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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역사(보조자료)
게시물ID : history_277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cvbn
추천 : 2
조회수 : 76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26 22:40:53
이집트 象形文字 / Hieroglyph (문자의 역사, 추가자료)
1. 소개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사용된 문자를 이르며, 상형문자로 분류된다.
왕조 이전시대인 기원전 4000년경부터 이미 문자의 전신이 되는
간단한 기호나 도형들이 발견되며,
기원전 3000년 이후에는 이미 문자로써 완전한 기능을 할 수 있는
구조로 발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자체계가 갖추어진 후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상형문자로 기록된 가장 최근의 비문은 서기 39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거의 4000여년 가까이 쓰여온 문자인 셈이니 가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오랫동안 쓰였던 문자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자는 고대 이집트어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이 고대 이집트어의 후예가 중세까지 쓰이던 콥트어이다.
현재는 아랍어로 대체되어 사어가 되었다.
 
흔히 '히에로글리프'라고도 하며,
이는 그리스어로 '신성한 글귀'라는 뜻의 'τὰ ἱερογλυφικγράμματα'
(타 히에로글리피카 그람마타)에서 비롯된 단어이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자신들의 문자를
md nchr(메두 네체르 = 신성한 글귀)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이 때문에 히에로글리프를 '신성문자'로 번역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2. 변화 과정
사용된 기간이 매우 오래된 탓에 시대에 따른 변화 정도가 큰 편으로,
대체적으로 시대가 갈수록 자형이 점차 단순해지고,
글자 수는 더 많아지는 양상을 띤다.
이 때문에 후기의 히에로글리프는 그림을 그대로 문자로 만든
상형문자보다는 기호화된 표의 문자에 더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표음 문자로서의 기능 또한 가지고 있는 복잡한 체계를 가지게 된다.
 
3. 문자의 변화 과정
3.1. 신관문자와 민중문자
이집트 상형문자는 다른 문자들과 마찬가지로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가령 기원전 24세기경부터 문자를 기록하던 서기들은
공식기록이외에 정부문서나 행정업무를 위한 기록을 위해
기존의 복잡한 도형들을 간소화한 문자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신관문자(Hieratic)라고 부른다.
신관문자는 시대에 따라 점차 더 추상화되는 양상을 띄는데
가령 중 왕국 시대의 신관문자와 신왕국시대의 신관문자만 하더라도
비전문가조차 파악이 가능할 정도로 흘려 쓴 것이 보인다.
이후 식자층이 좀 더 광범위하게 퍼져가면서
극도로 단순화된 글자체가 사용되는데
이것은 '민중문자(Demotic)'라고 부르며
이집트 상형문자의 최종진화형으로 여겨진다.
유명한 로제타 석에 기록된 문자도 그리스 문자와,
오래전부터 내려온 정체, 그리고 민중문자이다.
 
그리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자 이집트인들은
빠르게 그리스 문화에 물들기 시작했다.
고대 이집트의 종교와 풍습은 여전히 지켜졌지만,
당장 파라오부터 이집트어를 구사할 줄 몰랐고,
배울 생각도 없었기 때문에 밑의 토착인 관리들이
알아서 그리스어를 배워 세금을 내는 이집트 서민들과
파라오 사이의 중개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한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치하에서 이집트인이 출세하는 법은
이와 같은 궁정관리나 행정관이 되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리스어는 이집트어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기존의 어렵고 난해한 민중문자는 이윽고 그리스 문자를 개량한
새로운 문자로 대체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콥트문자.
 
콥트문자는 그리스 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인 가운데
그리스 문자로는 표기할 수 없는 소리들과 인두음을 표기하기 위해
기존의 민중문자 기호 7개를 추가로 받아들였다.
오메가(ω) 뒤로 자리잡은 문자들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훗날 샹폴리옹이 로제타석을 통해
이집트 상형문자가 표음문자의 기능도 하고 있었음을 밝혀낸 힌트가 되기도 했다.
 
4. 문자의 종말
한편 이집트가 그리스의 문화권에 들고,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면서
상형문자를 아는 이들의 수는 점차 줄게 되었다.
애초부터 정통 글씨체를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은
신관들 밖에 없었던 상황이었고,
민중 문자는 로마 제국 통치기에는 콥트 문자에 밀려 거의 사라진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이교도 사원들의 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상형문자를 아는 이집트인은 더더욱 줄게 되었다.
결국 서기 540년에 아스완의 필레 섬에 있던
마지막 사원인 이시스 신전이 폐쇄되면서
상형문자를 전수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후 불과 100년 후인데도 이슬람 제국이 이 땅을 정복했을 때에
이미 이집트 상형문자는 깡그리 잊혀진 문자가 되어버렸으며,
당대에 이미 상형문자는 악마의 주문이 새겨진
비밀의 문자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상 위키백과)
 
(이하 나무위키)
신성 문자(神聖文字, Hieroglyph)는 고대 이집트의 돌이나 나무에 새긴 (상형) 문자를 지칭하는 낱말로서, 고대 그리스어 "히에로글리피카 그람마타"(Hieroglyphica grammata: "신성하게 새긴 말")의 줄인 말이다. "능력의 말"이라는 뜻의 이집트어 "메두 네테르"(Medu Neter)를 번역한 데서 온 이 용어는 기원전 약 4세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기까지 두루 사용되었다. 이집트 신화에 의하면 신성 문자는 서기의 신인 토트가 발명하여 인류에게 준 선물이라 전해진다. 더러는 마야 문명·아스테카 문명의 문자 등 기타 상형문자를 지칭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히에로글리프 이외에 두가지 다른 문자들(신관 문자, 민중 문자)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는 로제타석의 발견과 더불어 19세기 초엽에 프랑스의 이집트학 학자 장프랑수아 샹폴리옹에 의해 해독되었다.
 
 
 
문자의 구성
 
각 글자들은 각종 동물이나 사물, 신체의 모습을 본뜬 모습을 하고 있다. 글자들은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소리 글자로, 그 모습과 상관없이 단어의 소리를 나타내는 데 쓰인다. 두 번째는 의미 글자(Determinatives), 소리 글자로 이루어진 단어의 맨 뒤에 붙어 그 단어의 뜻을 결정한다. 세 번째는 소리-의미 글자(Ideograms)인데, 그 자체로 소리와 의미를 모두 가진다.
 
문자의 해독
 
신성문자는 왼쪽에서 오른쪽, 오른쪽에서 왼쪽, 위에서 아래의 세 가지 방법으로 기록된다. 문자에 등장하는 사람, 동물, 새의 머리는 언제나 글이 시작되는 방향을 향하고 있으므로 문자 속의 인물이나 동물들이 바라보는 방향에서 시작하면 된다. 아래에서 위쪽으로 읽는 법은 없다. 모아쓰기가 이루어지는데 한글처럼 규칙이 있는 것은 아니며, 모아쓰기된 글자들은 원래 읽는 방향대로 차례로 읽어가면 된다.
 
왕의 이름은 선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를 카르투슈(Cartouche)라고 한다. 이것이 로제타 돌을 해석하는 결정적인 실마리가 된다. (이상 위키 백과)
 
(이하 사이언스타임스)
상형문자 비밀 밝혀낸 역발상의 비결
 
로제타스톤과 샹폴리옹의 창의성
 
1798년 나폴레옹은 38천명의 군사와 학자 175명을 데리고 이집트로 원정을 떠났다. 유럽의 역사와 그보다 조금 앞선 로마 역사밖에 모르던 유럽 사람들에게 로마를 수천 년이나 앞섰던 이집트 문명은 충격적이었다. 유럽인이 원시적인 수렵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통일 왕국을 이루고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 문명이 알려지면서부터, 유럽 사람들은 이집트의 유물과 유적에 새겨진 부호에 담긴 속뜻을 풀기 위해 노력했다. 글자로 보이는 이상한 부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무덤 안의 벽화나 탑에는 상형문자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으나 한 글자도 읽을 수가 없었다.
 
로제타스톤은 1799년 나폴레옹 원정군이 알렉산드리아 동쪽으로 60킬로미터 떨어진 로제타(현 지명 라시드;Rashid) 마을에서 요새를 쌓다가 발견했다. 길이 1.25미터, 너비 0.7미터인 단단하고 결이 고운 현무암에 여러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폴레옹군은 영국군과 벌인 전투에서 패해 로제타스톤을 포함한 노획물을 영국군에 빼앗겼고, 로제타스톤은 그 후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나폴레옹군은 로제타스톤을 석고로 뜬 사본을 프랑스로 가져갔고, 이를 연구한 학자들은 로제타스톤이 같은 내용을 세 가지 종류의 언어로 써놓은 것임을 밝혀냈다. 이집트 문명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언어, 역사, 고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리스어 외의 두 문자 해독에 매달렸다. 그러나 천재 언어학자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Jean-François Champollion, 1790~1832)이 나타나기까지 아무도 이것을 완전히 풀지 못했다.
 
로제타스톤을 해석하기 위한 천재들의 노력
 
샹폴리옹에 앞서 로제타스톤의 해독에 기여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먼저 독일의 예수회 성직자인 아타나시우스 키르셔(Athanasius Kircher, 1601~1680)는 동양학, 지질학, 의학에 뛰어난 학자였다. 키르셔의 탁월한 발명 및 지식의 깊이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비교될 정도로 뛰어났다. 키르셔는 상형문자 연구의 선구자로서 후에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을 푸는데 키르셔의 연구 자료를 참고했다.
 
동양학자 실베스터 드 사시(Silvestre de Sacy, 1758~1838)남작은 로제타스톤에 새겨진 민용 문자(demotic inscription)의 이름을 규명하는데 기여했다. 이어 드 사시의 제자인 스웨덴의 외교관이자 동양학자인 요한 오께블라드(Johan Akerblad, 1763~1819)는 드 사시 남작의 연구를 1802년에 이어받아 두 달 만에 민용 문자의 모든 이름을 밝혀냈다.
 
광학, , 에너지, 심리학, 음악, 언어, 이집트학 등에 능통한 영국의 토마스 영 (Thomas Young, 1773~1829)14세의 나이에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 그는 모국어인 영어 이외에 불어, 이탈리아어, 히브리어, 독일어, 칼데아어, 고대 시리아어, 사마리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암하라어(에티오피아어) 14개 언어를 구사하는 천재였다. 영은 오께블라드가 1802년 풀어 놓은 민용 문자 29개 알파벳을 토대로 로제타스톤의 상형문자를 풀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오께블라드처럼 영도 상형 문자가 전적으로 표음문자(음절문자)라고 믿었던 것이었다. 1814년까지 영은 로제타스톤의 민용 문자를 모두 번역한 후, 상형문자를 푸는데 착수했다. 이어 1815년 영은 타원형의 테두리 속 상형문자가 파라오의 이름임을 알아내었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은 유년 시절부터 언어에 대단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6세에 대학에 들어가기 전 이미 콥트어(고대 이집트 어의 일종)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180717세의 샹폴리옹은 파리 국립고등학교에서 파라오가 다스리던 때의 이집트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교수들은 소년의 통찰력과 확고한 논리에 압도당해 발표가 끝나자 그를 교수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20세 되던 해에 샹폴리옹은 모국어인 불어를 포함하여 콥트어,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암하라어, 산스크리트어, 아베스타어, 아랍어, 영어, 페르시아어, 중국어 등 12개 언어를 구사했다.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글자를 해독하려면 왕의 이름부터 풀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독에 몰두했다. 그는 그리스어로 쓰여진 내용은 성직자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칭송한다는 것이므로, 이집트 부호들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어떤 부호가 프톨레마를 나타내는지 알면 적어도 몇 개의 발음기호는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샹폴리옹은 부호 가운데 유독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부호에 주목했다. 특별히 강조된 것이라면 왕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것인데,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옳았다.
 
샹폴리옹은 1821년에 고고학자 뱅크스가 영국으로 가져간 필레섬의 오벨리스크에 적힌 부호들과 견주어 보았다. 이 오벨리스크는 상형문자와 그리스 문자가 함께 씌어져 있어 2의 로제타스톤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오벨리스크의 그리스어에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이름이 나왔는데, 상형문자에도 로제타스톤의 것과 똑같이 타원에 둘러싸인 부호가 있었다. 그 부호는 의심할 여지없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나타내는 부호였다. 이 발견은 상형문자 해독을 위한 첫 성공이었다.
 
펠레섬의 오벨리스크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 말고도 타원으로 둘러싸인 부호가 또 있었다. 그리스어에는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타원 부호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틀림없다고 믿은 샹폴레옹은 프톨레마이오스를 나타내는 부호를 나란히 놓고 비교했다. 그는 두 부호에 다 나오는 기호들을 찾았다. 그것들은 프톨레마이오스와 클레오파트라 두 군데 다 있는 발음기호이니, P, O, L 이고, 그 기호들이야 말로 P.O.L의 발음 기호임에 틀림없었다. 두 번째 성공이었다.
 
1822914일 결국 샹폴리옹은 27개나 되는 파라오 이름을 해독함으로써 이집트 상형문자의 음가를 다 밝혀냈다. Sm까지 부호가 나타내는 음가를 푼 그는 문득 곱트어에서 태양신을 Ra 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 냈다. 거기다가 이집트 말에서 가끔 생략되는 모음 e를 집어넣자 람세스(Ramses)가 되었다. 곧이어 토트메스 왕의 이름도 풀렸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상형문자를 푸는 기본 원리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때 샹폴리옹의 나이는 31살이었다. 샹폴리옹이 상형문자가 소리글자와 비슷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발표하자 학자들은 모두 놀랐다. 그때까지 모든 학자들은 이집트의 기호들을 그림문자로 보아 뜻글자로 해독하려 했다.
 
이 잘못은 기원 후 5세기 호라플론에서부터 시작되어 1300년간 그대로 되풀이되어 왔다. 학자들은 상형문자가 마지막으로 쓰여진 시대에 자기들 보다 더 가까이 살았던 호라플론의 풀이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 그림과 다름없는 부호들, 그것을 그림 문자로 보아, ‘굽이치는 선세 개가 을 나타내고 깃발을 나타낸다는 풀이를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존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역발상적 상상력을 발휘한 샹폴리옹으로 인해 1799년에 발견된 로제타스톤은 23년만에 그 베일을 벗은 것이다.
 
진정한 비결은 소통과 교류
 
그 후 샹폴리옹은 이탈리아 토리노 박물관에서 옛 이집트의 파라오 이름과 통치 기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적혀 있는 파피루스를 찾아냈다. 다른 사람이 무심코 지나치던 것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이것을 자료 삼아 이집트에 통일 왕조가 세워진 때를 기원전 5867년이라고 계산했다. 샹폴리옹은 18287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이집트를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확인했다. 모든 신전, 왕궁, 무덤의 비문이 그의 풀이와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풍부한 언어적 지식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발휘해 로제타스톤에 쓰인 고대 이집트 어를 풀었다. 샹폴리옹의 상상력은 언어라는 지식이 토대가 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샹폴리옹은 여러 언어, 고고학자들과 함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면서 해결의 실마리에 접근할 수 있었다. 기존의 패러다임을 넘어선 상상력으로 오래된 난제를 풀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키르셔 같은 상형문자 연구의 선구자를 비롯해, 스승 드 사시와 그의 제자인 오케만과의 만남, 토마스 영과 같은 선의의 경쟁자가 있었기에 샹폴리옹은 로제타스톤의 수수께끼를 푸는 마지막 문을 열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로제타스톤을 푼 것은 샹폴리옹에 앞서 연구한 사람들의 공로가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한 혼자서 많은 시간을 들여 연구를 했을 뿐 아니라 그 결과를 서로 나누고 의견을 교환함으로써 지식의 폭과 깊이가 더해졌다. 인류의 발전에 공헌한 천재라 할지라도 주위의 도움 없이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조명진 유럽연합 집행이사회 안보전문역
저작권자 2011.03.11 ScienceTimes
 
 
이집트인들은 태양신 대신 알라(하나님)께 경배를 드린다. 미처 사원에 자리잡지 못한 은 수공예품 가게 주인은 자신의 가게 모퉁이에 예배용 깔개를 깔았다. ”
 
“‘를 형상화하여 자신이 정성 들여 만든 은제 원반 앞에서 두 손을 하늘로 항하며 알라를 염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건한 기도 속엔 이미 초월자요 절대자인 알라와 라가 하나되고 있었다. 이처럼 카이로는 이집트 문명의 요람이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역사의 다리다. “
([이희수교수의 세계문화기행] 이집트 작성자 여행신문 작성일2000-07-31 )
출처 나무위키, 위키백과, 사이언스타임스, 여행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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