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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호구가 된 텅빈 나라.
게시물ID : history_276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금연구가
추천 : 3
조회수 : 130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03 18:24:54
모문룡과 가도주둔 명군 글에 이어서 정묘호란~병자호란 사이 시기의 인조 시대 조선 대외 관계의 상황에대한 글을 써보겠습니다.

1. 대명관계-굉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인조에게는 정통성이 없었고 그러므로 명의 책봉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백해무익한 존재였던 가도 주둔 명군(평안도 철산군 가도에 주둔하던 명군) 총지휘관 모문룡에게 바리바리 떡값을 퍼주며 로비스트로 활용해서 결국 책봉받는데 성공했으나 그 대가로 인조와 인조 정권은 모문룡과 가도주둔명군이 행패를 부리고 범죄를 저질러도 아무 소리 못했고 오히려 많은 돈, 식량, 물자를 제공했으며 심지어 모문룡 공덕비까지 세워야했습니다.

이는 모문룡이 사형당한 뒤에도 바뀌지 않았고 이히려 어설프게 모문룡 대신 새로운 가도 주둔 명군의 지휘관이 된 상관 진계성을 죽이고 새 가도의 지배자가 된 유흥치를 하극상 죄를 물어 토벌하려다 무위로 돌아가고 오히려 이 사실이 유흥치에게 알려져 약점이 잡혀서 다시 바리바리 뇌물을 먹여야했습니다.

문제는 가도 주둔 명군뿐이 아니었습니다. 원숭환 등 중국동북지구 방어를 책임진 장수들이 계속해서 청을 공격하는데 협조하라고 조선에 요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게다가 한번씩 찾아오는 명의 사신들 세자 책봉,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을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을 승인히는 문제 등으로 들어왔는데. 이들 대부분이 중국 역사상 탐역의 끝을 달리는 명대 환관들로 당연히 무수한 뇌물을 요구해서 박박 긁어가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명사대를 집권명분으로 내세우고 그걸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하여 그것으로 사대부의 지지를 유지하는 인조 정권은 달라는대로 퍼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2. 대청(후금)관계 - 정묘호란에서 사실상 승리한 청은 조선과 형제관계를 맺고 형 나라 자격으로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았고 포로들을 인질로 잡고 몸값을 요구하하며 식량과 물자를 챙겨갔습니다.특히 무역을 자주 요구했는데 만주지역에 든 흉년, ,명의 경제제재와 금수조치, 신흥국으로서  각종 수요가 넘쳐나 물자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어서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청은 모피,산삼,진주를 들여와 조선의 곡물, 농기구, 무기, 서적, 농사용 소와 바꿔갔고 조선에 들어온 명국제, 일본제 물품도 사갔습니다.

중계무역을통해 경제적 이익을 쌓을만도 했으나 인조 정권은 무역 확대에 소극적이어서 청은 이것이 불만이었습니다.명나라는 꽁으로 뜯어가도 다 퍼주면서 왜 우리는 값도 다 치르겠다는데 교역을 못하게 하느냐? 하며 매일 따졌지만 명나라 눈치도 봐야했고 또 청나라 상인들이 저질상품을 들여와 강매를 하거나 단가를 후려치는등의 문제가 있었습니다.반대로 조선 상인들이 불량품 판매하고 바가지 씌운다고 청나라에서 항의하기도 했습니다. 하여튼 청에게도 조선은  많이 퍼줘야하는 처지였습니다.  

3.대일관계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과 단교가되었으나 여진이 강성해지면서 양면전의 위험으로인해 광해군때에 국교가 정상화되었으나 교역규모는 한정되어있었고 일본사신, 사실상 대마도 사신은 한양까지 못가고 부산까지만 와야했습니다. 게다가 도쿠가와 막부는 통신사 유치를통해 권위를 높고자 해서 대마도에 조선 통신사가 자주 오도록하라고 압력을 넣던 상황이어서 대마도는 다급한 상황이었습니다.그러나 정묘호란이 터지니 대마도는 이를 기회삼아 조선에 칼,화약,조총을 바치면서 무역확대, 조선통신사 파견 횟수 증대, 일본 사신의 한양 출입 허용을 요구했습니다. 


조선에서는 논란끝에 얘네들까지 또 쳐들어오면 안 된다해서 다들어주고 한양으로 올라오는 인원도 15명에서 19명으로 늘려주는 조건에 합의했습니다. 이에 그치지않고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과 무역선을 오지 못하게하자,대마도가 요구한 위약금까지 어마어마하게 물어줘야 했고 이후에는 대마도에서 요구하는 면포3만필까지 퍼다줍니다. 그 와중에 일본 사신단 조선은 물론이고 명과 청에대한 정보를 부지런히 수집했습니다. 이는 무려 대마도 차원에서만 벌인 일이 아니라,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지시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 인조는 인조 반정 직후 오랑캐를 무찌른다면서도 광해군이 명과 청에 심어둔 정보망을 모조리 철폐하고 정보 수집같은 거는 난 모른다, 관심없다면서 무력화 시켰습니다. 

이후 병자호란까지 치르자 일본은 일본 연호를 서류에 쓰면서 조선이 야만족 오랑캐를 상국으로 모시면서 그 연호를 쓰는데 만주족 오랑캐보다 더 잘난 우리 일본이 독자적인 연호를 못 쓸 이유가 없다고 면박을 들어주는 굴욕을 감수하고 만주족한테 털리고 우리한테 또 털리고 싶지 않으면 우리의 요구 조건을 모두 수용하라고 요구하니 몽땅 들어주고 맙니다. 


통신사를 더 자주보내고, 일본을 대표하는 대마도 사신단의 대접과 의전지위를 격상하고, 도쿠가와 막부에 새 쇼군이 등극할때마다 축히사절을 보내야하고, 대마도가 필요로하는 물자의 교역량을 늘리란 것이었습니다. 인조는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에게 친필 서예선물까지 보내는 정성을 보여야했습니다. 일본 외교의 승리였습니다.


대외관계는 이 지경이었으나 반정공신들은 재산 축재에 혈안이되어 남의 토지 갈취를 일삼고 지방관들은 기생을 끌어안고 연회를 벌이며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인조 정권은 이괄의 난 같은 반란이 우려된다며 대신들과 장수들, 명망가들을 사찰하고 잇었는데, 정묘호란 패전 후에 인조 반정의 명분이었던 대명사대의리 고수와 오랑캐 토벌이란 목표가 실패하고 오히려 반대가 되어버리자 "능양군(인조의 왕자 시절 군호)은 하야하라! "면서 광해군 시절이 나았다며 광해군을 도로 추대하려는 역모까지 발각되면서 더더욱 쫄아버린 정권이 사찰을 강화하니 군사 훈련도 제대로 못하는 지경이었고 전국에서 도적떼가 들끓었습니다. 
 


이런 조선의 사정을 두고 정묘호란 당시 우의정이었던 이정구는 씁니다.
"텅 빈 나라(空虛之國)의 처지로 남북으로 침략을 걱정해야하는 현실에서...'

선조 때 율곡 이이는 나라가 이미 나라 꼴상이 아니라고 했으나, 인조 시기 조선은 꼴상조차도 없는 텅 빈 나라, 공허지국이 된 상태였습니다.

정묘호란~병자호란 사이의 시기는 대외적으로는 국제호구가되어 여기저기서 삥뜯기고 대내적으로는 반정공신들이 날뛰고 주민들은 파산하고 굶어죽고 도적들 들끓는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이 시기에 인조는 무엇을 하였을까요? 

임금 자리에 오른 적도 없었는데 역모죄에 휘말린 인조의 동생 능창군이 광해군에게 죽자 화병으로 죽은 아버지 정원군을 정식 임금으로 추숭하는 일에 골몰했습니다. 박근혜처럼 아버지 명예회복하는 일을 최고의 국정 과업으로 삼았고 이에 반대하는 대신들과 긴 다툼 끝에 기어이 원종이라는 추존 묘호를 올리고 추존 국왕으로 올리는 데 성공합니다.

 이 짓을 하는데 걸린 기간이 자그만치 10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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