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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6일 두번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76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로옴
추천 : 1
조회수 : 58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3/13 18:13:00
첫번째 이야기로부터 이어집니다.

김재규는 4회 공판에서 사선변호인의 변호를 거부하겠다는 뜻밖의 선언을 했습니다.

김재규는 자신의 행위는 "민주 회복 국민 혁명"을 기도한 것이었다면서 "소신과 신념과 확신을 가지고 한 혁명"이 재판을 받는데 변호인은 필요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군법회의는 반드시 변호사가 있어야 하는 필요적 변호이기 때문에 재판부는 다른 피고인의 변호사인 안동일, 신호양 변호사를 김재규의 국선 변호인으로 선임했습니다.

이돈명 변호사는 유신체제 수호의 야전사령관이던 김재규가 박정희를 살해했다고 해서 무작정 변호를 맡은 것은 적절치 않다고 처음에는 생각 했지만 그가 평소 "민주주의 만세", "민권 승리" 같은 붓글씨를 쓰는 것을 보고 마음을 돌려 변호를 맡았다고 회고했습니다.

당시 김재규의 행동에 대해 유신체제쪽 사람들은 대통령을 '시해'한 '패륜'이라고 한 반면, 민주 진영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주장한 '민주회복 국민혁명'주장에 동조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을 비롯한 많은 사람은 유신체제가 이미 민중의 힘으로 그 붕괴가 임박했는데 김재규의 행동으로 군이 나설 소지를 준것 아니냐고 아쉬워 하는 분위기 였습니다.

김재규는 박정희의 시위대에 대한 발포 의지나 차지철이 킬링필드에서 200만~300만을 죽이고도 까딱없으니 우리도 100만쯤 죽여도 문제없다는 등의 발언을 한 것을 소개하면서 대규모 유혈참사를 막고 민주주의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거사 배경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박근혜의 구국여성봉사단 문제, 박지만의 행실문제 등 자녀 문제를 항소이유보충서 등을 통해 거론했지만, 박정희의 여자문제에 대해서는 본인도 함구했고 부하 박선호의 발언을 제지하기도 했습니다.

항소심에서는 김재규도 마음을 바꿔 변호인을 다시 선임했지만, 1심에서나 2심에서나 변호인들의 변호권은 여전히 극도로 제한되었습니다.

변호인들은 방대한 수사자료를 검토할 시간도 없이 매일 밤 늦게까지 재판을 해야했습니다.

변호인들은 처음부터 법정에서의 모든 발언과 진술을 녹취할 권리를 허용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재판장은 공판조서를 명확히 작성 하겠다며 이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국선 변호인 안동일 변호사는 "변호인들이 줄기차게 요청한 공판조서 열람 청구도, 공판 조서에 대한 이의 신청도, 외부 의사 진단 신청도, 현장검증 신청도, 그 많은 증인 신청도 물거품."이 되었다고 한탄했습니다.

변호인들의 녹취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합수부 관계자들은 법정 옆 법무감실에 모여 스피커로 법정의 모든 발언을 듣고 녹음하며 대책을 협의했습니다.

신군부가 비밀리에 녹음한 테이프는 1994년에 유출되어 [박정희 살해 사건 비공개 진술 전 녹음 최초 정리](동아일보사,1994) 라는 두권의 책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합수부 관계자들은 재판 도중 수시로 재판부에 쪽지를 전달했고, 심지어 심판관들 뒤에 쳐진 휘장 저편에서 재판부에 훈수를 두어 그 소리가 변호인단이 있는 곳까지 들리기도 했다고 이돈명 변호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돈명 변호사는 "아니 재판장은 왜 가만히 있고 보이지 않은 사람이 재판에 관여를 하는 겁니까?" 라며 항의를 하였습니다.

12.12 사태 이후 재판 진행은 더 빨라져 재판 ㅣ작 두주를 조금 넘긴 12월 20일에는 1심 10차 공판에서 김재규 등 6인에게 사형이 언도 되었습니다.

다음날인 12월 21일 최규하가 권한대행 딱지를 떼고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했으니, 신군부는 이 일정을 고려한 것입니다.

현직 대통령 살해라는 전무후무한 국가적 중대 사건의 1심은 일반형사사건에서도 잘해야 한번 공판이 열렸을 기간에 모두 끝났습니다.

단심으로 형이 확정된 박흥주를 제외한 나머지 피고인들은 모두 항소했는데, 신군부는 피고인들과 변호인들이 항소이유서를 제출하기도 전에 항소심 1회 공판기일을 정해 통보할정도로 재판을 서둘렀습니다.

항소심 재판은 항소이유서 제출 시한 다음날인 1980년 1월 22일 부터 3일동안 세차례 열렸고 4일째 되던날에 선고 공판이 열렸습니다.

결과는 모두 사형이었습니다.

다음날 관할관 확인 과정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만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습니다.

1심과 항소심을 모두 군법회의에서 끝낸 10.26 사건은 허술한 절차에 무수한 쟁점을 안고 대법원으로 넘어갔습니다.

사법부의 역사상 최대 수치인 '회한과 오욕'의 절정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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