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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나쁜 왕이라기보다는 실패한 왕으로 봐야 할 겁니다.
게시물ID : history_287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ogenes
추천 : 3
조회수 : 141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9/03 12:52:18
만약에 인조가 반정에 성공해서 왕이 되지 못했거나

인조가 광해군보다 훨씬 빛나는 정치를 펼쳤더라면 말입니다.

광해군에 대해 칭송하는 그 어떠한 역사담론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아마도 그냥 그저 그런왕으로 넘어갔을 수도 있어요. 

사실 광해군의 이미지가 폭군인데

폭군인데도 불구하고 사실상 그가 맘대로 뭘 어찌 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던 왕입니다.

대북에 의해 좌지우지당하면서 욕은 욕대로 처 먹어가면서도 대북을 제어하지를 못했던 왕입니다.

그는 즉위초 부터 왕위에 대한 정통성 시비에 휩싸여 이 문제때문에 줄곧 전전긍긍해야 했던 왕이죠.

이 문제에 코 꿰서 명나라한테도 끌려다녔고, 대북에 의해 또 끌려다녔죠. 그러면서도 자신을 성심으로 보위해 줄 수 있는 친위세력은 또 하나두 만들어내지도 못한 왕이었죠. 

오죽했으면 반정이 일어난 날, 그의 치세에 정권을 전단했던 권신 이이첨의 짓이냐구 물을 정도였죠. 

이러니 결국 반정당한 거죠.

궁궐 덕후라는 평이거나 이런 평을 들으면서 악정을 펼친 왕으로 비판당하지만

그렇다고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여건도 없다 봐야 할 겁니다.

그는 항상 누군가 자신의 보위를 빼앗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서 살았고, 그때문에 아무도 믿지를 못했을 뿐더러, 소북 역시 그를 이용해서 정권을 독점하려고 할 뿐, 진정으로 종묘사직과 백성을 위해 헌신하려는 자들은 절대 아니었죠.

북인의 원로인 정인홍이 왜 직접 전면에 나서 국정을 바로잡으려하지 않았는지는 의문입니다. 

결국 그도 반정후 같은 북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고령의 나이에 참수당하고 말죠. 이게 정인홍의 한계인지 참...

이렇게 보면 중립외교의 달인이니 뭐니 이런 평도 어느 정도는 과대평가된 점이 있다 볼 수 있을 겁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그의 선택이 옳은 것처럼 보이기는 했겠죠. 

강홍립에게 어떤 지시를 내렸을까요?

아마도 시세를 봐서 지혜롭게 대처하라는 정도의 밀지였을 겁니다.

서인정권의 말대로 아예 후금에 항복을 하려고 출정한 건 당연히 아니지요. 중립외교 운운하기 이전에 광해군은 명나라에 코가 꿰인 입장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출병을 않할 수는 없었던 사정이 있는 거지요. 

그럼 광해군이 각잡고 명나라와 함께 힘을 합쳐 후금 여진족을 때려잡자고 했다면 사르후 대전때 조선군이 대단한 역할을 해 낼 수 있었을까요?

사르후전투의 전말을 알고 있는 분들이라면 이건 어림택도 없는 목표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조선군은 작전지휘권이 조선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명나라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모습까지 보이더군요. 뭘 혼자서 독자적으로 항복을 해요? 

명의 전 전선이 총붕괴되는 싯점에서 불시의 습격을 받아 반 이상이 이미 궤멸된 상황에서 아니 그럼 다 죽으란 말입니까?

항복 이외에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죠.

다만 이 덕에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신임을 얻는데는 성공합니다.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았다는 것만 강조들 하는데 대명관계를 돈독히 했다는 점은 대부분 간과하더군요. 하지만 지금 명의 멸망과 청의 천하통일이라는 최종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 후손과는 달리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 점 또한 대단히 중요한 사항이었죠.

이런 점에 대해서조차 인조 정권은 실패하여 명나라로부터 끊임없는 의심을 사게 됩니다. 

왜 광해군 성군설이 나오느냐?

그것은 전적으로 인조 정권의 무능때문으로 봐야 합니다.

그럼 인조정권이 깨끗하기라도 했느냐? 아니니까 문제죠.

정실인사 지독하게 쩔 뿐더러... 특히 왕족들을 너무 챙기다 보니 이때문에 오는 민폐가 아주 작렬했던 게 또 인조 정권입니다. 공신에게 휘둘려 정치는 개판엉망이 되어 버렸고 일어날 필요도 없는 반란까지 겪는 바람에 국방력까지 아주 난장판이 되어 버렸던 게 인조죠.

그런 엉망개판인 인조정권이 병자호란이라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계속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첫째는 청태종의 관용(?) 덕이고

둘째는 숭명반청이라는 소리는 그렇게 요란하게 떠드는 척화유림들이 실제 문제에 대해서는 인조보다 더 꽉막히고 무능했다는 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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