 있던 김종오 장군의 6사단은 북한 2개 군단을 안드로메다로 관광 태우시고
강원도-동해안을 지키던 8사단은 후퇴-역공-후퇴-역공을 반복하며 개전이후 90일 동안 홀로 동해안을 사수해 버리는 기염을 토합니다...(이 당시 사단장 이름을 아시는분은 댓글좀 남겨주세요 ㅜㅜ) 
 
자 그럼 여기서 의문이 생기죠.
전선이 왜 밀렸을까요?
그건 바로........
 
정작 북한군의 주공인 포천- 동두천 방면을 지키던 7사단이 작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당시 7사단장은 그 유명한 유재흥......
(사실 이건 유재흥이 부족했다기 보다는 다른 사단장들이 너무 뛰어났다고 밖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이당시 형편으로는 7사단처럼 밀려버려야 정상이었거든요)
7사단이 뚫기고 북한군이 수도로 쭈욱~~밀고 내려오자 덩달아 다른 사단들도 후퇴해야만 했던 겁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고 하지만, 만약 북한이 독일식 교리에 따라 탱크를 비롯한 기계화 부대를 따로 꾸려 빠른속도로 밀고 내려왔다면
장담컨데 남한은 이떄 멸망했을 겁니다. 왜냐면 한국군 입장에서 북한 탱크를 이길 방법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죠,  근데 이걸 북한이 중국식교리. 즉 탱크+보병으로 운용하는 바람에 탱크의 진군속도가 보병에 맞춰져 버립니다. 개전초기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는데 3일이나 걸린건 이런 이유에서 비롯되었죠.)
 
그래도 뭐 어찌어찌 군을 수습한 한국군은 후방에 있던 2, 3, 5사단을 북진시켜 대응하기에 이르고,
한국군 1,2,3,5,7, 수도 사단은 말 그래도 눈물이 나는 고분 분투를 펼치며 한강이북에서 북한군을 저지합니다.
하지만 불리한 전황은 변하질 않았고 28일 아침, 서울 시내에 북한 탱크가 진입하죠.
그리고 이걸 보고 받은 대한민국 지휘부는 역사에 길이남은 대 병크를 터트립니다.
 
바로 한강인도교를 폭파시켜버린겁니다.
이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발상이군.jpg
덕분에 한강이북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던 1,2,3,5,7, 수도사단은......그냥 붕괴됩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요?
할 수 있는 거라곤 훗날을 기약하며 중장비를 모조리 버리고 자력으로 한강을 넘는 것 뿐이었죠.
이렇게 개전 초기 국군10만 병력중 5만이 순식간에 공중분해됩니다.
(물론 이 병력중 대부분은 다시 원대로 복귀합니다. 다만 이걸 가지고 한강철교폭파를 옹호하는 정신나간 놈들이 있는데,  중장비가 없는 부대+제대가 붕괴된 부대는 아무리 머릿수가 많아도 쓸모가 없습니다.)
 
이제 국군에게 남은건 강원도에 있는 6,8 사단. 대전에 있는 17연대와 영등포의 독립기갑부대, 그리고 기타 후방 경계부대가 다였습니다..(다시 이때로 돌아간다면 철교 폭파시키라고 한 놈을 잡아 쳐 죽이고 싶군요.)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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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포기한 바로 그때, 기적이 벌어졌습니다.
 
채병덕에게 지휘권을 인계받은 김홍일 소장이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1,2,3,5,7, 수도 사단의 재편성을 훌륭히 성공해 버리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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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런 혼성부대..가 아니라 그냥 막 섞인 부대로 무려 7일간 한강을 방어해 버리는 기적을 보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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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떄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냐면 대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차선에 오직 김홍일 장군의 지프차 한대뿐이었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전부 남으로 피난..)
(그리고 말끔히 다려입은 전투복을 입은채 흩어져 도망치는 병사들을 하나하나 붙잡으며 부대를 재편성...또 그런 병력으로 북한군을 막아내기까지....이게 사람인지 초인인지 헷갈릴 정도입니다.)
그 뿐인 줄 아십니까? 전략자체가 없던 한국군에게 지연전이라는 개념을 선사.
이후 진천-음성-청주 축선에서 추격하는 북한군을 말 그대로 섬멸 해 버리시며 낙동강 전선형성때 까지 한국군을 책임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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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jpg 
김홍일 장군( 독립운동가 출신. 따지고 보면 한국전쟁 초기 이분이 없었다면 지금의 남한은 없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다만 한국전쟁 중기 미군과의 마찰로 인해 강제 예편당하시죠 ㅜㅜ)
 
그렇게 한국군은 그나마 험한꼴 안보고 무사히 낙동강 전선을 형성. 이후  피비린내나는 수비전끝에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반격에 성공합니다. 물론 이후로도 수차례 더 막장스런 행보를 보여주긴 하지만요.
물론 이 모든건 창군이후 대전을 치뤄야 했던 한국군 입장으로서 수업료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로마가 한니발에게 수없이 털렸듯이 말이죠. 그리고 이때의 교훈을 바탕으로 한 전투교리의 큰 뼈대는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6.25전쟁 초기. 저희 전전세대 분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싸우였습니다. 잠시 묵념을 하며 글을 마칩니다.

출처 나무위키
국방부 출판 6.25전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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