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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의와 수용, 소통의 조선시대
게시물ID : history_273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려
추천 : 5
조회수 : 1011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6/12/30 03:15:20
조선은 고려말 폐단을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역성쿠데타로 세워진 왕조이다.
기본적으로 유교를 바탕으로 민본사상이 있었으며
중국 명황제나 일본 무사난립이나 절대군주 유럽과 달리
당시로서는 비교적 가장 소통하고 토론하는 국가시스템이 돌아가는 나라였다. 
(신분제도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야 함)  
국왕은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야 했으며, 독단하지 않았다.
 
세종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수년에 걸친 설문조사를 거쳤으며,
장애인 복지, 노비 복지 면 중에서는 현재 우리 서민의 삶보다 나은 점들도 있었다.
 
조선 중기, 조세제도 변경은 여러대에 거쳐
의견을 듣고 변경하면서 시범지역을 확대해나갔다.
 
조선 후기, 왕실 외척들의 세도정치와 삼정문란 부정부패로 헬조선이 되기도 했으나
사회문제에 반말하여 갑신정변(1884),동학농민운동(1894)이 일어났고
이는 갑오개혁(1894)에서 수용되어 신분제도를 폐지했다. 
 
(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제국주의로 신분제가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먼저 우리나라 스스로 신분제를 폐지했다....
오히려 일본은 현대까지도 전근대부터 내려온 권력세습, 부락민 차별 등 신분차별이 존재한다.)
 
(유럽국가들도 1840~1850년대에 노예제를 없앴고,
미국의 노예해방은 1865년이었다. 1894년 폐지한 우리나라는 매우 빠른 편.. 
반면에 그 서양 날도적들은 자국민 신분제는 없앴으나 대신에 제국주의 식민지 주민들을... 희생시켰다.)
 
지금 동아시아에서 북유럽을 선망하는데,
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그나마 현대기준으로 가장 인간존중을 하는 나라가 조선이었다고 본다.
 
올해 우리나라는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문제들이 터져나왔고,
그야말로 21세기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 국민들은 불통과 실정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다...    
 
왕정신분제국가였던 조선에서 조차도 이러하였거늘 하면서
많은 국민들이 답답해하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현주소에서 볼만한 이야기 
중흥기 영·정조 시대의 두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한광국
- 경상도 동래부 다대진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 일원)
 
조선시대 다대포 주민들처럼 포민(浦民),
즉,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며 살아가는 갯마을사람들은 천민이었다.
 
짚으로 만든 허리띠와 머리띠를 해서 구별하였고,
정월초하루 새벽에는 고을 사또에게 절하러 가야하는 폐단으로
조상 제사를 정월초하루(음력1월1일) 설날에 지내지 못 하고
하루 전날인 섣달그믐(음력12월막날)에 지내야 했다.
 
조선에서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 하는 것은 크나큰 차별이었다.
 
영조시대, 다대진의 아전 한광국은 아픈 몸을 이끌고
천리길 한양을 수차례 찾아가서 포민차별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
 
몇년후 1763년 바닷가 갯마을사람들 포민들(어업민들)의 면천 결정이 내려졌다.
이에 다대포는 물론, 다른 지역 어민들도 비용을 모아서
한광국을 기리는 한광국불망비(한국을 잊지 말자고 새긴 선돌)를 2군데 세웠다.
 
김이수
- 전라도 나주목 흑산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 일원)
 
흑산도는 외딴섬으로 나주에서 뱃길로 수백리라서 귀양지였다.
부역이 많고 세금이 무거운 와중에
나쁜 관리들이 부임하면 주민들의 괴로움이 더 하였다. 
 
특히, 장정 1명당 닥나무 40근에 달하는 닥나무종이 세금은 가혹했다.
생업에도 지장을 주었고, 닥나무도 섬 안에서 바닥이 났따.
 
이에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섬을 대표하여
흑산진에 탄원했으나 접수조차 되지 못 하였다.
 
이에 김이수는 다시 나주목에 탄원했으나
나주목에서는 오래된 세금제도를 함부로 고치는 것을 난처해하며 반려했다.
 
이에 김이수는 다시 전라도감영에 탄원했다.
전라감사는 현지조사를 지시했다.
그러나 관리들의 형식적인 조사로 흐지부지되었다.
 
김이수는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러 한양으로 갔다.
 
이때 정조는 수원행차를 나섰다.
정조는 임금의 행차를 보러 올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로 널리 널리 알렸다.
그리고 백성들이 격쟁(꽹과리를 쳐서 알림)하고 상언(말씀을 올림)할 수 있도록 하였다.
 
김이수는 흑산도의 일을 격쟁하여 상언하였다.
 
정조는 당시 행차에서 100여건의 상언을 처리하였다.
 
이중 흑산도의 일을 두고 대신들은 우려.. 우려하였다.
"흑산도의 닥나무종이 세금을 줄이면
기존에 나라와 관청에서 쓰던 그분량을 또 어딘가에서 부담해야 합니다."
 
이에 정조는 "세금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나라에서 감수하여야 한다"고 했다.
손상익하(損上益下) 위에서 덜어냄으로써 아래는 얻는다는 말이다.
 
1791년, 불합리하고 가혹했던 흑산도의 닥나무종이 세금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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