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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되지 않는 한국사 역사상 역대급 패전, 공험진 - 갈라수 전투
게시물ID : history_283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킬라칸
추천 : 1
조회수 : 115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6/19 15: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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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중기 무렵, 윤관의 북벌과 고려의 동북 9성 설치는 교과서에서부터 나오는 이야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일이 있었다." 라고 하는 일은 알고 있습니다. 다만, 그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떨어져 거의 알려지지 않는 편이구요. 



요즈음에 인터넷에선 "척준경이 여진족과 싸웠다." 는 정도로 알려져 있는것 같더군요.





아무튼 고려군의 총지휘관 윤관이 대군을 이끌고 가 성을 지었다는 '동북 9성' 의 위치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 서로 다른 학설을 소개한 저 맨 위의 지도만 봐도 대충 논쟁이 어떻게 되는지는 감이 올듯.... 일단 현재의 정설만 소개하자면 1학설과 3학설 모두 부정되고, 2학설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일단 여기서는 이 논쟁을 다루려는 건 아니라 이 정도만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당시 고려는 윤관의 지휘 아래 무려 17만이라는 대군을 동원해 기존의 국경을 넘어, 여진족을 쫓아내고 동북 9성을 축성했습니다. 이 북벌 계획은 숙종 때부터 준비된 사업이었는데, 숙종이 죽고 나서 예종이 즉위했지만 부친의 숙원이었던 사업이라 이를 그대로 이어받았으니 여러모로 중대한 사업이라 나라 전체에서 지원이 막대했던 겁니다.



아무튼 대군을 이끌고 가서 성을 짓는것 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별로 어려울 일도 없었고, 여러모로 일이 순조로워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성을 지은 다음부터였습니다.




역사를 순전히 우리 입장에서만 보자면야, 동북 9성을 축성한건 나라의 국경을 넒힌 일이라 장하고 뿌듯한 일처럼 느껴질 수 있겠지만, 당시에 그곳에서 살던 여진족의 입장에서는 난데없는 침략을 당한 일이었습니다. 고려군은 동북 9성을 지역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숫자의 여진족 마을을 불태웠고 무수한 숫자의 여진족을 양민학살 했습니다.



고려사 등에서는 이때의 학살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려군 중군이 35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380명을 죽이며 230명을 포로로 잡았고, 우군이 32개 마을을 불태우고 290명을 죽이고 300명을 포로로 잡았으며, 좌군이 31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950명을 죽였으며, 윤관이 이끄는 본대가 37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2,120명을 죽이고 500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를 다 합치면 135개의 마을을 불태우고 3,740명을 죽이고 1,030명이 포로로 잡힌 셈입니다. 




그런데 위의 수치를 자세히 보면, 유독 고려 좌군만 죽인 사람이 매우 많고 포로가 아예 없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려 좌군이 석성이라는 곳을 공격할 무렵, 고려군은 전투에 앞서 사신을 보내 항복하라는 요구를 전했습니다. 그러자 여진족 쪽에서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한판 싸움으로 승부를 보려고 하는데, 어째서 항복하라고 하는 것인가?"



그리하여 전투가 벌어졌고, 여진족은 고려군이 깜짝 놀랄 정도로 완강하게 저항했습니다. 석성 내에는 여진족 군사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늙은 부모, 아내, 어린 아이들 등 가족들이 전부 있었던지라 이들을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 것입니다. 워낙 저항이 거세자 윤관은 척준경을 파견했고, 척준경이 석성 위로 올라가 여진족 추장 몇을 베어내자 고려군의 사기가 올라 결국 석성은 함락되고 맙니다.



하지만 전투에 패한 여진족들은 고려군에게 항복하는 대신, 바위에 몸을 던져서 자살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여진족 장병들의 남은 가족들 모두 고려군에게 전부 학살 당했습니다.(동사강목의 기록)



어째서 석성의 여진족들은 항복을 하지 않고 싸움을 택했을까. 그들이 무슨 전투광이라서 그런게 아닙니다. 



북벌을 시작하기 전, 고려는 이런저런 문제로 자신들이 억류하고 있던 여진족들을 풀어줄테니, 여진족 추장들이 와서 명령을 받들라는 식으로 그들을 소집했습니다. 여진족들은 좀 의아해하면서도 잡혀있던 동지들을 풀어준다고 하니 그 명령에 따랐고, 추장들의 숫자만 400명에 그들을 수행하는 인원들까지 합쳐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고려는 이들을 환대하는 척 하며 연회를 베풀더니, 이내 병사를 동원해 그들 모두를 학살해버렸습니다. 그나마 분위기가 이상해서 국경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명 까지 척준경 등을 보내 일부러 추격해서 모조리 죽여버리고 맙니다.




고려 입장에서는 북벌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적들의 우두머리들을 죽여 작전을 쉽게 하겠다는 심산이었을테지만, 여진족의 입장에선 피눈물이 나고 이를 갈아도 시원찮을 일이었기에 고려군에 대한 증오심이 하늘을 찔렀고, 무엇보다 항복한다고 해도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전혀 없었기에 항복하는 대신 차라리 죽을때까지 싸우는 편을 택한 것입니다.















당시 고려가 공략해서 장악한 여진족들의 지역을 갈라전(曷懶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갈라전보다 북방에는 당시 대단히 강성했던 여진족 부족인 완안부(完顔部)가 있었습니다. 


고려가 침공해올 당시, 완안부의 족장 오아속(烏雅束)은 사냥을 하고 있다가 17만 대군의 북상과 동북 9성의 축성 이야기를 듣자 깜짝 놀라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다만 회의를 한다고 해도 달리 뾰족한 대책은 없었습니다. 고려군의 대군과 정면으로 붙을 자신도 없는데다, 설사 자신들이 항전한다고 해도 다른 부족들이 협력을 해줄지도 미지수였으며, 무엇보다 이 틈을 타 요나라가 고려를 돕는답시고 뒤를 치면 그야말로 끝장난 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딱 한 사람, 오아속의 동생이었던 아골타(阿骨打)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지금 가만히 있는다면 어찌 갈라전만 잃겠습니까? 모든 부족이 우리의 곁을 다 떠날 겁니다!"



동북 9성이 계속 유지된다면 완완부에 복속되어 있는 다른 여진 부족들이 모두 떠날 테고, 그러면 완완부도 끝장인 셈입니다. 그런 점을 역설하자 오아속도 마음이 동해 갈라전에 군대를 파견해 끝까지 저항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마침 고려군의 여타 만행으로 갈라전의 소규모 부족들은 고려에 협력하는 대신, 죽을 각오로 저항하려는 기세라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후 벌어진 숱한 중간 부분의 사투에 대해서는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동북 9성을 지키는 고려군은 처음부터 큰 문제가 있었는데, 고려사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조정에서는 병목[甁項] 지역을 취해 그 길을 막으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들 말했는데, 막상 공격하여 빼앗고 보니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근거지를 잃게 된 여진은 보복을 다짐하는 한편, 땅을 돌려달라고 떼를 쓰면서 추장들이 해마다 와서 분쟁을 벌였다. 온갖 속임수를 쓰고 갖은 무기를 동원해 공격해 왔는데, 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지는 않았지만 수비하는 전투에서 아군이 많이 희생되었다.



게다가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며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서, 적들이 자주 복병을 두어 왕래하는 사람들을 노략질하였다.

- 고려사 윤관 열전.






즉 당초 본래의 계획대로라면, 고려는 중요한 길목 한 두 곳을 막아 성을 축조하면 여진족이 얼마나 몰려오건 타워 디펜스 게임을 하듯 막을 수 있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전에 파악한 지리 정보가 모조리 엉터리였고, 막상 성을 짓고 보니 사방 팔방으로 뚫리지 않은 곳이 없어 삼국지 게임으로 치면 수춘 블러드를 하는 상황이 된 셈입니다.



더구나 당시 고려군이 커버할 수 있는 능력에 비해 무턱태고 개척한 땅이 너무나 넒고, 자연히 동북 9성들 역시 거리가 너무 멀어져 근처의 성들이 상호간에 보완을 해주기는 커녕 각지에서 나홀로 수춘 블러드를 찍는 셈이 된겁니다. 어쩌다가 이 성에서 다른 성으로 사람을 보내려고 하면 길이 너무 멀어 여진족 복병이 중간에서 전부 차단해버렸습니다.









수춘 블러드 하나 막는것도 빡센데 9개를 동시에 막아야 되는 상황.





더구나 하루 아침에 집을 잃고 살던 땅을 잃게 된 여진족들의 저항 의지는 상상을 초월했으니... 그 전투는 그야말로 끝이 없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척준경의 활약이라던지 그런것도 있었지만, 단기전으로 끝날 줄 알았던 전투는 무려 1년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가면 불리한건 대군을 동원한 원정군이었던 고려 입니다. 고려로서도 십만이 넘는 대군을 파견하는건 엄청난 부담이었기 때문에 당시 고려에서는 물자 공출에 지친 수공업자들이 도주하는가 하면, 서경에서는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고려군이 힘든 만큼 여진족도 힘들었습니다. 당시 여진족은 모든 부족을 총동원해서 10군으로 나누고, 각 군을 끊임없이 축차 투입하는 방식으로 전투를 치루고 있었습니다.




금사 알새 열전

斡賽將內外兵,劾古活你茁、蒲察狄古乃佐之。
高麗兵數萬來拒,斡賽分兵為十隊,更出迭人,遂大破之。

알새가 내외의 병력을 이끄는 장수가 되었고, 핵고활니줄과 포찰적고내로 보좌케 하였다.

고려의 병력 수만이 방어하여 오니, 

알새가 병력을 10대(隊)로 나누어 번갈아 가며 출병하게 하였고 마침내 고려군을 대파하였다.






전부족이 전투를 치루거나 준전시상태로 대기하는 판이었고,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자 자연히 흉년이 찾아오게 됩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도적들이 발생하는 등 여진족도 몹시 힘겨웠으나, 어쨌거나 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니만큼 필사적이었습니다.










후의 전장, 길주





그렇게 계속해서 이어지던 전쟁은 전쟁 말기에 이르러 동북 9성 중 길주성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흐름이 됩니다. 여진족은 길주 방면에 수만이나 되는 여진족을 개미때처럼 집결시켰고, 어떻게든 동북 9성을 유지하려는 고려군도 필사적으로 여기서 적을 막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수만의 여진군은 길주성에 쉬지 않고 공격을 퍼부었고 풍전등화의 길주성은 단지 성을 지키던 이관진(李冠珍)의 결사항전 속에서 간신히 몇달을 버티던 형국이었습니다.


이때 동북 9성 개척 정책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인 오연총은 개경에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자 분기탱천해서 자신이 나서 구원하겠다고 하여 왕명을 받고 병력을 소집해서 북방으로 나섰습니다. 


오연총이 이끌던 대군은 곧 공험진(公嶮鎭)이라는 곳에 도달했습니다. 이 공험진이 어디인지는 확실치가 않은데, 이 장소가 정확히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동북 9성의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중요한 곳이기도 합니다. 


만약 이 공험진이 길주 보다 좀 더 북쪽 너머에 있다고 치면, 오연총의 군대가 오자 길주성을 공격하던 여진군이 잠시 후퇴(하는척) 하며 북쪽으로 물러나는걸 오연총이 추격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여간, 고려사에서는 공험진이라고 불리우는 장소, 여진족의 금사에서는 목리문전(木里門甸)이라고 불리우는 장소에서 고려군과 여진군의 대군은 일대 회전을 벌이게 됩니다.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는 여진군의 기습이었다고 합니다. 앞서 말한 가설대로 물러나던 여진족을 오연총이 추격한 것이라면, 갑자기 적이 반격하자 예상치 못했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한국사에 보기 드문, 수만 대군의 일대 회전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곧 그런 교착 상태도 끝나고 맙니다. 바로 여진족의 비밀병기가 전장에 투입된 것입니다.















당시 여진군에는 사묘아리(斜卯阿里)라는 장수가 있었습니다. 사묘아리는 대 고려전은 물론이고 이후에 요나라와의 송나라와의 전쟁에서도 모두 맹활약한 금나라 초기 최고의 맹장이기도 한 장수였습니다. 


그 사묘아리가 창을 들고 혼란한 전투 중에 적 장군 중에 한 사람을 발견하여 달려들어 찔러 죽이자 전세가 갑자기 확 바뀌게 되었고, 고려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으며 퇴각하게 됩니다. 그렇게 고려군이 물러난 틈을 타, 사묘아리는 자신의 아버지 혼탄(渾坦)과 더불어 멀리 떨어져 있던 석적환(石適歡)과 함께 군사를 합세시켜 굉장한 전력을 갖추게 되었고, 제차 공격을 해서 결국 동북 9성 중 2개의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마침내 9성 방위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서부터는 고려사엔 두리뭉술하게 되어있고 금사에 자세히 나와있는 내용)


한번 대패한 고려군의 오연총은 이렇게 물러가기엔 억울하다고 생각했는지, 병력을 재집결시켜 빼앗긴 2성을 되찾기 위한 전투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묘아리의 군대가 좋은 위치를 장악해서 수비하고 있자 별다른 공략 방법도 찾지 못해 결국 어쩔 수 없이 퇴각했고, 적이 등 뒤 를 보인 순간을 사묘아리는 놓치지 않았습니다.













고려군이 문자 그대로 때죽음을 당한 성천강



물러나던 고려군은 얼어붙은 갈라수(曷懶水), 즉 지금의 성천강을 건너가고 있었는데, 고려군의 뒤를 쫒던 사묘아리는 바로 여기서 적을 급습하게 됩니다. 고려군은 놀라서 정신없이 도주했고, 이미 전열이 붕괴던 적을 여진군은 마음껏 유린하며 대파했습니다. 


너무나 막대한 타격을 입은 오연총은 조정에 스스로의 실책을 고백하는 장계를 올린 뒤, 윤관과 함께 다시 북상하려 했으나 마침 화친 분위기가 조성되는 한편 조정에서 패전의 책임을 묻기 시작하자 다시 돌아와서 전투가 끝이 나게 됩니다.




======고려(高麗)가 갈라전(曷懶甸)에 9성(城)을 축성(築城)하자, 혼탄(渾坦)이 공격(攻擊)하였는데,


목리문전(木里門甸)에서 적(敵)과 만나, 오랫동안 역전(力戰/힘껏 싸움)하였고,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정창(挺槍/창을 겨누어 듦)하여 (고려의) 진중(陣中)에서 그 장수를 치자(馳刺/질주하여 찌름)하자, 적(敵)이 드디어 궤멸(潰滅)하였다.혼탄(渾坦)과 더불어 석적환(石適歡)이 도문수(徒門水)에서 합병(合兵/병을 합침)하였는데,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주장(主將)이 되어 적병(敵兵)을 깨트리고, (고려의) 그 2성을 취(取)하였다.

고려(高麗)가 입구(入寇/적이 쳐들어옴)하자, 아병(我兵/아군)으로써 요해(要害/요새, 방어가 쉽고 공격은 어려운 곳)에 둔수(屯守/주둔하여 수비함)하니, (고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고, 곧 돌아갔다.


사묘아리(斜卯阿里)가 갈라수(曷懶水)까지 추급(追及/뒤쫓아 따라붙음)하였는데,고려인(高麗人)이 빙상(冰上/얼음 위)을 쟁주((爭走/다투어 도주함)하였고,사묘아리(斜卯阿里)가 승지(乘之/기세를 탐)하여, (고려군을) 살략(殺略/죽이고 약탈함)하여 기진(幾盡/거의 없어짐)케 하고는,


드디어 석적환(石適歡)과 합병(合兵)하였다.길에서 적병(敵兵) 5만(萬)과 조우(遭遇)하여, (사묘아리가) 격주(擊走/공격하여 나아감)하였다.또 석적환(石適歡)과 함께 적(敵) 7만(萬)을 조우(遭遇)하자, 사묘아리(斜卯阿里)가 선등(先登/선봉으로 공격함)하여, 분격(奮擊/분발하여 공격함)하여 (고려군을) 크게 깨트렸다.


석적환(石適歡)이 말하길「네가 하루 동안에 중적(重敵/강한 적)을 세 번 격파(擊破)하였으니, 공(功)을 어찌 가(可)히 잊겠는가.」이에 후사(厚賜/후하게 하사함)하였다.-금사 사묘아리 전======







금사 사묘아리 전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고려군의 병력은 무려 5만 ~ 7만. 엄청난 숫자의 병력이 일대 회전에서 대패하고, 도주하는 과정에 추격전을 겪으며 궤멸당한 것입니다. 



이 정도의 패배는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도 찾기 힘들 정도로 큰 패배인데,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시기에도 이 정도 규모의 패배는 거의 없었고, 피해가 심각했던 몽골의 침입이나 왜구의 침입 당시에도 하나하나의 교전은 규모가 크진 않았습니다.

고려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이에 견줄만한 패배는 2차 여요전쟁에서 강조가 주력군 30만을 모조리 잃어버려 고려가 거란군에 쑥대밭이 되고 현종이 도주한 사례 정도고, 그보다 앞선 시기를 찾는다면 후삼국 시기를 제외하면 거의 고구려 말기 주필산 전투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정도입니다. 




위의 기록은 여진족의 기록(을 원나라 승상인 탈탈이 엮어서 만든) 금사의 내용이고, 고려사에 나온 고려 쪽 기록은 어떤지 보겠습니다.





여진이 다시 원근의 부족들을 모아 길주(吉州 : 지금의 함경북도 길주군)를 여러 달째 포위하고서 성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작은 성을 쌓아 여섯 개의 목책을 세우고 맹렬히 공격해오는 바람에 성이 거의 함락되려 하였다.


 
병마부사(兵馬副使) 이관진(李冠珍) 등이 군사를 독려하여 하룻밤 사이에 다시 여러 겹의 성을 쌓고 수비와 전투에 임했으나 싸움이 오래 계속되고 형세가 궁해져 많은 사상자가 났다. 오연총이 그 소식을 듣고 분연히 출정하려고 하자 왕은 다시 지휘권을 부여해 파견했다. 


도중 공험진(公嶮鎭)에 당도했을 때 적이 길을 막고 기습하는 통에 아군이 대패해 장졸들이 무기를 버리고 여러 성으로 흩어져 들어가니, 성이 함락될 때 수없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오연총이 자책하는 장계를 올린 뒤, 윤관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길주로 진군하려 하는 차에 마침 적이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요청해 왔기 때문에 결국 귀환했다. 


재상들이 패전에 대해 문책해야 한다고 건의하자 왕은 사자를 보내 부월을 거두어들였고 오연총은 복명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과 대간들이 문책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자 왕은 그의 관직을 박탈하고 공신의 칭호를 삭제하였다가 얼마 뒤에 수사공(守司空)·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로 다시 임명하였다.



고려사 오연총 열전





여진이 길주(吉州)를 포위했는데 오연총이 그들과 싸우다가 크게 패배하자....(중략)평장사(平章事) 최홍사(崔弘嗣)·김경용(金景庸)과 참지정사(叅知政事) 임의(任懿) 및 추밀원사(樞密院使) 이위(李瑋)가 선정전(宣政殿)에서 왕과 면대하고 윤관과 오연총이 패전한 죄를 물어야 한다고 강경히 주장하자, 왕은 승선(承宣) 심후(沈侯)를 보내 두 사람이 귀환하는 도중에 지휘권을 박탈했으므로, 윤관 등은 복명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재상과 대간이 그들을 치죄하라고 건의했으며, 간관인 김연(金緣)·이재(李載) 등은 대궐문 밖에 엎드려,


“윤관 등이 제멋대로 명분 없는 전쟁을 일으켜 패전하고 나라에 피해를 입혔으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하옥시키소서.”라고 강경하게 간쟁했다.

왕이 심후를 시켜, “두 원수는 명을 받들어 출정한 것 뿐이며, 예로부터 전투에는 승패가 있게 마련이니 어찌 죄가 되겠는가?”라고 설득하게 했다. 

그러나 김연 등이 계속 간쟁하는 바람에, 왕이 어쩔 수 없이 그를 관직에서 물러나게 하고..


- 고려사 윤관 열전








동북 9성을 다룬 전투는 고려와 여진족 모두 자기들이 이긴건 엄청나게 전공을 과장하고 패배한건 축소하는 경향이 있어서 서로간의 전투 기록이 잘 교차되지 않는데, 이 공험진-갈라수 전투의 패배만큼은 금사에서도 확인되고 고려사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고려사에서는 금사만큼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고, 전투에 나선 병력 숫자도 언급되지 않으며, 금사에 나와 있는 2차 전투(공험진에서의 패배 이후 다시 재공격을 하려 했다던가)가 생략되어 있긴 하지만 "뭔가 엄청난 패배를 당했다." 는 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되려 경우에 따라서는 금사의 기록보다 더 적나라한 기록도 있는데, 대패한 병사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와 갑옷까지 모조리 버리고 달아났다는 언급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패배 이후 조정에서는 윤관과 오연총을 탓하는 여론이 가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종종 오해하기도 하는데, 당시 고려 조정의 이른바 '배알없는 사대주의자' 들이 윤관과 오연총의 하늘같은 공적을 일부러 비방하여 동북 9성을 반환하게 하고 전쟁을 멈추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당초에만 해도 동북 9성을 다룬 전투에 대해 우호적인 여론이 많았고(다른것도 아닌 선왕인 숙종의 의지였으니), 전쟁이 길어지며 피폐함이 극심해지는 와중에서도 적어도 "일단 힘들긴 해도 얻은 땅은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정도로, 비판 여론이 대세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이르러 상황이 이렇게 되자, 완전히 여론이 윤관과 오연총을 탄핵하는 의견으로 가득 차 이 두 사람은 장수의 부월을 뺏기고, 돌아온 뒤에 왕을 만나 복명도 하지 못하고 바로 집으로 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도 탄핵을 당합니다. 왠만큼의 패전이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탄핵 될 수는 없으니, 이것도 고려군이 전투에서 매우 큰 패배를 당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찌되었건 전투가 끝나고 윤관과 오연총이 죽일 놈이 된 후, 조정에서는 완전히 계륵이 되어버린 동북 9성을 놓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기껏 얻은 땅을 그냥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유지하려고 해도 유지할 능력이 없다는게 판명된 셈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때마침 여진족 쪽에서 적당히 숙여주고 공경한 태도로 고려를 섬기겠다는 의사 표시를 보였습니다. 여진족에서 그렇지 않더라도 손을 댈 수 없는 상황이었으니, 고려는 마침 잘됬다는 심산으로 "그들의 태도가 몹시 갸륵하여 상을 주겠다." 는 식으로 동북 9성을 모두 여진족에게 반환 했습니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잠시 고개를 숙인 완안부에게 (그들이 금나라로 성장하기전까지) 조공을 받고 상국 취급을 받았으니 명분은 취했지만, 실리적으로 보자면 17만이나 되는 대군을 북방에 투입하고, 또 그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물자를 소모하고도 얻어낸 것이 없었던데다 농사도 망치고 민심도 흉흉해졌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실패 그 자체였습니다.


굳이 위안을 삼자면, 훗날 엄청난 대국으로 성장한 금나라에게 빠르게 군사력 투시도 하고 최후엔 외교적으로 일을 마무리 지으면서, 혹시나 있었을지도 모를 금나라와의 분쟁요소에 있어 미리 한번 힘을 보여주어 그런걸 막게한 예방전쟁이었다... 식으로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이 공험진 - 갈라수 전투는 무력으로 동북 9성을 유지하는 정책의 완벽한 실패를 의미하는 큰 역사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는 전투일텐데, 자세한 전황은 금사에 나와 있고 고려사에서는 "뭔가 지긴 졌는데." 식으로 애매하게 서술되어 있는 탓에 거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동북 9성을 다루는 매체의 대부분의 서술도 한번의 큰 전투 이후 완전히 유지 능력이 무너졌다기 보다는, "동북 9성을 설치했으나 여진족들의 저항이 거세서 분쟁을 겪게 되자 고려는 이를 돌려주게 된다." 로 좀 두리뭉술하게 언급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잘 모르고 보면 정말 사력을 다해 유지하려 했으면 힘들긴 해도 충분히 지킬 수 있었는데 뭣 모르는 놈들이 반대해서 유지를 못했다는 식으로 보일 공산도 있어서... 


실제로는 수만 대군이 대패한 상황이니 의지를 떠나 유지할 방법이 더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여진족의 입장에서보자면, 뒷날의 우리 입장에서는 입을 쩝쩝 다시면서 "아쉬운 일이었다!" 라고 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당장 거기서 살고 있던 여진족 입장에서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내 집과 내 터전을 빼앗아간 침략자" 를 상대로, 포기하지 않고 맞서 싸워 불굴의 의지로 항전한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둔 일이었다,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관점을 바꿔서 본다 치면....




이 전쟁은 여진족들에게 있어서 또다른 의미가 있었는데, 그전까지 흩어져 있던 여진족들이 이때 한번 서로 뭉치게 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후 요나라와의 전쟁이 벌어지자 당초에 완안부를 제외한 여진족들은 "설마 우리가 감히  거란을 이길 수 있을까." 하고 관망하고 있었지만 아골타가 한번 승리를 거두자 이후에는 구름처럼 몰려들어 여진족의 규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후 대제국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순식간에 북중국을 차지한 금나라가 탄생하는 밑거름이 되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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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보니 송나라는 한세충이 있었죠. 사묘아리와 척준경, 한세충 이 셋이 어떨지 흥미진진하네요
출처 http://mlbpark.donga.com/mp/b.php?p=1&b=bullpen&id=201706190005225347&select=&query=&user=&site=&reply=&source=&sig=h6jjSg21g3HRKfX@hca9Sf-gKml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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