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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생각난 죽창 3백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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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발주나
추천 : 10
조회수 : 1383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7/03/14 10:35:01

갑자기 생각난 죽창 3백만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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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지마 동남쪽에 위치한 타마나(玉名)산은 이오지마 비행장 인근에 위치하고 스리바치(摺鉢) 산에 이어 이오지마에서 두 번째로 높은 지점이었기에 일찌감치 일본군은 이곳에 수많은 철근 콘크리트 벙커와 연락 터널을 건설, 요새화에 착수한 곳이었다.
암벽에 위치한 각 진지들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은폐되어 있었으며, 기관총 총좌들이 줄 지어 늘어서 있었고, 각 진지들은 서로를 엄호할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또한 타마나 산은 북부로 이동하기 직전까지 쿠리바야시 중장의 사령부가 놓여 있던 장소이기도 하였는데 비행장 공략과 병행하여 벌어진 처절한 전투로 인하여 미군은 이곳을 “고기 분쇄기(미트 그라인더)”라고 불렀다(미군은 382고지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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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곳은 일본 육군의 센다타 다스에(千田貞季) 소장이 이끄는 혼성 제 2 여단과 해군의 이노우에 사마지(井上左馬) 대좌가 지휘하는 이오지마 해군 경비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오지마 상륙 작전이 개시된 지 18일 후인 1945년 3월 7일, 미 제 3 해병 사단은 해안선에 교두보를 마련하는데 성공하였고, 제 5 해병 사단은 북서쪽 해안에 접근하고 있었으며, 타마나(玉名)산 방면을 담당한 제 4 해병 사단도 고기 분쇄기 지역의 일본군 저항을 진압하는데 거의 성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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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타마나 산 지하 깊숙이 짱 박힌 일본군들은 물도 식량도 없이 죽은 자와 부상자로 넘쳐났고, 악취는 상상을 초월하였으며 대량으로 발생하는 벼룩과 이질과의 또 다른 전쟁에 몸부림 쳤는데, 여기에 더해 지상의 미군은 구멍을 찾는 즉시 화염 방사기로 불기둥을 사정없이 퍼붓거나 폭약을 사용하여 입구를 막아버려 숨어있는 일본군 병사들을 생매장시켰다.
그렇다면 일본군 지휘부는 이미 조직적인 저항이 불가능해져버린 이상, 땅굴 안에 가만히 앉아서 무의미하게 부하들의 목숨을 헛되이 낭비하느니 명예로운 항복을 선택했느냐 하면, 지극히 황군스럽게도 이것들은 당연히 엉뚱한 짓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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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마나 산 수비대는 잔존 병력을 결집하여 비행장을 향해 총돌격을 감행한다.”
말이 총공격이지 이들이 말하는 총공격이란 일본군의 유구한 전통인 총검 돌격, 즉, 반자이 어택이었고 혼성 제 2 여단장 센다타 소장은 사령관 쿠리바야시 타다미치(栗林忠道) 중장에게 이의 허가를 요청했다.
하지만 쿠리바야시 중장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은 “총공격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중하라” 즉,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명령이었고 이 회신을 받은 일본 육군(혼성 제 2 여단)은 공격을 중지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골 때리는 건 일본 해군(이오지마 해군 경비대)의 반응이었는데 역시 한 나라 안의 두 군대답게 이들은 지네끼리만 튀어나가기로 결정했고 이노우에 사마지 대좌는 부하들을 모아놓고 “드디어 내일 결행이다. 18시 출발이다. 정식으로 명령이 있었으니까 틀림없다,”라며 야부리를 깠다(죽을 때까지도 사기 치는..생존한 당시 해군 통신병의 증언에 따르면 쿠리바야시의 공격 중지 명령을 분명히 보고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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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간 말 안 듣는다..쿠리바야시 타다미치 중장..(니넨 육군이쟈나!!)


어쨌든 남아있는 병력을 박박 긁어모은 해군의 총 반격은 약 1,000명으로 이루어졌고 이들 대부분이 개인 화기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남방제도(南方諸島) 해군 항공대 소속 정비병들과 제 204 설영대대(공병대..여기엔 한국인들도 많이 있었다..) 소속 인원들이어서 이들이 소지한 무기란 건 대부분이 수류탄뿐이었다.
대검마저 수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결국 대부분이 민가의 울타리를 뽑아온 나무 막대기 한 개씩을 지급받았고 끝을 뾰족하게 깎았는데 이것이 죽창이라고 알려졌다(출처: <열일곱 살의 이오지마(十七歳の硫黄島)> 아키쿠사 츠루지(秋草鶴次) 문예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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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죽창이라 명명한 나무 막대기를 들고 튀어나간 이 전투의 결과는 설명하면 입 아프고 안 봐도 블루레이여서, 미군 측의 기록에 의하면 3월 8일 23시 30분에 시작되어 새벽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미 해병대는 대열을 지어 고함지르며 다가오는 인간의 띠를 향해 수류탄 500발, 60밀리 박격포 200발, 조명탄 200발, 30구경 기관총탄과 소총탄 약 2만발을 아낌없이 퍼 부었고 전투 종료 후 미군이 확인한 일본군 전사자는 784명이었다(약 200명 정도가 살아남아 되돌아갔다고 추측.. 미 제 4 해병사단은 전사 90명, 부상 257명..) 
이 전투만 놓고 보면 대부분이 “황군이 하는 짓이 그렇지. 뭐, 대단한 일도 아니구만..”이라고 하실 지도 모르겠으나 기갑 장비와 항공기가 난무하고 전자 병기와 유도 무기까지 등장한 현대전의 한 복판에서 이런 얼토당토않은 일이 벌어진 것까지도 이해가 안 가지만 여기서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일본군의 열렬한 “죽창 사랑”이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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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 3백만 개만 있으면 열강의 침략 따윈 두려워 할 것이 없다(竹槍 三百万本あれば 列強恐るるに足らず)”


이 말은 마치 막부 말기, 흑선 사건이 벌어진 직후, 유럽 열강의 침략이 목전에 닥친 것처럼 여겨지자 이를 걱정하는 여론에다 대고 어느 앞뒤 꽉 막힌 수구 꼴통 무뇌충 영감이 되도 않는 자만심으로 꽉 차서 나오는 대로 씨부린 말처럼 들리지만, 놀랍게도 저 발언은 1833년이 아니라 1933년 10월, 당시 육군 장관이던 아라키 사다오(荒木貞夫)가 외신 기자들과의 인터뷰 도중에 한 말이다(국내 언론도 아니고 외신에다 대고..-_-;;)
저 소릴 듣고 외국인 기자단이 얼마나 얼척 없었겠냐마는, 이 꼴통은 이미 3개월 전인 1933년 7월에도 지방으로 시찰 가는 열차 안에서 주위에다 대고 “국방에 꼭 필요한 예산도 댈 수 없다면, 육군은 죽창 300만개만 만들어 준다면 그것도 좋은 생각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죽창 300만 개만 있으면 일본의 방위가 가능하다는 이 꼴통적 주장은 소위 “죽창 3백만론”이라 불리며, 당시 일본 육군의 과학을 무시하는 성향과 정신론을 상징하는 발언으로 여겨지고 있고 아라키 사다오는 뻑 하면 죽창이 어쩌고를 나불대 죽창장군(竹槍将軍)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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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창장군 아라키 사다오...


더 확 깨는 것은 이런 아라키의 죽창 발언을 가지고 실제로는 과학을 중시한 발언이라고 쉴드 치는 인간들까지 있다는 것으로 전후 일본의 총리까지 지낸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은 1944년, 어느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아라키의 발언은 육군 참모본부에서 열린 전술 연구의 결과를 인용한 한 것으로,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두둔하고 나섰다(이게 더 웃기지 않냐? 전술 연구의 결과라니..죽창 방어전술이냐?)
환장하는 건 이런 기도 안 차는 쓰레기 잡론(雜論)이 일본 군부 상층부의 지도 이념이 되었고 이후 확대 재생산되며 일본의 전쟁 전략 중 가장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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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전 후에 총리까지 해먹은 작자가 죽창 이론이 과학적이랜다..


대표적으로 태평양 전쟁 개전 직전인 1941년 중순, 육군성 병무(兵務)국장 다나카 류키치(田中隆吉) 소장이 대미 전쟁을 벌이기에는 무기와 장비가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발언하자 당시 육군성 인사국장이자 그 유명한 토미나가 교지(冨永恭次) 중장이 이를 일축하며 내뱉은 말이 걸작이었다.


“그럼 죽창으로 하면 된다!(竹槍でやるの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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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미나가 교지...흑~~ ㅠ.ㅠ


이런 현실을 무시하는 사상은 그대로 아래로 이어져서 전쟁 물자를 담당하는 대본영 14과장 쿠시다 마사오(櫛田正夫) 대좌는 대평양 전쟁 개전 직후, “국력(國力)이 곧 전력(戦力)은 아니다. 미국은 연합군의 종합 물류창이며 대 독일전과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후방 지원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중국도 지원이 필요한데 그들이 대일 전쟁에 얼마나 사용할 남은 전력이 있겠는가? 한계가 있다. 전력은 물질적 전력과 다른 무형의 전력(정신력을 말한다..)이 훨씬 중요하고 중국에서는 우리 군 1개 대대가 중국군 1개 사단을 격파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요점에 적을 능가하는 전력을 집중한다면 전승의 문은 열린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 버마 전선에서 싸우던 일본 육군은 연합군의 전차 전력을 예상도 하지 않았고 대전차 병기도 전혀 준비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갖고 있던 것은 오로지 “필승의 신념” 뿐이었다(정신 승리 포에버~~~!!!)
이러고 앉았으니 도조 히데키(東條英樹)가 마이니치 신문이 “죽창으로 B-29를 떨어트릴 수는 없다”라는 비판 기사를 내자 이에 격분, 해당 기자를 강제로 입영시키고 마이니치 신문사에 탄압을 가한 것은 거의 애교 수준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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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창으로 B-29를 떨어트릴 수는 없다.. 또 모르지..-_-;;;


문제는 누가 들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저런 개 풀 뜯어먹는 헛소리를 내뱉은 자들은 과연 멍청해서 그랬던 것일까? 하는 점이다.
먼저 죽창 이론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아라키 사다오를 보자.
그는 천하의 육군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당시 “은사의 군도(恩賜の軍刀)”를 받은 인물이라 하면 면전에서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존재로 취급받았다.
지금의 도쿄대생 따윈 눈에 차지도 않는 존재였으며 연간 2~3,000명이나 합격하는 그런 허름한 시험(?)과는 차원이 달랐고, 일본 전국에서 최소한 그 해의 수재(秀才) 베스트 텐 안에 들어가는 초 울트라 수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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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군 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는 건 초 울트라 수재를 의미했다...

게다가 계급은 육군 대장에 올랐으며 문부 대신을 2차례 역임했고 남작 작위를 가졌음은 물론, 황도파의 중진이었으며, 당시 일본 육군의 혈기 왕성한 청년 장교들의 멘토이자 카리스마적인 존재였다. 
위에 언급한 나머지 인물들도 대부분이 아라키와 비슷한 배경을 가졌다.


그런데 왜 저런 헛소리나 씨부리고 다녔을까?
해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매한 백성의 개돼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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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일본에서는 고이즈미 신조(小泉信三) 같은 유명 학자들과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 같은 군 장성들을 포함한 “교학 쇄신위원회(教学刷新評議会)”라는 것이 만들어졌는데 이 위원회의 목적은 군과 학계가 공동으로 학계의 사상을 통제하고 군국주의 일본에 봉사하는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훗날 이 위원회에서 일본의 총력전을 강조하는 이론을 만들어내고 과학자의 전시 동원을 진행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이 일본의 내노라 하는 저명 학자들이 골몰한 과제들 중엔 아라키가 주장한 “죽창 300만 개만 있으면 이긴다!”라고 하는 황당한 개소리를 과학적 학문적으로 재정립하여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과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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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이즈미 신조 같은 유명 학자들을 불러모아 한다는 짓이 죽창 이론의 확립이었다..


아라키와 이후 등장하는 일본의 군국주의 지도자들이 저딴 헛소리를 내뱉은 이유는 그들이 멍청하거나 현실과 동떨어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어서가 아니라 치밀한 계산 하에 발언하고 주장한 것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3월, 일본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전 국민을 전시 동원하기 위해 국민의용대라는 조직이 만들어졌고, 그해 6월 22일이 되면, 기존의 방공 및 공습 피해 복구를 위한 조직에서 더욱 확대되어 본격적인 전투 부대, 국민의용 전투부대(国民義勇戦闘隊)라는 것까지 조직된다.
물론 동네 할매, 아지매, 까까머리 중학생 따위로 구성된 이 부대가 무슨 전투를 할 수 있겠냐마는 무기 등의 장비는 더욱 황당한데 기본적으로 무기는 대원 각자가 준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판이니 사냥총 같은 구식 총조차 없어서 낫 등의 농기구와 활, 부엌칼, 훈련용 목총 등등으로 무장하였고 이들이 소지한 대표적인 무기가 바로 일본 육군이 발행한 매뉴얼에 따라 자작한 죽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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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 결전을 목 놓아 외치던 당시 대본영 육군부는 “국민 항전 필휴(国民抗戦必携)”라는 제목의 소책자(휴대용 가이드북 비스무리..)를 발행 “총검은 물론 칼, 창, 죽창에서 낫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가 백병전투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라며 죽창에 의한 항전을 국민들에게 강요했다.
하지만 만약 미군에 의한 본토 상륙 작전이 강행되었다면 이를 강요하던 지휘 계층들도 흔쾌히 죽창을 들고 상륙해오는 미군에게 돌진해 갔을까?
이마에 일장기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짧은 다리를 풀 회전시켜 광란의 상태에서 미군에게 돌진해 갔다가 기관총탄에 온 몸이 벌집이 되어도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국가와 덴노를 지켜냈다며 그렇게 죽어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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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 같은 소리다.


앞서 죽창 운운 하던 저 일본의 지도층 인물들 중 그런 짓을 할 만한 인물은 단 한 놈도 없었고 패전에 이르자 대부분 자결은커녕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며, 단 한 놈, 도조 히데키가 비슷한 짓거리를 하긴 했지만 평생을 군에 있었고 육군 대장의 계급을 가진 자가 자결 한답시고 권총을 갈비뼈에다 대고 쏘았다(마빡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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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거 머하자는 거냐? 아주 지랄도 풍년이다..

그렇다.
그들이 국민들에게 대고 “죽창 들고 항전”을 강요한 이유는 오로지 하나, 이미 전세가 기울어 질대로 기울어졌어도, 국민들이 그렇게 숱하게 혼란 속에서 죽어 나갔어도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만은 절대 손에서 놓을 수 없었기에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부르짖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미 70년 전에 일본 지도층이 저지른 저런 양아치 짓거리가 오늘날 우리에게 다시 발생했고 전에도 한번 죽창을 들지 마시라 얘기했건만 저런 사태는 발생하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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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법치주의를 내세우며 이번 사태의 부당함을 외친 분이 계시던데, 이것이 당신이 말 한 법치주의 인지 되묻고 싶다.
그리고 죽창에 태극기를 매달고 자신의 주장을 부르짖는 분들께 한 말씀드린다.


“승복하라 마라는 말씀은 개인의 자유이기에 드리지 않겠지만, 왠만하면 제가 이런 글 좀 안 쓰게 해 주세요.”

출처 http://blog.daum.net/mybrokenw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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