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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 진회, 목숨을 걸고 장방창의 즉위에 반대하다
게시물ID : history_2763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토츠카
추천 : 2
조회수 : 89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3/04 08:57:09
1126년, 중국 송의 수도 개봉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보자면, 당시 송나라와 금나라는 동맹을 맺고 요나라를 멸망시킨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황제였던 송휘종은 금나라한테 약속한 공물을 바치지 않고, 오히려 요나라의 잔당과 손을 잡고 금나라를 견제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요나라는 이미 거의 멸망한 바나 다름이 없었고, 요나라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가 금나라에 사로잡혀 이러한 내통이 들통나게 됬습니다.

이에 격노한 금나라는 군대를 출동시켰고, 개봉을 포위합니다. (당시 곽경이라는 사기꾼이 도술로 이길수 있다며 전장에 나섰지만 개박살.)
송휘종은 송흠종한테 양위하고 남쪽으로 도망쳐 버렸고, 송흠종은 금나라와 강화를 맺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송나라 관료들이 단체로 정신줄을 놓았는지 강화를 깼고, 열받은 금나라는 개봉을 다시 공격, 함락시킵니다.

그리고 당시 송나라의 재상이었던 장방창에게(금에 사신으로 와서 익숙했던 사람이었고, 겁이 많았기 때문.) 황제가 되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때 금나라가 두려워하여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했는데, 감찰어사 마신이 먼저 백관에게 송의 황실을 보존해야 한다고 말했고,
진회가 총대를 매고 장방창이 아니라 송의 황실을 도로 세워야 한다고 간언합니다.

이에 금나라는 크게 노하여 진회를 포로로 잡아갔고, 장방창을 계획대로 괴뢰황제로 세웁니다.
그러나 진회가 예언한 것처럼 장방창은 민심을 얻지 못했고, 지방의 황족이 대를 이어 남송이 건급되게 됩니다.
한편 진회는 충신이라 하여 금나라의 존중을 받았고, 3년뒤 풀려나게 됩니다.

금사하고의 교차검증, 다시 시대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악비의 전공이 과장되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자연스럽게 재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지요.


이하 전문은 송사 간신 진회열전을 길공구님이 번역하신 것을 가져온 것입니다.
출처: http://gil092003.egloos.com/m/9883947

[정강] 2년(1127년) 2월에, 막주(莫儔)와 오견(吳幵)이 금영(金營)으로부터 왔는데,

이성(異姓/다른 성씨)를 추립(推立/제위에 추천함)하라는 금수(金帥/금의 장수 종한과 종망)의 명(命)을 전(傳)하였다.

유수(留守) 왕시옹(王時雍) 등(等)이 백관(百官)과 군민(軍民)을 소집(召)하여 

공의(共議/함께 의논함)하여 장방창(張邦昌)을 세웠는데,

모두 실색(失色/안색이 변함)하여 감(敢)히 답(答)하지 못하였는데,

감찰어사(監察御史) 마신(馬伸)이 무리에게 고하여 말하길

「아조(吾曹/우리들)는 쟁신(爭臣/간관)의 관직(職)에 있으면서, 

  어찌 좌시(坐視/앉아서 바라보기만 함)하고는 한 마디로 토(吐/말함)하지 않겠는가?

  마땅히 의장(議狀/논의 장소)에 공입(共入/함께 들어감)하여, 

  애걸(乞)하여 조씨(趙氏)를 보존(存)해야 한다.」

이때 진회(檜)는 어사대(台)의 장(長)이었는데, 마신(伸)의 말을 듣고는 옳다 여겨,

곧 논의장(狀)에 진입하여 말하길


진회(檜)는 나라의 후은(厚恩/후한 은혜)을 하(荷/은혜를 입음)하여,

보답(報)함이 없음을 심괴(甚愧/심히 괴로워함)하였소.

지금(今) 금인(金人)이 중병(重兵)을 끼고, 이미 성(城)을 발(拔/뿌리 뽑음)함에 임(臨)하였고,

생살(生殺)의 병(柄/손잡이)를 조(操/손에 쥠)하고는, 필히(必) 역성(易姓/성씨를 바꿈)하고자 하니,

진회(檜)는 모두 죽어 이로써 변(辨/바로잡음)하여, 주(主/임금)에 충성(忠)할 뿐만 아니라,

장차 양국(兩國)의 이해(利害/이로움과 해로움)를 분명(明)하게 할 뿐이오!.

조씨(趙氏)가 조종(祖宗/태조)으로부터 이로써 사군(嗣君/임금 자리를 이어받음)에 이르기까지,

170여 년이오.

잠시 간신(奸臣)이 패맹(敗盟//맹세를 깨트림)한 연(緣/이유, 연유)으로,

인국(鄰國/인근 국가)과 결원(結怨/서로 원수가 되거나 원한을 품음)하였고,

모신(謀臣/모략을 꾸미는 신하)이 실계(失計/실책)하여, 오주(誤主/임금을 그르침)하고 상사(喪師/군사를 잃음)하였고,

마침내 생령(生靈/살아 있는 백성)이 피화(被禍/화를 입음)에 이르렀으며,

경도(京都/수도 개봉)를 실수(失守/지키지 못 함)하였고, 주상(主上/임금)이 출교(出郊/성밖으로 나감)하였고,

군전(軍前/금나라 군영)에서 구화(求和/화친을 구함)하였소.

양(兩) 원수(元帥/종망과 종한)가 이윽고 그 논의(議)를 윤(允/허락함)하여,

중외(中外)에 포문(布聞/널리 전함)하였으며, 또한 탕장(帑藏/황실 창고의 재물)을 공갈(空竭/다해서 없어짐)하였고,

사용할 복어(服禦/어복)마저 추취(追取/구하여 취함)하였고, 

양하(兩河)를 할지(地)하였고, 공손(恭)히 신자(臣子)가 되었는데, 

지금(今) 곧 전의(前議/전의 의논)을 변역(變易/고쳐서 바꿈)하니,

인신(人臣/신하 된 사람)으로 차마 죽음이 두려워 논(論)하지 못하는 것이오?

중국(中國)에서는 송(宋)이, 참령(號令/지휘하여 명령함)하여 일통(一統/하나로 합침)하며,

면지(綿地/길게 잇닿은 땅)가 만리(萬里)이고, 덕택(德澤/덕과 은혜)를 백성(百姓)에게 가(加)함이,

전고(前古/지나간 옛날)에 있지 않았소.

비록 흥망(興亡/흥하고 망함)의 명(命)은 하늘의 유수(有數/정하여진 운수나 순서가 있음)에 있으나,

어찌 일성(一城)을 잃었다고 폐립(廢立/임금을 폐하고 다른 임금을 세움)을 결정(決)하시오?

옛 서한(西漢/전한)은 신실(新室/왕망의 신나라)을 절(絕/끊음)하고, 광무제(光武)가 이로써 일으켰소.

동한(東漢)은 조씨(曹氏)에 절(絕/끊음)하고, 유비(劉備)가 제촉(帝蜀/촉 황제)하였소.

당(唐)은 주온(朱溫/후량 태조)이 찬탈(篡奪)하였으나, 

오히려 이극용(李克用/후당 태조)이 그 세서(世序)를 추(推/받듦)하고 계승(繼)하였소.

대개(蓋) 기광(基廣/넓은 기초)은 곧 난경(難傾/쓰러뜨리기 어려움)하고,

근심(根深/뿌리가 깊음)하면 곧 난발(難拔/뽑기가 어려움)한 것이오.

장방창(張邦昌)은 상황(上皇/휘종) 당시(時)에 있으면서, 권행(權幸/권신)에 부회(附會/비위를 맞춤)하였고,

모두 나라의 정치(政)에 두(蠹/좀)가 되었소.

사직(社稷)이 경위(傾危/형세가 위태로움)하고, 생민(生民)이 도탄(塗炭/몹시 고통스러운 지경)함은,

진실로 일인(一人)의 소치(所致/어떤 까닭으로 생긴 바)가 아니오?

역시 장방창(邦昌) 때문이오.

천하(天下)가 바야흐로 고통받고 구수(仇讎/원수)와 같이 여기는데,

만약(若) 토지(土地)로써 부(付/줌)하고, 인민(人民/신하나 백성)을 주인(主)으로 한다면,

사방(四方) 호걸(豪傑)이 필히(必) 공기(共起/함께 일어남)하여 주살(誅)할 것이고,

마침내 대금(大金)의 병한(屏翰/병풍과 기둥)함이 부족(不足)할 것이오.

필(必)히 장방창(邦昌)을 세우면, 곧 공사(京師/수도 개봉)의 백성은 복종(服)할 것이나,

천하(天下)의 백성은 복종(服)하지 않을 것이오.

경사(京師/수도 개봉)의 종자(宗子/황족)는 멸(滅)할 수 있으나, 

천하(天下)의 종자(宗子/황족)은 멸(滅)할 수가 없소.

종회(檜)는 부월(斧鉞)의 주살(誅)을 불고(不顧/돌아보지 아니 함)하니,

양조(兩朝/송과 금)의 이해(利害/이로움과 해로움)를 말하자면,

원(願)컨대 사군(嗣君/임금 자리를 이어받음)의 위(位)를 회복(復)하여 사방(四方)을 이로써 안정(安)시키고,

대송(大宋)의 몽복(蒙福/복을 꿈꿈)할 뿐만 아니라, 또한 대금(大金)의 만세(萬世)에도 이(利)로운 것이오.


금인(金人)이 진회(檜)를 심취(尋取/찾아 잡아감)하여 군전(軍前)에 예(詣/다다름)하였다.

출처 http://gil092003.egloos.com/m/9883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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