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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국 국제에 대한 잡스러운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785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3
조회수 : 1165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04/10 17:14:13





고종은 1899817일  9조로 구성된 대한국 국제를 선포하였다.

국체를 제국으로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대한국 국제는 처음에는

1897316일부터  준비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때 고종이 별도의 부서를 설치하여 법규를 준비하라는

명령을내렸기 때문이다. 고종의 조칙을 바탕으로 동년 323, 중추원 안에 교전소가 설치하고 미국인 2

(외교관신문기자), 영국인 1(재정고문, 후에 총세무사)을 고문으로 하여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국제는 신속하게 만들어지지 못했는데, 국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관리들간의 이견 등으로

말미암아 교전소의 업무가 사실상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시기 대한국 국제 제정 과정이 비교적 순탄하고 외세의 간섭이 없었던 점은 러시아-일본 간의 알력이

소강상태였기 때문이다. 1896514, 베베르-고무라 각서에서 양자간의 타협이 이루어졌고

이어 189669일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에서 양국이 외면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보장하고

이면의 비밀협약에서 조선을 러시아-일본 양국의 공동 보호령으로 서로 인정하였다.

러시아는 조선, 만주 동시진출정책을 잠시 포기하고 만주집중정책을 추진하였고 일본은 러시아의 만주진출을

묵인하는 대가로 조선에서의 상업적 우위 등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러시아는 조선의 재정주권을 피탈하려한다는 의심을강하게 받은 한러은행을 폐쇄하였고

러시아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을 철수하였다. 러시아가 조선에서 일정 부문 양보함에 따라 러-일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졌고 조선은 이시기 특정한 외세의 독점적인 영향권 아래에서 벗어났다.

 

대한국 국제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지 논의가 지속되던 와중, 잠잠해진 국외문제 대신 국내문제가 터졌다.

독립협회는 고종에게 국제 제정과 관련하여 전제황권을 지지하는 대신, 중추원의 의회화, 중추원 구성원의 절반을

독립협회가 지명하여 간선제 민선 의원으로 구성하자고 제의했다고종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약속하고 이와

관련된 규정을 대한국 국제에 포함시키겠다고 했다. 그런데 이 타협 직후, 독립협회가 공화정으로

정지 체제를 바꾸려한다는 익명서가 거리에 걸렸고 고종은 즉시 독립협회를 비롯한 관제조직을 제외한

모든 정치결사에 대한 해산령을 내렸고 독립협회 지도자 17인을 구속하였다. 고종은 1897114,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지도부를 구속시킨 후, 중추원에 관련한 약속을 파기했다.

 

1899623, 교전소는 교정소로 이름이 변하였고 72일에는 다시 이름을 법규교정소로 바꾸었다.

교전소가 관리들의 불참 등 이런저런 이유로 유명무실화하였기 때문에 고종은 조직을 새로 개편하여 대한국 국제

제정을 위한 주 기관으로 삼았다. 이 법규교정소에 내린 조서에서 대한국 국제의 방향과 대한제국의 앞으로의

방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단어가 나왔다. “법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새 것과 옛 것을 참작하여 되도록 타당하고

훌륭하게 될 수 있도록 하라”, (구본신참)

 

국제에 대한 기본 방침이 정해지고 교전소 시절과 달리, 고종이 법규교정소 소속 관리들을 채근하면서

법규 교정소 설치 약 2개월 만에 대한국 국제가 완성되었다.

 

이후, 국제 체제 아래에서 법규교정소는 황제가 입법권을 행사하는 기관으로 작동했다. 황제가 임명한

법규교정소의 관리들은 법률과 칙령에 관한 전반적임 업무를 담당하였고 황제권의 핵심기관 중 하나가 된다.


  

1조 대한국은 세계만국의 공인되온바 자주독립하온 제국(帝國)이니라.

2조 대한제국의 정치는 이전으로 보면 500년 전래하시고 이후로 보면

      만세에 걸쳐 불변하오실 전제정치이니라.

3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립정체이니라.

4조 대한국 신민(臣民)이 대황제의 향유하옵신 군권을 침손할 행위가

       있으면 그 이미 행한 것과 아직 행하지 않은 것을 물론하고 신민의

       도리를 잃은 자로 인정할지라.

5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국내 육해군을 통솔하옵셔 편제를

      정하옵시옵고 계엄·해엄을 명하시니라.

6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법률을 제정하옵셔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도

      개정하 옵시고 대사(大赦특사·감형·복권을 명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정율례(自定律例)이니라.

7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행정 각 부부(府部)의 관제와 봉급을 제정

      혹은 개정하옵시고 행정상 필요한 각항 칙령을 발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치행리(自治行理)이니라.

8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문무관의 출척(黜陟임면을 행하옵시고

       작위·훈장 및 기타 영전(榮典)의 수여 혹은 체탈을 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선신공(自選臣工)이니라.

9조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각 유약국(有約國)에 사신을 파송,  

      주찰(駐紮)케 하옵시고 선전(宣戰강화 및 제반 조약을

      체결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 바 자견사신(自遣使臣)이니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9개 조항은 세 가지 항목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1조와 2조는 대한제국 그 자체를 규정하고 있다.

1조에서는 자주독립국임을, 2조에서는 정체가 전제정치임을 규정하고 있다. 3조와 4조는 황제권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3조에서는 황제권의 무한성을, 4조에서는 황제권을 불가침성을 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5조에서 9조까지는 황제가 행사하는 구체적인 권한을 명시하였다.

 

국제의 핵심은 제국 선포나 황제 즉위에 있는 것이 아닌, 조선 이래로 내려온 군주권 중심의 국가,

전제군주정에서 머물렀다는 것이 중요하다국제는 당시에도 형식적 입헌주의로 비판받았던 프로이센식 헌법에

비해서도 매우 구시대적이었으며 불가침성의 황제권 만을 규정했고 국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서는

전혀 규정하지 않았다. 특히 무한한 군권과  황제권의 불가침성개념은 대한제국의 정체가 어떻게 굴러갈 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고종은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에 대해 군주권에 대한 침해로 여기며 강경하게 진압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이 두 가지 개념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에 고종이 자신의 안녕과 황제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넣었을 것이다이 조항은 그런 이유에서 나왔을 것이기

때문에 매우 시대 퇴행적이었다


시대에 뒤쳐졌다는 비판을 받던 프로이센 헌법과 그것을 모방한 일제의

명치 헌법에도 유사한 조항이 있었지만 대한국 국제의 개념은 그것보다도 더 나아가 군주권에 대한 무조건적인

방어와 황제 전제권만을 강조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황제권에 대한 구체적인 방어책을 명기했다는

점인데, 4조에서 군권을 침해하여 손상시키는 일체의 행위를 제한하였다.


이것이 신민의 어떠한 권리도 명 시되어있지 않은 것과 결부되어,

신민의 무권리 상태와 황제권의 절대성이 매우 돋보인다.

 

대한국 국제와 갑오개혁시기 홍범 14조와 거칠게 비교해보면 국제의 특징이 매우 눈에 띈다.

 

4조에서 왕실사무와 국정사무의 분리를 명시함으로 국왕권의 제한한 것.


5조에서 의정부와 각 아문의 직무권한을 명백히 한다고 함으로 의정부와 각 아문에 권한을 집중하고

각 기관의 권한을 규정하겠다고 한 것과 달리국제에는 황제권 이외에 국가 기관을 어떻게 구성할지 전혀

나와있지 않다.


13조에는 민법, 현법을 엄히 제정하여 함부로 감금, 징벙을 금지하여 민의 생명, 재산을 보호한다라는 규정이 있다.

국민의 신체, 생명의 자유와 재산의 자유권을 규정하여 제한적이나마 국민의 기본권을 규정하고 있으나,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대한국 국제에는 신민의 황제권에 대한 충성은 규정되어 있으나,

권리에 대한 것은 일언반구도 없다.

 

홍범 14조는 국제에 비해 이른 시기에 나왔으나, 근대국가의 헌법이 국민의 권리와 의무, 각 기관등의 권한을

규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입헌군주제의 기초를 이루려고 한 것을 볼 때 오히려 홍범 14조가 대한국 국제에

비해 훨씬 근대적이며 진일보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국 국제가 미-영국인 고문들의 조언으로 국제 제정 때 일부 영향을 받았으며, 프로이센식 헌법을 모티브로

하여 시대에 뒤떨어진 편이라고 평가 받던 일제의 명치헌법과 비교해보면 역시 국제의 한계를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명치헌법은 프로이센 헌법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았으며 모방한 원본과 마찬가지로 당대에도

외견만 입헌주의를 갖췄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신민의 권리와 의무를 규정한 18~ 27조,

제국의회의 설치와 운영, 권리를 규정한 33~54, 사법의 절차와 권한을 규정한 57~61조의로

기본권 보장과 일부 제한적이나마 삼권분립의 형태를 갖추었다. 물론 프로이센식 헌법의 한계와

전근대성의 잔존으로 말미암아 기본권에 대한 법률의 제한을 제대로 막을 수 없던 점, 군주대권의 발동을 의회가

저지할 수 없던 점 등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하나 대한국 국제에 비해 기본권 보장의 명문화, 삼권분립의 명시

등은 국제의 전근대성에 비할 수 없다.

 

비교를 끝내고 국제로 돌아가, 다시 살펴보면 특기할 만한 점이 또 하나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

국제에는 헌법이 가지고 있어야할, 국가기관의 구성과 권한 등을 규정한 조항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을 의도한 것인지 의도치 않았지만 얻어 걸렸는지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무 규정으로 말미암아

고종은 아주 큰 이득을 보았다.


대한국 국제 체제 아래에서 의정부는 사실상 유명무실한 형식기구가 되었으며 황제의 직할 궁내부는

친위기구로서 방대한 기관으로 확대되었다. 궁내부는 독립적인 재정권, 조세 수취권을 가지고

조직을 운영하였는데, 궁내부의 가장 큰 폐단 중 하나는 국자 제도를 혼란스럽게 했다는 것 뿐 아니라

갑오개혁기에 혁파되어 사라진 무명잡세를 부활시켜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기관으로 자리잡았다는 것이다.

고종은 세금의 이중, 삼중 수취에 대한 상소가 다시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답하였으나, 말 뿐이었다.


1903년 한 기록에 따르면 고량포구(연천)와 강화도까지 채 100리도 안되는 거리에 징세기관이 18개나 된다며

이것을 줄여야 한다는 보고가 올라갔으나, 고종은 그 중에는 반드시 내야할 세금도 있을 것이라며

내장원이 중심이 된 수탈에 눈을 감고 있었다. 내장원의 비대함은 국제가 국가기관의 한계와

권한부여를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이러한 내장원의 비대함은 백성들에게는

수탈을 정부에는 비효율적인 운영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폐단은 내장원의 부속기관이었던 경위원에서도

매우 심각했다. 경무청을 황제직할로 효과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제반 상황 때문에 매우 어려웠기에 경위원이

내장원 직할로 신설되었다. 경위원은 치안유지 업무보다는 대한국 국제 체제 유지와 내장원의 잡세 징수 업무에

주로 종사했다.

 

결국 대한국 국제의 한계로 말미암아 대한제국은 국가라기보다는 고종 개인 사업체처럼 굴려졌고 이러한

국정운영은 매우 치명적인 한계를 드러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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