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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전쟁 당시 조선수군의 함포운영과 관련해서
게시물ID : history_278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3
조회수 : 823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7/04/06 22:2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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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계속해서 얘기하는 것이지만, 7년전쟁 당시 조선수군의 함포사격의 운용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을 것이다. 일단 내가 이전에도 얘기했듯이[링크] 일단 화약의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여기에 화포의 운용 자체가 상당히 조잡했다. 지금 7년전쟁 당시 전투를 그리는 것을 보면 화포를 동거에 싣고 사용하는데, 이 동거는 7년전쟁 당시에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구조가 워낙 간단해서 총통이 처음 개발되었을 때부터 사용되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없다. 더 결정적으로, 동시대 한효순이 기록한 『신기비결神器秘訣』에서 지자총통이나 천자총통을 쏠 때 "입구(총구)를 평평하게 하고 명령을 기다렸다가 불을 붙여서 발사한다[入口平完候令燃發]"고 했는데, 화포를 동거에 싣고 사용하면 발사각이 17도 이하로는 나오질 않는다. 즉, 7년전쟁 당시에는 화포를 운용할 때 동거에 싣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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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임진왜란 당시 조선수군이 화포를 이렇게 운용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이 말 (이미지: 영화 '명량' 中)

나는 이전에 조선후기 수군의 훈련조목에서 함포사격이 2백보(약 250m) 이내에서 이루어진다고 한 것이 척계광의 『기효신서』에 같은 수치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고 포스팅을 한 적이 있다.[링크] 이때 보면서 척계광의 병법이 어느정도 조선의 사정에 맞게 변용된 것을 봤었는데, 그때 나는 이 2백보라는 수치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했었다.

비록 조선이 임진왜란 이후에 불랑기를 주력 화기로 사용하긴 했지만, 번동아제님이 인용하신 구절에서 총통銃筒이라고 한 것을 보면 같은 규정이 불랑기가 아닌 다른 화포-지자총통이나 현자총통 같은 기존의 화포류-에도 적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이건 단순히 『기효신서』의 규정을 수용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사용하던 무기 체계에도 무리 없이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에 수용되었다고 생각된다. 총통류이건 불랑기이건, 롤링이나 요잉 때문에 요동치는 선상에서 화포를 운영하기 때문에 실제 해전에서 운용할 수 있는 사정거리는 육지에서의 최대 사정거리보다 짧을 수 밖에 없었다.(『병학지남연의』에서는 이에 대해 "2백 보는 병기를 사용할 수 있는 한계를 나타낸 것이다"라고 직접적으로 쓰여있다)

즉, 2백보라는 수치가 불랑기 뿐만 아니라 기존의 총통류에도 어느 정도 들어맞기 때문에 적용되었다고 했었다. 하지만 이걸 쓸 때 나는 조선 후기로 오면서 염초생산법이 개량되면서 그에 따라 화약 사용에 전보다 여유가 생겼고, 동거의 등장으로 포가의 형태가 변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즉, 기술수준이 개선되면서 함포사격의 유효사거리가 2백보로 늘어날 수 있었다는 것까지는 계산에 넣지 못했다.
그럼 7년전쟁 당시에는 어땠을까? 당연히 저 수치가 적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7년전쟁 당시 조선군의 화기 수준은 조선 후기보다는 명종대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보이는데, 명종대에는 함포사격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戰船左右前後, 排設天·地·玄字銃筒, 整備器械, 人伏板屋之下, 不露形體, 而疾棹直進, 迫近賊船, 隨其高下, 一時齊發, 則豈有不破之理, 亦豈有人被鐵丸之患乎?
전선의 전후 좌우에 천·지·현자[天·地·玄字] 총통을 설치하여 기계를 정비하고 사람들은 판옥板屋 밑에 숨어 몸을 노출시키지 않고서 빨리 노를 저어 곧장 적선에 가까이 다가가 그 높낮이에 따라 동시에 일제히 발사했다면, 어찌 격파하지 못할 이치가 있었겠으며 사람들이 철환을 맞을 염려가 있었겠느냐?
(『명종실록』 명종 14년(1559) 6월 6일)

가까운 곳에서 근접사격을 했다는 것인데, 구체적으로 어느정도의 거리였는지는 언급이 없다. 당시 해전의 마무리는 백병전이고, 조선군도 적선에 도선해서 전함을 나포하긴 했지만 일본군이나 왜구가 배에 도선하는 것은 피하려고 했다. 단순히 적에게 공포감을 주고 아군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사용하기에는 화포의 위력은 아깝다. 그러니 사용하기는 해야 하는데, 유치한 운용방법과 낮은 명중률을 감안하면 가까운 거리에서 쏘아야 한다. 『명종실록』의 증언은 그 얘기인데, 이게 어느 정도 거리였을까?

애석하게도 이순신의 『임진장초』나 『난중일기』에는 정확한 거리가 나오질 않는다. 그런데 일본쪽 자료를 뒤지던 중 단서가 될 만한 기록을 발견했다. 김시덕 교수님이 번역한 『고려해전기[高麗船戰記]』(계간지 『문헌과 해석』(문헌과 해석사) 57호(2011년 겨울호)에 게재)를 보던 중, 1592년 7월 10일 안골포해전을 기록한 부분에서 단서가 나왔다. 이때 이순신은 "서로 교대로 출입하면서 천자天字·지자地字·현자玄字총통과 여러가지 총통 뿐만 아니라 장편전長片箭 등을 빗발같이 쏘아 맞혔다"*고 했다.
* 迭相出入, 天·地·玄字銃筒及各樣銃筒是白沙餘良, 長片箭等, 如雨放中......(後略)......(『임진장초壬辰狀草』 「제 3차 한산도 승첩을 아뢰는 계본[三度閑山島勝捷啓本]」) 밑줄 친 부분은 이두이다.
이날 전투에 대해 『고려해전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전략)......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경(酉ノ刻)까지 번갈아 공격하여 (아군 배의) 고루(高樓)며 통로며 발을 보호해주는 방어시설까지 모두 부수었다. 그 대포는 약 150cm(5尺) 길이의 단단한 나무 끝을 철로 두르고 철로 된 날개도 삼면에 붙이고.......(중략)......화살을 붙인 무기이다. 불화살은 끝에 철을 둥글고 튼튼하게 붙인 것이다. 이런 화살을 약 6~10m(3~5間) 거리까지 다가와 쏘았다. 구키 님은 니혼마루(日本丸) 배의 고루에서 조총(鐵砲)을 쏘셨는데, (적이 쏜) 대포를 한 발도 맞지 않았으니 불가사의한 일이라 하겠다......(후략)......
(『고려해전기』(계간지 『문헌과 해석』(문헌과 해석사) 57호(2011년 겨울호)에 게재) p.72)

이때 조선군이 대포를 이용해 날린 화살은 길이를 통해 추정하면 차대전(현자총통에 사용)이다. 일본군의 배가 니혼마루였기 때문에 누각 시설의 구조물을 공격하기 위해서 대형화살을 날린 것이다.(대장군전이나 장군전을 쓰면 좋지만, 화약소모가 심하다) 화살은 포탄과는 달리 날개가 있어 발사궤도가 안정적이고 사정거리가 확보되지만, 발사 거리가 멀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내가 이전에 썼던 내용들에 더해 결론을 종합적으로 내면

1. 조선 수군의 전투에서 화포가 차지하는 비중이 생각처럼 크지는 않음. (화약도 없고, 운용 수준이 낮아서 명중률도 조악하다사용해도 6~10m라는 기록이 보여주듯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사용.
2. 함포사격을 하긴 했지만, 적함을 격침하기보다는 인명살상이 주 목적이었고, 따라서 화포를 발사할 때도 대형화살이나 포탄보다는 소형탄환을 주로 사용. 단, 인용한 안골포해전의 경우는 일본군의 니혼마루가 높은 누각을 가진 구조이기 때문에 시설물을 부수기 위해 차대전 사용.
3. 해전에서 주된 무기는 화포보다는 활이 메인.

조선군이 화포를 비롯한 각종 화약무기를 사용했다고 해도, 이때는 16세기 막바지. 함포의 비중이 높아질려면 서구에서도 백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이순신에 대해 함포사격을 주로 하는 근대해전의 효시로 보면서 일방적으로 일본군을 이긴 것처럼 보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이순신은 함포를 위주로 하는 근대해전보다는 노선과 함포, 궁시류를 사용하던 노선시대 마지막인 갤리어스 단계의 해전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노선시대 마지막 단계 전술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었고, 전략적으로는 노선시대에 범선시대에 구현된 주요 전략을 모두 구사하며 제해권을 장악했다는게 전쟁사적으로 이순신이 가지는 진짜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구국의 영웅, 민족의 성웅, 만들어진 영웅 타령에 묻혀 이순신이 되려 과소평가되었다고 보는 것이고.

출처 http://egloos.zum.com/xuecheng/v/421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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