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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첫번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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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로옴
추천 : 3
조회수 : 76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3/12 12: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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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현대사는 때로는 환희에 때로는 오욕과 회환에 젖은 역사였다고 생각합니다.

그중 가장 민감하고 현재까지도 의문이 남은 38년전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7시 청와대 부근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에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대통령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에게 총격을 가해 이들을 살해했습니다.

정부는 대통령의 유고를 이유로 10월 27일 04시를 기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습니다. 

계엄사 합동수사본부(합수부)는 11월 13일 사건을 육군본부 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고, 검찰부는 11월 26일 김재규 등을 내란 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군법회의에 기소했습니다.

체제유지의 버팀목인 현직 중앙정보부장의 대통령 살해라는 초유의 사건에 대한 재판은 12월 4일 국방부 청사 뒷편의 계엄보통군법회의 대법정에서 열렸습니다.

인정신문과 공소장 낭독이 끝난뒤 김재규의 변호인단을 대표하여 김제형 변호사는 이 사건은 "역사의 심판, 국민의 심판만이 있을 수 있을 뿐" 이며 현재의 법체계로 재판하는것은 "몹시 부적당"하고 "재판 과정 및 절차의 적법성이 무엇보다도 철저하게 보장"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김재규가 박정희를 쏘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명백한 사실이었지만, 10.26 사건 재판은 처음부터 관할권 문제, "내란 목적 살인인가, 단순 살인인가", "우발적 행동인가,계획적 행동인가", "이른바 확인사살은 살인죄인가,사체 훼손인가" 등 쟁점이 많았습니다.

첫 공판에서 변호인들은 계엄선포의 정당성과 재판관할권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당시 헌법은 대통령은 "전시 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에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다고 했고, 계엄법은 보다 구체적으로 "비상 계엄은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할 사변에 있어서적의 포위 공격으로 인하여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었습니다.

변호인들은 자연인인 대통령의 피살이라는 계엄 선포 이유는 "적의 포위공격" 이라는 비상계엄 선포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것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또한 변호인들은 김재규 등의 행위는 계엄 선포 이전에 벌어진 것이기 때문에 군법회의가 재판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대법원에 재판권에 대한 재정신청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은 계엄선포의 정당성을 판단할 권한은 사법부가 아니라 헌법상 계엄해제요구권이 부여된 국회만이 갖고있고, 계엄선포 이전의 행위라도 군법회의에서 관할한다는 판례가 있다는 이유로 재정신청을 기각했습니다.

이 사건의 수사 책임자인 보안사령관이 전두환이라는 정치군인이었다는 사실은 재판의 진행뿐 아니라 한국 현대사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유신체제는 1인 독재 체제의 정점 박정희만을 잃은것이 아니었습니다.

중앙정보부장,대통령 비서실장,경호실장 이라는 권력 서열 2~4위 중 한명은 피살되고,둘은 정범과 공범으로 법정에 섰습니다.

계엄사령관이 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는 사건이 나던 시각에 김재규의 초대로 궁정동 안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김재규와 공모한 것이 아닌가 하는 따가운 시선을 받고 있어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새 대통령은 허수아비였고, 유신체제 유지의 버팀목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역적으로 전락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힘의 공백이 발생한 데다가 10.26 사건 자체가 실정법상 중대 형사사건이어서 수사기관인 합수부에 힘이 쏠릴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엄사령관 정승화가 전두환애게 쏠리는 권력을 견재하기 위해 그를 보안사령관 직에서 해임하려 하자 전두환이 하극상을 일으켜 정승화를 체포했습니다.

노태우는 민정당 대표위원 시절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민주인사 처럼 얘기되며 되살아나려 하고" 있는것을 두고볼수 없었던 것을 12.12 사태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았는데, 신 군부에게 이 재판은 그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유신체제의 수혜자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나아가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 그들은 재판의 전 과정에 깊숙히 개입했습니다.

그러니 형사소송의 생명인 절차적 정의는 처음부터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12월 4일 처음 열린 재판은 재정신청의 결과를 기다리는 사흘간과 12.12 사태가 발생한 다음날인 13일과 일요일만 제외하고 거의 매일 밤늦도록 열렸습니다.

재판은 미리 짜여진 각본대로 절차를 무시한채 초고속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회 공판에서는 피고인 중 유일한 현역군인인 박흥주 대령(김재규의 수행비서) 의 변호인인 태윤기 변호사가 계엄하 현역군인에 대한 단심제를 규정한 군법회의법이 위헌이라며 재판부가 위헌제청을 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재판부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이에 태 변호사가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자 재판부는 이 역시 기각했고, 태 변호사가 다시 법관 기피신청 사유서와 즉시 항고장을 제출하려 하자 군판사인 황종태 대령의 퇴정명령으로 헌병들이 그를 법정에서 끌어내렸습니다.

재정신청도 기각되고 공정한 재판을 위한 재판부 기피신청도 기각되고 재판부의 거듭된 신문제한으로 변호인들의 손발은 꽁꽁 묶여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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