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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권채의 여종학대사건 (부제. 원문 확인의 중요성)
게시물ID : history_287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세실마리아
추천 : 44
조회수 : 2992회
댓글수 : 18개
등록시간 : 2017/08/17 22: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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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글 있는 공게로 갈까 하다가 역사이야기니까 역게로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umorbest&no=1482706&s_no=1482706&page=2

조금 전에 베스트를 보다가 이런 글이 있어서 당황해서 글을 써봅니다.

세종시대 문신인 권채가 사실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라는 펌글인데....

실록을 보면 이는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연쇄살인은 커녕 살인이 일어난 적도 없는데, 심한 학대가 있었었던 것이 어느새 연쇄살인마로 둔갑해 있더군요.

이에 실록에 따라 다시 사건을 살펴볼까 합니다.
(최대한 실록의 한글번역본을 그대로 옮기되, 가독성을 위해 한자는 사람이름을 제외하고는 최대한 없애고, 이해를 돕기 위해 몇몇 단어는 쉬운 단어로 대체하였습니다.)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0일 기사에 따르면
형조 판서 노한(盧閈)이
"신(臣)이 길에서 한 사내종이 무슨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의 형용과 비슷은 하나 가죽과 뼈가 서로 붙어 파리하기가 비할 데 없으므로 놀라서 물으니, 집현전 권채(權採)의 노비인데, 권채가 그의 도망한 것을 미워하여 가두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후략)"


라고 하면서 세종에게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조사를 진행하니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8월 24일 
형조에서
"집현전의 권채는 일찍이 그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여종이 병든 조모를 문안하고자 하여 휴가를 청하여 얻지 못하였는데도 몰래 갔으므로, 권채의 아내 정(鄭)씨가 권채에게 호소하기를, ‘덕금이 다른 남자와 간통하고자 하여 도망해 갔습니다.’ 하니, 권채가 여종의 머리털을 자르고 매질하고는 왼쪽 발에 고랑을 채워서 방 속에 가두어 두고 아내 정씨가 칼을 갈아서 그 머리를 베려고 견주니, 여종 녹비(祿非)란 자가 말하기를, ‘만약 이를 목벤다면 여러 사람이 반드시 함께 알게 될 것이니, 고통을 주어 저절로 죽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하므로, 정씨가 그 말대로 음식을 줄이고 핍박하여 스스로 오줌과 똥을 먹게 했더니, 오줌과 똥에 구더기가 생기게 되므로 덕금이 먹지 않으려 하자 이에 침으로 항문을 찔러 덕금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구더기까지 억지로 삼키는 등, 수개월 동안 침으로 학대하였으니, 그의 잔인함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후략)"


라고 하여 권채가 아내의 거짓말에 덕금을 매질, 감금하자 아내 정씨가 다른 노비의 조언하에 덕금을 잔혹하게 학대하였다고 합니다.
즉, 범행의 주체는 권채가 아닌 아내 정씨였고 권채는 초기 감금 후에는 방관자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여러 조사 끝에 결론을 내리길 


세종실록 37권, 세종 9년 9월 3일
의금부에서
"권채가 첩으로 들인 덕금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두었는데, 그 아내 정씨가 덕금을 질투하여, 머리털을 자르고 똥을 먹이고 항문을 침으로 찌르며 하루 걸러서 밥을 주는 등, 여러 달을 가두어 두고 학대하여 굶주리고 고통받아 거의 죽게 되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장 80, 정씨는 장 90에 해당합니다."
하니, 권채는 직첩을 회수하고 외방에 유배보내고, 정씨는 속장에 처하게 하였다.


라고 하여 결국 범행 주체는 아내 정씨임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권채는 다음날 4일 세종대왕과 대신들이 논의 끝에 유배형은 취소하고 파면 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즉, 학대 방관자가 (물론 이것도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연쇄살인자로 돌변한 소설이 어느샌가 돌고 있는 것이지요. 이래서 항상 원문을 살펴봐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제가 모르는 권채가 연쇄살인을 저질렀다는 야사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권채는 그 이후에도 실록에 계속 등장하면서 업무를 하고, 세종 15년에 간행된 향약집성방의 편찬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하는 등 계속 중용되는데, 세종대왕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를 계속 중용할리는 없으니까요.



또, 이 사건은 오히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을 나타내는 에피소드이기도 합니다.

본 사건을 심문하던 의금부에서 (9년 8월 27일 기사)
"(전략) 그러나 종과 주인 사이의 일로써 형벌을 써서 신문하여 끝까지 캐내는 것은 미편합니다. 다만 권채의 아내 정씨가 가주인 권채의 명령을 듣지 않고 머리털을 자르고 포학하게 하고 곤욕을 준 죄만 형률에 의거함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하며 피해자가 노비인데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필요하냐고 하였지만, 세종대왕께서는

"(전략) 권채의 일은 비록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노비가 스스로 고소한 것이 아니고 국가에서 알고 심문한 것이니, 종과 주인 사이의 일이라고 논하는 것이 옳겠는가. 여러 달을 포학하게 하여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러 잔인하기가 이보다 심함이 없으니, 어찌 국문을 하지 않고 그 실정을 잃을 수 있겠는가. 그 일이 노비에 관계되는 것은 형벌로써 신문하여 다시 추핵하고, 권채가 만약에 참예하여 알았거든 또한 다시 잡아 와서 신문하라."

라고 하며 철저한 조사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며칠 뒤 (29일) 에도 


(전략) 진실로 차별없이 만물을 다스려야 할 임금이 어찌 양민(良民)과 천인(賤人)을 구별해서 다스릴 수 있겠는가. (후략)


라고 하시며 철저한 조사를 계속 독촉하죠.

지금도 툭하면 고위층 비위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공고한 신분제 사회이던 조선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철저한 진상조사를 지시하는 국왕이라니 다시한번 탄복하게 될 뿐입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9년 기사들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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