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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업]동북아역사지도에 독도가 안나오는게 맞음
게시물ID : history_2823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rianjung
추천 : 2
조회수 : 575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7/06/13 14:42:16
전 임기환 교수가 압력에 밀려서 어쩔수 없이 나중에 수정하겠다고 발언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역사기록과 유물상 1900년 이전에 "독도를 점유"했다고 인정될 수 있을 만한 사실이 없습니다.

이거야 말로 대중의 옳지 못한 요구에 역사를 왜곡하는 일입니다.

정리하자면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기록에 "우산국"을 점유했다고 기록되어있는데, 그 우산국은 현재로서는 울릉도로 판단이 되며, 현대역사관점에서 한반도의 역사적실체가 독도를 점유했다는 역사적 기록은 조선후기에나 확인이 된다는 겁니다. 

명확하게 하자면 1900년 10월에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라는것이 공식 기록상으로 정리가 된거죠.

이런 역사적관점으로 봤을때,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독도를 6세기 신라의 영토에 포함시키지 않은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입니다.

국제적 영토분쟁에서 중요한것은 실점유이지, 독도가 6세기부터 우리땅이던 조선후기부터 그랬던 1900년부터 그랬던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마지막기록에 의지한다해도 이미 100년이상을 점유했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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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6세기 독도가 신라영토로 기록되지 않은것에 대해 또다시 국회특위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 주장의 근거는 삼국사기 신라본기입니다.
http://www.dokdohistory.com/kr/?stctgr=1&stsqn=14&sopt=&stxt=&page=41&subject=&bmode=view&bidx=2
13년 6월 여름, 우산국이 귀복(歸復)하여, 매년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인데, 울릉도라고도 한다. 그 섬은 사방 1백리인데, 그들은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었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가 되었을 때, 우산 사람들이 우둔하고도 사나우므로, 위세로 다루기는 어려우며, 계략으로 항복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곧 나무로 허수아비 사자를 만들어 병선에 나누어 싣고, 우산국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짓말로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는다면 이 맹수를 풀어 너희들을 밟아 죽이도록 하겠다.”고 말하였다. 우산국의 백성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여기에 대한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hn&setId=425950&position=1
‘우산’이라는 명칭은 12세기 중반의 문헌인 『三國史記』에 처음으로 나온다.
이어 고려말에 무릉도라는 명칭이 등장하고, 조선왕조에 접어들어서는 우산, 무릉, 울릉 등의 명칭이 왕조실록에 빈번히 보이다가, 15세기 중엽의 『世宗實錄』 지리지에 “于山武陵二島”로 시작되는 기록이 등장한다. 반면 일본측의 경우 17세기 중반에야 “竹島近所之小嶋” 혹은 “竹島地內松島”와 같은 표현이 지방자료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한국의 대표적 연구자인 신용하는 『三國史記』의 기록을 근거로 서기 512년에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때부터 독도가 한국의 고유영토로 되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우산국의 영토에는 울릉도뿐만 아니라 독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일반 대중뿐만 아니라 관련 연구자에게까지도 거의 상식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서기 512년의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서, 그 자체가 논쟁과 검증의 대상이라 할 15세기의 『世宗實錄』 지리지와 19세기 『萬機要覽』의 기록을 제시하는 것도 문제이려니와, 명칭에 대해서도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독도를 우산도로 호칭해 왔는데, 우산도가 우산국에서 나온 명칭임은 자명하다”는 식의 뒤집어진 논증방식을 취하고 있다. 

역사적·논리적으로 볼 때 우산국에서 우산도라는 명칭이 분리되어 다시 독도의 명칭으로 정착하는 과정을 고증하는 것이 맞는 순서이다. 
그러나 오히려 ‘우산도=독도’라는 것을 논증의 전제로 삼고 있다. 

우산국이 울릉도와 독도를 모두 포함하고 있었더라도, 거기서 유래한 우산도라는 명칭이 언제, 왜, 어떻게 울릉도가 아니라 독도와 결합하게 되었는가하는 것은 명칭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설명이 이루어지지 못한 형편이다.

우산도=독도라는 기술이 제대로 등장하는 것은 19세기 들어서입니다.

1808년에 간행된 『萬機要覽』에서는 輿地志를 인용하여 “울릉과 우산은 모두 우산국의 땅이다. 우산은 倭가 말하는 松島이다(鬱陵于山皆于山國地于山則倭所謂松島)”라고 하였다. 

기존의 한국측 주장은 바로 이러한 진술에 바탕하고 있는데 울릉도와 독도를 정확히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약 100년 후인 1900년경 學部에서 간행한 「大韓輿地圖」(1898)나 「大韓全圖」(1899)에는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竹嶼에 ‘우산’이라는 명칭이 표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용하는 이들 지도에 대해 “우산도를 울릉도의 동쪽에 정확히 그려 넣어 우산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표시”한 것으로 확언함으로써, ‘우산’이 독도가 아니라 竹嶼島일 가능성은 완전히 배제했다. 

이는 우산=독도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전제한 결과이다. 

러나 1900년경에는 대한제국 정부가 울릉도와 그 주변에 대해 거의 정확한 지식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15~16세기와 동일한 방식으로 막연한 영유의식을 지도에 표명하였다고 해석하는 것은 지나치다. 

또 1899년 9월 23일자 『皇城新聞』의 기사에서는 “鬱珍之東海에 一島가 有니 曰 鬱陵이라, 其附屬한 小六島中에 最著者 于山島 竹島니 大韓地誌에 曰 鬱陵島 古于山國이라”고 하여, 우산도와 죽도를 병기하였다. 울릉도와 그 주변의 부속도서 및 독도에 대해 정확한 지식을 얻게 됨과 동시에 고문헌이나 전승을 통해 알고 있던 우산, 그리고 일본측 명칭인 竹島, 松島 등이 뒤섞이면서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을 종결짓는 것이 1900년 10월의 대한제국 칙령 41호(석도:독도를 울릉군 관할지역으로 명기)로서, 이 시기 이후로 우산이라는 명칭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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