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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납부회피 척결과 부패 척결의 성공 사례: 청나라의 옹정제
게시물ID : history_286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깜장핀
추천 : 6
조회수 : 917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8/14 17:0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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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어쩌다가 엔하위키  글을 읽다가
요즘 시대(?) 에 시사하는 바가 많은 글을 찾아서 공유 및 정리해봅니다~


제가 이걸 쓰게된건 달랑 12년 반쯤 재위하는 동안에 
세금납부 회피를 척결하고 관료 사회의 부정부패를 척결하는데에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시사하는 바가 있을 것 같아요.

게시판을 바르게 찾아온 것인지 좀 -_-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1. 소개:  청나라 5대 황제 옹정제 

4대 황제인 강희제와 더불어 명군으로 추앙받는 황제네요.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thumb/9/99/Portrait_of_the_Yongzheng_Emperor_in_Court_Dress.jpg/358px-Portrait_of_the_Yongzheng_Emperor_in_Court_Dress.jpg
외부이미지


중국사에서 제갈량과 쌍벽을 이루는 워커홀릭이었다고 합니다.


재위기간은 12년 반  정도... (1722년 12월 27일 ~ 1735년 10월 8일)

황제다보니 후계자 다툼과 권력의 경쟁자를 제거하는 일 뿐만 아니라 사상통제를 하는 일들-_- 도 있었습니다...

다른 자세한 부분은 엔하위키의 해당 항목을 읽어주세요. --> (https://mirror.enha.kr/wiki/%EC%98%B9%EC%A0%95%EC%A0%9C)



2.  향신들에 대한 탈세 척결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이상한 조세제도로 인한 불공평한 세금부담에 대해 말이 많죠....
게다가 요리조리 탈세하는 경우도 더러 보이고 있습니다.


옹정제 시대의 탈세는 지방의 유지들이 관리들과 결탁해서 자신들의 세금을 일반 농민들에게 떠넘기는 것이었습니다.

* 기존의 세금 정책
일조편법이라고 하여 복잡하던 과세방법을 개혁한 방법으로  "토지"와 "사람"에 세금을 매기고은으로 납세시킨 나름대로 개선된 방법이었습니다. (부역이나 특산물이 아닌... 조선에서는 꽤 오랫동안 노동력과 특산물 납부를 해야했었죠.)

이 제도는 명나라 시절에 시행되었는데 폐단 또한 만연해 있었습니다.
일조편법의 폐단 - 지방의 유지들이 관리들과 결탁해서 자신들의 납부부담분을 서민들에게 떠넘기기 
=> 못살겠다 싶은 사람들이 도망가서 숨어버림.
=> 세금수입이 줄어듬


* 강희제의 세금정책
도망가서 호구 조사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희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만들었습니다.

강희제 왈: "지금은 태평성세이기 때문에 이후로 늘어나는 정세(개인에게 부과하는 세금)는 세금을 걷지 않겠다!" 

즉, 개인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현재 수준에서 동결해버리겠다고 선언한겁니다.
호구 수에 따른 세금 부담으로부터 도망쳐서 호적 체계에서 벗어나 있던 사람들이 이제 이러한 부담을 지지 않아도 되게 된겁니다.
애를 많이 낳아도 부담도 없고~

하지만, 정세 수취량이 고정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사람은 느는데 세금 수입은 줄어드는 효과가 발생하였습니다.


* 옹정제의 새로운 세금 정책
옹정제는 아버지 강희제가 호기롭게 실시한 정책 때문에 피를 보게 되었는데... 세수는 부족하였기에 다음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음... 그럼, 개인에게 부과했던 세금인 정세를 토지에 묶어서 부과해야겠다!" (탄정입무(攤丁入畝 ))

이러한 새로운 제도를 지정은제(地丁銀制) 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이 내야할 세금이 땅을 가진 사람들에게 묶여 부과되기 때문에 땅부자증세가 되는 꼴이죠...

* 향신들의 반발 
이로인해 1726년 땅가진 사람들이 대거 촛불ㅇ......을 들진 않고 단체로 시위를 하며 항의했고,
상인들에게는 문을 닫으라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땅부자인 향신들 - 중국의 과거에 합격하고 임관하지 않은 채 향촌에서 살고 있는 자 또는 향촌의 퇴직관리나 유력인사 등의 사회 계층들은 끊임없이 지세 납부에 저항했는데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향신들은 "지세를 내면 대장부가 아니다!" 라는 말까지 하면서 향시의 시험에 나가는것을 거부하고, 누군가가 나가면 응시자들의 답안을 뺏어서 찢어버렸으며, 어떤 지역에서는 이들은 단압하여 지세 납부를 거부하며 관과 맞서면서 뻗댔다고 합니다.

향신들은 영향력이 워낙 커 관리들도 다루기가 힘든 존재들이었기에, 순진한 지방관들은 오히려 이들에게 털리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 옹정제의 반발 대처
"옹정제는 아주 단호하고 극렬하게 이에 대응했다. 응시생들이 단체 활동을 한번만 더 벌이면 영원히 응시자격을 박탈하겠다는 교지를 내리고, 산동 지방의 진사, 거인, 수재, 감생 등 1천 4백여명의 공명이 모두 박탈되었다. 불이익을 주거나 벼슬길 자체를 아예 막아버렸고, 지세를 납부하지 않은 사람은 모조리 체포했다. 이런 엄청난 대응끝에 향신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고, 지정은제는 확립될 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이때 중국은 지금보다 더 넓은 주제에 교통도 통신도 극악이라 각 행정구역 경계에 숨어사는 사람을 못잡아내던 때였고, 향신들의 힘이 지방관보다 강한것도 당연한데다, 이미 그놈의 꽌시로 지방관과 향신이 결탁하기 쉬운시대였다. 이를 극복해 낸 것은 그야말로 조세행정에 있어 몹시 철두철미했다고 볼 수 있다. "


즉, 현대로 치면 조세제도 변화에 반항하는 기득권층에 대해 공무원 응시자격 박탈피선거권 박탈을 시킨 것이죠.
또한, 탈세한 것 자체는 불법이기 때문에 체포하고 처벌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공무원이 될 자격 같은 것이 큰 불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생산수단의 소유(기업)를 제한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겠습니다.
아무튼, 최고권력자가 크고 단호한 의지를 가지고 정부가 할 수 있는 대처를 꾸준하고 철두철미하게 해서 달성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최근 정부는 걷기 쉬운 곳에서만 걷으려고 하는데... 많은 사례들이 그러한 정책이 옳지않음을 보이고 있죠.



3. 부정부패 척결

이 부분 또한 최고권력자의 크고 단호한 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 옹정제의 관료 급여제 보완 및 부정부패 해결책


- 기본 제도
먼저, 기존 관리들은 세금을 더 걷어 자기가 일부 가지지 않고는 살 수 없을만큼 박봉이었기 때문에, 봉급을 늘려주었다.
대신, 부패를 저지르는 관리를 가혹하게 처벌했다. 

지정은제를 시행했으므로 땅에서 걷는 세금이 중요한데, 해당 지역의 땅에서 원래 걷을 수 있는 세금이 얼마인지 파악하는 데에 주력하고, 적자가 나면 책임자가 자기 돈으로 채우게 하였다. 


- 세금을 착복한 관리의 경우
조사결과 세금을 착복한 사람이 나오면 직급/인종에 상관없이 처벌하고, 추징금을 납부하기 위해 자기 재산을 털어 메꿔야 했다. 
이는 황제의 가족들에게도 해당되었으며 실제로 강희제의 아들인 황족들마저도 뺏어먹은 세금을 메꾸기 위해 가재도구와 집을 팔아 마련해 바쳤다.

옹정제는 "몰수왕"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각 부와 주현에서 세금을 횡령한 관리들의 재산을 모조리 국고에 집어넣고, 
은닉한 재산은 경매에 붙여서 팔았다. 
지주의 착취로 부당하게 천민을 한 사람은 확실히 조사해서 다시 원래 신분을 회복시키고, 
못된 지주는 심지어 사형까지 시켰다.


- 국고 횡령   및   공직을 이용해 백성의 돈을 갈취한 경우
이전까지의 관행으로는, 횡령죄가 드러나도 횡령금을 채워놓으면 관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옹정제는 이러한 제도의 허점(횡령한 금액을 채워놓기 위해 관리들이 백성들의 주머니를 털어서 돈을 마련함)을 깨달았다. 
옹정제는 즉위하자마자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곧바로 관리들을 파직시켰고, 
옹정제 3년 호남성에서 조사를 시작하자 무려 호남성의 관원들 중 절반 이상이 쫓겨났다. 

허베이 성에서도 3년 이상인 고참 관리들 대부분이 파직으로 밀려났다.

관리가 백성들의 돈을 뺏어먹으면, 그 혜택은 관리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친척들까지 돌아간다. 
옹정제는 횡령 사실이 드러나면 이런 친척들까지 다 털어 재산을 뺏어갔다
그러자 탐관오리들은 자기 가족들까지 안 연루시키려고 꼼짝도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이 대신 횡령금을 배상하는 제도도 없앴다. 
그리고 죄를 추궁받아 자살한 사람마저도 철저하게 털어서 가족들에게 책임을 물었기에, 탐관오리는 자살해도 그 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흠을 보이는 관리는 곧바로 몰아내고, 
후임자는 바로 임명했기에 많은 관리들은 얼마든지 자신을 대신할 존재가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어야만 했다.

비리가 너무나도 심한 관리나 지주는, 배상이고 뭐고 할 것없이 처형시켰다. 
적자로 적자를 메우는 편법을 쓴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 결과
이러한 정책들은 끝내 성과를 내어, 
옹정 10년 적자에 시달리던 하남성은 70만량의 은을 보유하며 완연한 흑자로 돌아섰다. 

뒷날의 역사학자 장학성(章學誠)은 이렇게 평가했다고 합니다.
"옹정제가 관료사회를 개혁하여 기강을 바로잡은 일은, 실로 천년에 1번 있을 만한 쾌거로다!"


정리하자면, 
최고권력자가 현실적인 선을 정확히 파악하고 
잘못이 드러날 경우, 은닉할 수 없도록 징벌적인 원상복구를 천명하고 오랫동안 유지하여 기강을 바로잡았다는 얘기입니다.


국가 통치는 사실 선한 통치자보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통치자가 더 효율적이겠죠.
다만, 현실파악이 안되는 강한 의지를 가진 통치자는 최악의 상황을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출처 옛날에 시사게에 올렸던 글인데 역사쪽이 맞는 것 같아 퍼와봅니다.
http://todayhumor.com/?sisa_575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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