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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제, 겉만 핥는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739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3
조회수 : 895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7/01/16 16:58:58



겉만 핥는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즐겁게 읽어주세요.





조선 기 봉수제도는 고려의 것을 이어받았다.

 

고려의 봉수제는 고려 후기 이전에는 단편적인 기록밖에 없으나 왜구의 침입이 잦아진 이후,

봉수제 기록이 늘어나는 것으로 보아 왜구의 침입이 고려 후기 봉수제의 강화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봉수제의 중요성과는 별개로 봉수제를 담당하는 봉수군의 신분적 위치는 죄인을 포함한

비천한 계층이었다는 것만을 알 수 있다. 세세한 기록이 전하지 않아 고려시대의 봉수제에 대해 알기 어려우나

고려 후기의 봉수제를 이어받은 조선전기의 봉수제도를 살펴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봉수제를 이어받았다고 확실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태종시기부터 봉수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봉수제를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와 구별될 수 있는 조선의 봉수제는 세종시기, 고려의 봉수제를 바탕으로 봉수제를 새롭게 재편하고

봉수망을 정비하는 조치를 취하여 조선의 봉수제의 기초를 세운 것이 시작이다.

 

세종시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봉수제의 기본인 평시 봉화 1, 적과 전투 시 봉화 5개라는 규칙이 정해졌고

피폐해진 봉수대를 보수하고 근무자에 대한 벌칙규정을 제정했다. 특히 세종시기 46진 개척과

봉수제의 확립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는데, 북방의 방어를 위해 한성 이북의 봉수대가 중점적으로 확장되고

정비되었으며 일부 봉수대는 병기보관시설을 갖추고 시설을 확장하여 인근 주민들의 긴급피난처 및

일정기간 야인들에 맞서 버틸 수 있는 요새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한성 이북에 비하면 덜했지만, 한성 이남,

특히 왜구의 침입이 잦은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왜구의 침입을 알리기 위해 봉수제가 정비되었다.

 

세종시기 정비가 대체적으로 완료된 봉수제는 성종 재위기간, 경국대전에 수록됨에 따라 조선의 봉수제는

완성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에서 담당했고 지방에서는 영진군에 속하게 하였다.

중앙, 지방을 막론하고 모든 봉수대에는 봉수군이 편성되었는데 봉수군은 봉수대 위에서 기거하면서 근무하고

연기와 불빛으로 다음 봉대에 연락이 불가능할 경우 전령의 임무를 맡았고 그들의 근무는 각 고을의 수령들이

감시하여 봉수군의 근무와 수령의 평가를 연대책임 하에 두었다.

 

이런 시스템을 갖춤으로써 경국대전에 따르면 당시 조선 조정은 변경에서 한성 남산 봉수대에 이르기까지

1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비된 시스템과는 별개로 봉수군의 처지는 고려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고려 후기 죄인을 봉수군으로 삼던 풍습이 그대로 이어져 조선 봉수군 또한 신분산으로는 양민이지만

국역부담에 있어 천역을 담당하는 신량역천이었다. 조선 초기에는 갑사나 정군과 같이 비교적 상위 신분을

봉수군에 편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그들의 반발과 운영상의 어려움으로 봉수대 근처에 사는 주민을

봉수군으로 묶어버렸다. 봉수군은 첩첩산중에서 일해야 하는 것에 비해 급료는 형편없었으며 책임만은 막중하여

중요 사항을 위반할 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봉수군은 매우 기피되는 국역이었다.

 

다만, 신량역천이 담당하는 칠반천역 중, 봉수군이 가장 쉬운 편이었고 변방의 봉수대나 주요한 지점의 봉수대가

아니라면 중앙과 지방수령의 감독이 느슨하여 근무를 태만하게 하여도 처벌받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한성 인근과 내륙 일부지역의 봉수군은 칠반천역 중에서는 인기가 높은 편이었다.

 

이러한 봉수군의 어려움을 해결하여 자연스럽게 봉수군이 국역에 능동적으로 복무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보다는

봉수군을 강력하게 봉수업무에 묶어두는 처벌규정이 엄하게 정해졌다. 각종 위반사항에 사형부터 장형, 태형에

이르기까지 처별규정이 세세하게 정해졌고 봉수군 업무를 3자에게 대립시켰을 때에는 대립한 장형 60대에

봉수군 편입, 대립을 세운 자는 장 80대에 봉수군에 편입시키는 등 엄벌주의가 강했다.

 

이러한 엄벌주의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봉수제는 초기부터 많은 문제점이 나타났다. 평화가 오래기간 지속된

성종시기부터가 아니라 봉수제를 완성한 세종시기부터 봉수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12시간이면 변경에서 한성까지 도달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국방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 봉수제는

세종 1528, 변경에 적이 침입했으나 봉화가 오르지 않았다는 기록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설립 직후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그나마 국방에 관심이 많고 봉수제를 보완하고자 노력을 기울였으며 북방개척과 왜구 문제 등으로

봉수에 관심을 기울이던 조선 초기를 지나 태평성대가 지속된 성종시기에는 봉수대에 사람이 없어 봉수제가

작동하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성종 25년 남도포에서 왜구가 왜변을 일으켰으나 봉수가 기능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연산군 이후, 중종은 집권과 더불어 봉수제를 재건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봉수제는 여전히 마비상태였고

삼포왜변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봉수가 이를 알리지 못했다. 중종때 이미 설립초기에는 변경에서

12시간이면 한성에 도착한다는 봉수는 1개월이 걸려도 중앙에 도착하기 어려운 형편으로 전락했다.

 

중종 시기 재건시도가 실패하자 봉수제는 임진왜란 때에도 긴급한 소식을 중앙에 전달하는 임무에 실패했다.

정유재란에도 봉수제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고 변경의 위급을 신속하게 전달한다는

봉수제는 껍데기만 남은 상태였다.

 

봉수제가 무너진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는 봉수대 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 날씨가 좋지 않으면

봉수대간의 통신이 불가능하여 사람이 직접 전달해야 했다는 것이다. 거리가 멀고 봉수대간 도로가 없어

험준한 산을 타서 전해야 하는 어려움과 호랑이와 같은 맹수로 말미암아 전령이 사라지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봉수군들이 사실상의 천민으로 가난한 이들이 많아 사비로 말을 구비할 수 없었던 점이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장기간 평화가 지속되어 봉수군들의 기강이 매우 해이해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봉수군들의 근무에 대한 기록을 보면 봉수군들은 오랜 평화로 앞의 봉수대를 살피지 않고 기계적으로

평시를 의미하는 하나의 연기만 올렸다.

 

세 번째 이유는 조선 정부의 봉수대 관리 미비다. 야인들이 간혹 준동하는 북방의 봉수대는 그나마 유지보수가

되고 있었지만 세종 25년 기해약조 이후 왜구의 침입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남방의 봉수대는 규정대로

축조되지도, 운영되지도 않았으며 사실상 유명무실화하였다.

 

네 번째 문제는 봉수군들의 자체의 문제이다. 고려시대와 같이 여전히 죄인들을 봉수군에 편성하여 국역을

지웠고 국역부담이 과도한 신량역천계층에게 봉수군 업무까지 지웠기 때문에 봉수군들의 사기는 매우 낮았다.

봉수군이 다른 국역 업무에 비하면 쉬운 편이어서 인기가 높았지만, 세종 때부터 이미 장부에 실제로 올라있는

봉수군은 대개 다른 업무에 종사하였다. 첩역이라고 하는 여러 국역을 한꺼번에 지는 행태는 봉수군에서

특히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봉수대에 직접 근무하는 봉수군은 1명이거나 노인이나 어린이들이 근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울산지역 봉수군 기록을 보면 봉수군 중 21%14세 이하인데 이들도 봉수군의 인력부족으로

실제로 근무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으로는 봉수군에 대한 대우가 봉수제를 붕괴시켰다. 봉수군은 10일교대로 험준한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근무하였는데 식량과 일용품등을 지고 올라가는 것도 문제였지만 봉수군이 대개 가난한 계층이었기 때문에

봉수대에 올라가 근무하다 얼어 죽거나 굶어죽는 경우가 왕왕 일어났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봉수군 국역이

60세까지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봉수군은 죽을 때까지 봉수업무에 묶여 있어야 했으며,

실제로 60살을 넘겼다 하더라도 규정대로 면역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봉수군은 언제나 부족했고

실제로 봉수대에 오르는 사람이 적었기 때문에 봉수에 실제로 오르는 봉수군이 있었다면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봉수대에 묶여 있어야하는 고역이었다. 당연히 도망치는 봉수군이 매우 많았다.

울산지역 봉수대에서는 봉수군의 약 20%가 도망쳐 봉수군 국역에서 이탈했다는 기록이 있다.

 

 

봉수제는 유명무실화하였으나 고종 31(1894)까지 잔존하다 전신의 등장으로 완전히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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