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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간략사 4, 전간기 하나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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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역둔토
추천 : 2
조회수 : 58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4/02 17:09:18







1929년 이전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으로

지칭하여야하나 너무 길고 번잡하니 그냥 유고슬라비아로 칭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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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왕, 하나의 국가>- 유고슬라비아의 국가표어 



 


세르비아는 니쉬선언, 케르키라 선언을 통해 유고슬라비아 건국을 미리 선언하였고

우드로 윌슨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이탈리아를 발칸에서 대부분 몰아내고 유고슬라비아가 탄생시켰다.

그러나 '남 슬라브인의 통일국가'는 탄생할 때부터 분열될 조짐을 보였다.


Litorale_1.png
800px-Zara-Zadar-1920-1947.png
 

(이탈리아는 약속받은 영토를 모두 받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이스트리아 반도, 슬로베니아의 일부, 크로아티아의 중요한 항구인 자라를 획득했다.)



남 슬라브인의 땅을 향한 이탈리아의 야욕을 완전히 저지하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유고슬라비아의 건국으로 유고슬라비아의 구성민족들은이탈리아를 어느정도 억제하는 것에는 성공했다.

외부의 위협이 어느정도 정리되자, 이제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선 세르비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를 새롭게 태어난 국가라고 보기 보다는

세르비아왕국의 연장선으로 간주하였다. 세르비아인들은 다른 남슬라브 동포들이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해준다면 통합의 주인공격인자신들이 형제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러한 태도는 다른 형제 민족들에게

상당한 불쾌감을 가지게 하였고 세르비아에 대한 경계심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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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라디치.jpg 스테판 라디치


세르비아인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2번째로 많은 민족이며 언어는 같지만 종교도 다르고

문화적으로도 서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크로아티아인들은 스테판 라디치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을 중심으로 크로아티아 농민당, 크로아티아 민족 위원회,

크로아티아 입헌당 등 군소 정당, 민족주의 단체들이 결집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크로아티아 독립국건설을 목표로 했으나, 이탈리아의 위협, 협상국의 결정 등으로 독립국

건설이 좌절되자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에 기반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에서 분권주의, 연방화 등을 요구하였다.


3번 째로 많은 민족인 슬로베니아인들은 세르비아인과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종교는 물론이거니와

슬로베니아어는 세르보-크로아티아어와 비슷한 계통이었지만 서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문화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슬로베니아인들은 슬로베니아 민족당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베오그라드(세르비아)와 자그레브(크로아티아)사이에서 그들의 이익을 추고하고

분권형 연방제 왕국안을 지지하였다.


보스니아에 사는 남슬라브인 무슬림들은 복잡한 입장이었다. 유고슬라비아 무슬림 위원회를 구성하여

보스니아 무슬림을 단결시키고자 했던 무슬림 상류층은 그들의 사회, 경제적 특권의 핵심인

토지 소유를 온건한 농지개혁으로, 지지해준 세르비아와 연대했다.

그들이 오스만 투르크,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하던 것처럼 자신들의 특권을 지지해주는 세력과

손을 잡은 것과는 별개로 다수의 보스니아 무슬림 하층민은 크로아티아인들과 손을 잡거나

보스니아 급진당을 결성하여 적극적인 토지개혁,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 개혁, 연방제등을 주장하였다.


마케도니아인, 혹은 서 불가리아인들도 복잡한 입장이었다. 유고슬라비아안을 지지하며

남 슬라브인의 통일국가를 지지하는 세력도 있었지만 마케도니아-불가리아간 연대를 주장하는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은 1차세계대전 이후에도 여전히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의 주류를 이루었고

이들은 최소한 연방제, 분권국가 궁극적으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탈출해

불가리아-마케도니아 연합을 목표로했다.


세르비아인들과 가장 유사한, 사실 그렇게 큰 차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몬테네그로인들도

마냥 통합에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몬테네그로에서는 옛 왕가를 지지하는 반란이 이탈리아의 후원

아래 일어났고 몬테네그로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안 지지자들은 세르비아에 지나치게

종속된 몬테네그로를 하나의 독립된 지위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몬테네그로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내거나 크로아티아의  연방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대(大)세르비아주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를 구성하는 민족 중, 가장 불만이 많은 코소보의 알바니아인과 터키인들은

그들의 전통적인 상류층이 만든 제미에트 당을 지지했다. 이들은 보스니아 무슬림 위원회처럼

온건한 토지개혁을 요구하며 그들의 사회, 경제적 특권을 지키려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불만을 가진 알바니아, 터키 하층민들은 알바니아에 수립된 '코소보 위원회'의

코소보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이들은 궁극적인 목표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벗어나 국경 밖 동포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세르비아인을 제외한 민족들은 대개, 연방제안을 지지하거나 최소한 분권형 국가를 원했다.

세르비아인 내부에서도 이러한 움직임에 호응하는 세력이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공화당은,

공화주의자들의 모임으로 세르비아 왕실을 깊이 존경하는 세르비아인들에게 인기가 매우 없었지만

이들은 세르비아에서 거의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의 연방화, 민족별 자치권 등을 주장하였다.


유고슬라비아 건국은 앞에서 언급한 다양한 민족들의 요구에 직면하였다.

유고슬라비아 건국의 정당성을 밀어 붙이기 위해 세르비아에서는 유고슬라비아주의를 창안하고

보급하고자 노력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숫적으로 우세한 세르비아-크로아티아와 여기에

곁다리로 슬로베니아를 하나로 뭍어 유고슬라비아인이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극소수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정체성 창조 운동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절대 다수의 남 슬라브인들은 따로 살아 온 기간이 너무 길어 서로에 대해 너무 이질적이라고

생각했다.(특히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세르비아인 사이에서)


유고슬라비아주의의 처참한 실패는, 유고슬라비아가 앞으로 직면할 운명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국가는 지식인들이 순진하게 가졌던 이상, 통일된 남슬라브인의 국가가 아니었고

앞으로 통합되지도 단결하지도 않을 것이며 민족적 이해에 따라 갈등하고 폭발할 시한폭탄일 뿐이었다.


이 시한폭탄 국가는 어쨋든 전쟁에서 이긴 세르비아의 요구대로 구성되었다.

세르비아는 1918~1920년 12월까지 합병한 각 지역에 수립한 임시위원회를 기반으로 하여 통치하였고

1920년 12월 12일 유고슬라비아의 첫,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제헌의회는 그 시대 사람들도

알고 있었지만 유고슬라비아가 어떤 국가가 될 것이며,  진정한 남 슬라브인의 통일국가가 될 것인지

시한폭탄이 될 것인지 결정하는 자리였다.


이 제헌의회에서 유고슬라비아주의를 지지하고 지식인층의 지지를 받은

유고슬라비아 민주당(세르비아계) 92석을 얻었고 세르비아 민족주의 적 성향이 강하며

세르비아 이외지역의 세르비아인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던 세르비아 급진당이 91석,

세르비아 농민들의 지지를 받은 세르비아 농민연합이 39석을 차지했다. 세르비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의제 1의 민족답게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였고 이를 이어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이 50석,

슬로베니아 민족당이 27석, 무슬림 연합이 24석, 제미에트당이 12석을 차지했다. 이 국가가 어떤

국가가 될지, 제헌의회는 이미 보여주고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대(大)세르비아일 뿐이라는 것을.


이 제헌의회 선거는 게리멘더링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세르비아인 의원들이 3100~3400 표당 1명이 당성된 꼴인데 반해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 무슬림

등 비 세르비아인 의원들은  4600~4700표당 1명 꼴이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를 제외한 소수 민족들은

제헌의회 구성에 상당한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구성된 제헌의회는 당연히 비(非)세르비아인들의 열망과는 다른 중앙집권적인

헌법을 통과시켰다. 1920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성인 비도브단 축일에 통과되어

비도브단 헌법이라고 불릴 유고슬라비아의 첫 헌법은 입헌주의, 의회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지만 유고슬라비아 어디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유고슬라비아주의와

세르비아인들만이 선호하는 중앙집권을 기조로  삼았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불러왔다.

세르비아인을 제외한 민족들이 주장하는 연방안, 자치권 등은 모두 거부되었다.


새로운 헌법에 가장 좌절하고 적극적으로 저항한 것은 크로아티아인들이었다.

이들이 가장 좌절한 것은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들은 중세 크로아티아왕국 이래

크로아티아 왕계가 끊어진 이후에도 크로아티아 왕을 겸한 헝가리왕 밑에서 전통적인 자치권을

보유해왔기 때문이다. 이들은 헝가리 왕, 나아가 오스트리아 황제 밑에서

명목상의 크로아티아 왕국을 유지했던 기억은 세르비아 중심의 중앙집권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게했다.


크로아티아인들은 헌법 제정 직후부터 크로아티아의 모든 정당들을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을

중심으로하는 크로아티아 연맹을 구성하였고 역사적으로 계속 존속해온 크로아티아 국가 설립을

목표로 삼았다.


800px-Yugoslavia_ethnic_map.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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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인구조사 자료라 1920년대와는 다른 부분이 있으나, 유고슬라비아일대의 민족구성은

시쳇말로 개판오분전이었다. 20년대와 81년의 가장 큰 차이는 보스니아 일대에서 2차대전기

크로아티아인들이 자행한 학살로 세르비아인의 비율이 감소한 것, 북 세르비아에(바냐트)에서 헝

가리인의 비율이 감소한 것, 독일인이 2차대전 이후 추방당한 것, 크로아티아 해안가에서

이탈리아인이 추방당한 것 정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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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인들은 독립국 건설, 그것의 달성이 요원하다면 연방제하에서 상당한 자치권을 가진

크로아티아 국가를 원했다. 그것을 위해 크로아티아인들은 슬로베니아인, 알바니아인, 터키인,

헝가리인, 독일인 등과 연대하여 자치권 부여, 연방화를 요구하였다.


크로아티아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부에서 협력자를 구하고자 하였으나,

세르비아가 1차 대전 승전국이었던 점, 크로아티아와 역사적으로 연관성이 깊었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전후 완전히 이등국가로 전락한 점 때문에 외부의 협력자를 구하는데 실패했다.


외부의 조력자를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자 크로아티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슬로베니아인, 무슬림,

알바니아인을 위시한 소수민족 그룹은 상호간의 연대를 강화하여 세르비아를 압박하는 방법을 택했다.


이는 제헌의회가 해산하고 1923년 총선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정당을 중심으로 소수민족 정당들이

연대하여 유고슬라비아 중앙정부에 중앙집권 대신 연방제를 주장하며 협상을 요구했다.

1923년 4월, 자그레브에서 개최된 협상에서 세르비아 중앙정부는 중앙집권을 포기하지 않을 것을

천명했고, 크로아티아의 가장 중요한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은 이에 항의하고자

소속 의원들이 의회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응수했다.


지금까지 세르비아인들은 종종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일방적으로 비난의 화살을 돌리며

이시기 세르비아인들이 헌법에 기초하여 협상하고자 했으나 크로아티아인들이 헌법을 완

전히 거부함으로 협상이 실패하였다고 주장한다. 크로아티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이 원하지 않은

헌법을 세르비아인들이 강요했고, 제헌의회 선거도 부당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패권 수립 야욕이

파국을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1924년, 협상이 실패하고 크로아티아인들이 소수민족들과 연대하여 세르비아를 압박하자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국왕은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을 반공법을 이유로 해산하였다.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이 국제 공산주의 그룹, 소련과 연관되어 있다는 죄목과 불가리아에 있는

마케도니아 민족혁명기구와 연대하여 반(反)유고슬라비아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의 정당등록을 1925년 1월 1일 취소하였고

스테판 라디치를 비롯한 당 지도부 일시에 체포하여 연방제 안에 대한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입장을 확실히 함과 동시에 제정한 헌법에 도전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을 해산시킨 후, 1923년 총선으로 성립한 국회를 해산하고

1925년 다시 총선을 실시했다. 지도부를 잃은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은 다른 크로아티아 민족 정당들과

연대하여 총선에 나섰지만, 유고슬라비아 중앙정부의 게리멘더링으로 말미암아

인구 비율로는 40% 정도에 불과한 세르비아계가 의회에서 162석을 차지하여 압도적인 다수를 점했다.

다른 민족들은 모두 합해도 138석에 불과했다.


1925년 총선은 크로아티아인들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겼다.

유고슬라비아의 헌법이 존재하는 한, 세르비아 주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세르비아인을 제외한 유고슬라비아인들에게 무력함을 안겨주었다.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을 이끌며 연방안을 주장했고, 그러한 이유로 수감된 크로아티아의 대 정치가

스테판 라디치도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태도에 변화가 없고 지지자들의 좌절이 심해지자 수감되었던

스테판 라디치는 1925년, 5월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타협했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 헌법을 준수하며 연방제를 주장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비 세르비아계,

특히 크로아티아인에게 새로 구성되는 내각에 비교적 공평하게 장관직을 양보해주는 조건으로

유고슬라비아 정부와 스테판 라디치의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간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 타협에 성실히 참여한다는 표시로 크로아티아 민주농민당은 당명에서

유고슬라비아 국왕의 심기를 매우 거스르는 '민주'를 삭제하고 크로아티아 농민당으로

당명을 변경하였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1925년, 7월 새로운 내각이 구성되었다. 내각에서 스테판 라디치가

교육부 장관을 맡았으나 세르비아계가 내각의 중요한 자리(국방, 재정, 외무, 내무, 경찰 등)을

차지하고 비 세르비아계는 비교적 덜 중요하거나 실권이 크지 않은 교육, 체신, 운송 등을 배정받았다. 세르비아인이 약속한 '비교적 균등한 장관직 배분'은 허구에 불과했고 비 세르비아인들,

특히 크로아티아인들은 매우 깊은 분노와 좌절감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크로아티아인들을 위시한 소수민족들은 1925년 내각 이후에도 1926년 4월 내각, 1926년 11월 내각 등

세르비아인의추가적인 양보를 기대하며 유고슬라비아 중앙정부에 협조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은

대(大)세르비아를 포기할 마음이 없었고 1927년 초, 1925년 합의는 파국에 이르렀다.

크로아티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민족 그룹은 세르비아인들의 기만적 행동을 비난하고

다시 연방제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1927년, 소수민족 그룹이 내각에서 나가고 다시 총선이 열렸다. 1927년 9월,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자유선거에서도 여전히 선거구가 개편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인구의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세르비아인이 의회의 과반을 훨씬 뛰어넘는 결과가 재현되었다.


선거 후, 크로아티아인을 위시한 소수민족들과 연방제를 지지하는 세르비아인 의원

(왕실에 반대하는 공화주의자들)은 1927년 의회에서 연방제를 밀어붙이기 위해 연대했다.

소수민족들은 자치권 획득과 연방제를 위해 세르비아 공화주의자들은 연방제를 통한 왕권의 약화를

위해 서로 협력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연대한 이 조직은 유고슬라비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조직이었다. 이들은 유고슬라비아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로 구성되는 연방왕국으로 만들자는 주장을 하였다.

이 주장은 후에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실현된다.


이 연방구성안은 의회에서 매우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격렬한 논쟁이 해를 넘기며 격화되던

와중, 1928년 6월 20일, 세르비아인 의원이 연방제의 강력한 지지자인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당수 스테판 라디치와 그 측근들에게 총격을 가했다. 이 테러로 스테판 라디치와 크로아티아 농민당의

주요인물들이 죽었다. 이 테러는 소수민족들이 세르비아인들의 불관용성을 확실하게 체험하게 한 것과

동시에 1920년 부터 기껏해야 10년도 채 안지난 유고슬라비아 의회제도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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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마케도니아 통합운동


크로아티아인을 위시한 여타의 소수민족들이 의회에서 혹은 정치지도자들과 정당을 통해 연방제 안을

밀어 붙였던 것에 반해 유고슬라비아 남쪽의 마케도니아인들은 전혀 다른 방법으로 투쟁하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자신들과 가장 유사한 언어, 문화를 가진 불가리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마케도니아

일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무장투쟁을 통해 마케도니아를 유고슬라비아에서 떼어내

불가리아와 통합하는 것을 원했다. 그러나 1925년 유고슬라비아군의 대대적인 토벌 이후,

마케도니아 게릴라 조직은 유명무실화하였고 낙담한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마케도니아 지역에

설치된 정부기관, 공무원, 군인, 세르비아인 교사 등을 공격하거나 암살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이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의 후원 아래 지속적으로 저항하였는데, 이는 세르비아인들이 마케도니아에서

세르비아 우월주의에 입각한 행정을 펼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Kralj_aleksandar1.jpg 유고슬라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


스테판 라디치와 크로아티아인 정치가들이 의회 한복판에서 암살된 후 크로아티아 정치가들은

국왕의 개입만이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국왕이 연방제를 지지해 준다면,

의회에서 난리치며 기세등등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을 누르고 자치권, 연방제 국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크로아티아 정치가들은 1929년 1월 4일 유고슬라비아의 국왕 알렉산다르 1세를 알현하고

연방제안을 수락해줄 것을 간청했다.


알렉산다르 1세는 연방제안, 특히 의회에 의해 통치되는 연방국가를 절대 수용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알렉산다르 1세는 알현 직후인 1월 6일, 국가의 혼란을 끝내고 연방제 안으로 나아가기 위해

헌법을 정지하고 의회를 해산하고 전근대적인 전제왕권을 수립하였다. 그는 의회 정치를 중단하고

입법권을 국왕에게 속하게 하여 모든 정당의 활동을 금지하였다. 알렉산다르는 이 구시대적인 정권을

수립하며 국왕 전제권을 확립함과 동시에 모든 민주적 기구, 제도를 폐지하였다.


동시에 소수민족들의 요구를 들어준다는 구실을 내세워, 모든 민족 구별을 페지한다고 선포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에 유고슬라비아인만이 존재하며 그들은 모두 국왕의 영도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방제 분권 대신, 민족별 행정구역 분리를 통해 연방제를 실시했다고 주장했다.

물론 실제로는 전근대적인 전제왕국으로 돌아갔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알렉산다르 1세는 1931년 9월, 국가의 혼란을 끝내고 안정과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워

새 헌법을 제정했다. 새 헌법은 국왕에게 입법, 사법, 행정에서 막강한 권리를 부여했고 왕이

상원의원의 절반을 지명하고 총리와 장관까지 지명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 구시대적인 헌법에 대해 알렉산다르 1세는  "모든 국가기관들과 그것들의 기능을 규정하고 정비한

최고의 헌법이었다" 자평했다.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자평에 불과했다.


1931년 헌법과 강력한 국왕권은 유고슬라비아 전역에서 가혹한 탄압의주체가 되었다.

민족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여기에 국왕의 측근들이

매우 부패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비교적 유능하지만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기구이자 내부에 수많은 적들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은 국왕의 행동을 국가를 지키기 위한 결단으로 보았으나 소수민족들은

국왕의 행동을 폭거로 인식했다. 알렉산다르 1세가 연방제를 추진해 줄 것이라는 믿음은

완전히 빗나갔고 이제 그들은 소수민족 민족주의자들의 제 1 목표가 되었다.

소수민족들은 알렉산다르 1세가 대(大)세르비아의 추종자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다고 믿고 있었다.


알렉산다르 1세 암살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투쟁적인 마케도니아인들에 의해

벌어졌다. 마케도니아 혁명기구 소속의 마케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유고슬라비아를 혼란에 빠트리려는

무솔리의 지원을 받아 1934년 10월 9일 프랑스를 방문한 알렉산다르 1세를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살했다.


Peter-RFoS.jpg 페타르 2세


알렉산다르 1세가 암살된 후, 12세의 나이로 페타르 2세가 즉위했다. 혼란한 정국과 어린 왕의 즉위로

알렉산다르 1세가 찍어누르던 유고슬라비아는 다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페타르 2세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국정을 보조할 섭정들이 지명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섭정은 알렉산다르 1세의 사촌이자 페타르 2세의 5촌 당숙인 파블레 공(公)이었다.


섭정, 파블레 공


파블레 공은 섭정으로 적합한 인물이었다. 부유한 왕가의 일원으로 태어나 사욕을 채울 염려도

적었고 온화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정계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유고슬라비아의 갈등을 줄여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개인적으로 어릴때부터

사망할때까지 영국을 아주 선망하는 인물이었고 영국 왕족, 귀족들과의 개인적인 친분 때문인데,

그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그는 영국식 입헌민주주의와 분권형 연방제 등에 아주 호의적이었다.

더욱이 그는 국왕 전제권으로는 현대국가를 제대로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도 인식하고 있었다.

다만, 유고슬라비아와 카라조르제비치 왕가에게 비극인 점은 그가 정계에 너무 늦게 나왔다는 것과

섭정임에도 정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었다.


정국이 요동치기 시작하자, 유고슬라비아 야당들은 크게 두 가지 목표를달성하고자 하는 것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크로아티아 농민당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민족들의 연방제 요구, 다른 하나는 세르비아계 정당 중, 입헌주의를 지지하는 정당들이

국왕 독재를 철폐하고 이전의 의회에 입각한 입헌군주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다.

어쨋든 두 집단 모두 알렉산다르 1세가 강요한 1931년 헌법의 폐지를 원하고 있었다.


1935년 5월, 1938년 12월 잇달아 총선이 실시되었으나, 소수민족 정당과 입헌주의자들은 과반 의석을

넘는 것에 실패했다. 이는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게리멘더링의 영향도 있었지만,

유고슬라비아주의, 중앙집권, 대 세르비아주의, 왕가에 대한 존경심등으로 똘똘 뭉친

유고슬라비아 왕국 정부의 조직적인 선거방해, 유권자 협박, 매수 등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섭정, 파블레 공은 이런 것을 막으려 노력했으나, 정부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세르비아인 장관,

공무원들이 파블레 공과 협력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서 실패했다.


1935년, 1938년 패배는 긴밀히 협력하던 소수민족 정당들과  세르비아계 입헌주의 정당들 간의

연합을 파괴했다. 크로아티아 농민당은 정부가 완강하게 거부하고 선거를 조작하는 한,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깨닳았다. 그들은 경제적으로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한 크로아티아의 경제상황으로 말마암아

가장 넉넉한 재정 분야부터 분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35년과 1938년 사이, 파블레 공은 크로아티아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톨릭 교회를

세르비아 정교회와 마찬가지로 국교 지위를 부여하고자 하였다. 가톨릭을 믿는 유고슬라비아의

부유한 민족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인들을 유고슬라비아 협조하도록 만드려는

이 조치는 교황청과의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현실화 될 뻔했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가톨릭 교회의

특수성과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서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대신 가톨릭 교회의 지지를 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고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 매우 비타협적이며 대 세르비아주의를 주장하는 때문에

협정은 체결되지 못했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아래 세르비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 곳곳에서

가톨릭교회의 지위 상승 반대, 바티칸과의 협정 반대를 외쳤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파블로 공이

개인적으로 밀어붙이던 이 계획을 못 이기는 척하며 취소했다.

그리고 반대 시위때 체포된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사면하는 등 그들이 어떤 입장인지 명확히했다.

파블레 공의 바티칸과의 협정이 실패하면서, 크로아티아인들은 완전히 반 유고슬라비아로 돌아섰고

그나마 협조적이던 슬로베니아인들도 유고슬라비아 정부에 의구심을 품었다.


이제 유고슬라비아 민족 간 화해는 저 멀리, 사라졌다.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강고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국외상황은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발칸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유고슬라비아를

약화시키기를 원했다. 그것의 첫번째 단추로서 유고슬라비아로부터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떼어 놓기를 원했다.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비해 더 강력하고 위협적인 이웃인 나치 독일도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독일의 주요 동맹국, 헝가리의 이익을 위해 유고슬라비아가 약해지길

원했다.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왕, 하나의 국가는 20여년 만에 파국에 이르렀다.

이 누더기 국가는 이런식으로는 절대로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려주었다.


Locator_map_Croatia_Banovina_in_Yugoslavia_1939-1941.svg.png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Scs_kingdom_provinces_1920_1922_en.png


크로아티아-달마티아 (파란색, 연분홍색)가 크로아티,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는 크로아티아 뿐 아니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자치지역이었다.

이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는 대 크로아티아주의의 기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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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의 지원에 힘입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은 1939년 8월 26일 유고슬라비아 정부를 굴복시켰다.

유고슬라비아 정부는 자치정부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승인했고 그들에게 행정과 사법 분야에서

완전한 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동안 강력하게 거부해온 연방제가 사실상 시작되자 세르비아인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힘들게 엮은 통일국가가 다시 갈라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세르비아인들에게

매우 큰 위기감을 안겨주었다.


다른 소수민족들은 유고슬라비아의 무력함을 알게되었다. 자신들에게 탄압의 총칼을 휘두르던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게 저항 없이 굴복하는 것을 본 슬로베니아인,

코소보 알바니아인, 마케도니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벗어나 그들이 목표로 하는 독립 혹은 국경

밖의 동포의 국가와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다.


1939년 8월 26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설립 이후,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고

영국과 프랑스가 9월 3일,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 함으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1939년에 아직, 유고슬라비아는 대전의 불길에 휩싸이지는 않았지만 국경 밖에서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보이보디나.png
유고슬라비아-헝가리 분쟁의 중심지, 보이보디나

보이보디나 북부에 헝가리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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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의 발칸반도 주요 동맹국 중 하나였던 루마니아가 독일에 굴복하고 영토를 헝가리에

넘겨주고 1940 9월 27일 추축국에 가담한 것 뿐 아니라, 영토분쟁, 역사적 원한 등으로

적대국이었던 헝가리가 공식적으로 추축국에 가담함으로써 유고슬라비아의 적들이

유고슬라비아를 포위했다.


Italo-Grecian_War_1940-1941_-_political_map_of_operations.gif
이탈리아의 그리스침공, 보호국 알바니아에서 그리스를 침공했지만그리스의 반격으로

오히려 알바니아남부를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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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와 같이 유고슬라비아의 중요한 동맹국이었던 그리스는 1940년 10월 28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공격을 받았다.그리스를 손 쉽게 점령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던

무솔리니는 11월 8일, 그리스의 대반격 이후 히틀러에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지만, 어쨋든 국경 밖에서 난리가 벌어지고 있었고 이는 유고슬라비아에도

매우 큰 걱정거리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유고슬라비아가 그리스와 손을 잡고 발칸반도에서 반 추축국 대열에 참여하기를

원했지만 섭정 파블레 공은 불가리아까지 추축국에 참여하자 유고슬라비아가 완전히 포위되어

추축국에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일은 유고슬라비아에게 즉시 추축국에 가담하라고 요구했고 파블레 공은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 히틀러와 회담을 가졌다. 히틀러와 회담 이후, 파블레 공은

베오그라드에서 내각과 왕가의 요인 등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그 회의에서 1941년 3월 6일, 독일이 유고슬라비아에게 전쟁에 참여하라고 강요하지 않으며

독일군이 유고슬라비아 통과, 주둔이 모두 금지된다면 추축국에 가담하겠다고 결정했다.

나치 독일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후방의 안정을 위해 이 조건들을 수락했고

유고슬라비아는 3월 20일 추축국에 가담했다.


정계가 독일의 압력에 굴복하여 추축국에 가입하였으나 군부와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는

반 추축국 정서가 팽배했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독일,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하면 남은

반 게르만 정서, 추축국에 가입한 헝가리와 불가리아에 대한 반감, 크로아티아 독립 운동과

마케도니아 독립 운동을 후원하며 유고슬라비아를 약화시키려 획책하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에 대한 증오때문이었다. 복합적으로 추축국 전반에 대해 증오하는

군부와 세르비아인들은 3월 20일, 협정이 체결되자마자 행동에 나섰다.


3월 26일 늦은 밤과 27일 새벽, 세르비아 군부가 영국의 지원 아래 쿠테타를 일으켰다.

군부의 쿠테타는 세르비아 사회 전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파블레 공은 쿠테타가 발생하자

즉시 섭정에서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했다.


쿠테타세력은 신속하게 정부를 접수하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히틀러의 광기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쿠테타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3월 27일,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명령했다.


Invasion_of_Yugoslavia_lines_of_attack_Why_We_Fight_no._5.jpg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독일군 24개 사단, 이탈리아군 22개 사단, 헝가리군 5개 사단, 불가리아 2개 사단이 동원된 침공이

1941년 4월 6일 시작되었다. 추축국의 압도적인 전력과 크로아티아 자치정부의 노골적인 배신은

유고슬라비아가 1941년 4월 17일 추축국에 무조건 항복하게 만들었다.


크로아티아 일대에 진주한 독일군은 세르비아로부터 그들을 해방한 해방군으로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Axis_occupation_of_Yugoslavia_1941-43.png
유고슬라비아 분할


유고슬라비아를 굴복시킨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했다.

크로아티아는 나치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협력한 우스타샤 정권하에서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구성했고

슬로베니아는 이탈리아와 독일이 분할했으며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은 불가리아가 차지했다.

코소보와 서 마케도니아, 달마티아 해안가(이탈리아인이 사는)는 이탈리아가 차지했다.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의 종주국으로 알바니아인들이 많이 사는 영토를 차지했고

헝가리는 헝가리인이 많이 사는 보이보디나 일부를 획득했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분리되어 몬테네그로는 이탈리아의 괴뢰국으로 세르비아는 독일의

군정 치하로 들어갔다.


남 슬라브 인의 통일은 일장춘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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