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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한강을 차지하다 – 55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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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역사광황
추천 : 1
조회수 : 87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9/20 22:29:15
백제 성왕이 551년 한강유역을 재점령(http://yellow.kr/blog/?p=2395)했지만 신라가 백제를 공격하여 553년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으로 알고 있다.

백제가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게 된 배경에 대해서는 신라의 기습 공격설이 대표적이지만 백제의 포기설도 있다. 백제의 한성 포기는 『일본서기』의 552년 부분에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라는 내용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한강유역 점령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동맹은 가야지역의 동향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건이었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유역과 가야지역 가운데 어느 곳에 우선순위를 두는가의 문제를 고민해야만 했다. 이에 백제는 가야지역을 확실히 확보하기 위해서 한강유역을 일시적으로 포기하면서, 대고구려전 보다는 대신라전에 매달리게 되었다. (김수태, 백제연구, 2006, 44권, 44호)

당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에서 대해서는 동맹이었지만 가야에 대해서는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52년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8년(서기 552), 장안성(長安城)을 쌓았다.

八年 築長安城
– 장안성(평양성)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639923&cid=43065&categoryId=43065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3년
13년 여름 4월에 전전주승대형(箭田珠勝大兄 ; 야타노타마카츠노오호에)이 죽었다(薨).

5월 무진삭 을해(8일)에 백제, 가야, 안라가 중부(中部) 덕솔(德率) 목리금돈(木刕今敦)과 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를 멸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칙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상주한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또한 황공하신 천황의 영위에 의한 가호가 있을 것이다.”라고 명하였다.
……
이 해에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포기하였다. 그래서 신라가 한성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우두방(牛頭方), 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 백제의 성왕은 왜에게 원병을 요청하는 중요한 이유로 신라와 고구려가 화통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는 464년경에 결렬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왕이 왜의 원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구려를 들먹였던 것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이 기간에 고구려와 신라의 내통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해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 552년이나 553년 초에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견해, 『일본서기』의 기사를 신빙하여 552년5월 이전에 백제가 양국의 내통을 알고 있었다는 견해, 551년 고구려 혜량법사와 거칠부의 관계, 그리고 혜량법사의 신라투항을 밀약의 계기로 보는 견해 등이 있다.



553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4년(서기 553) 봄 2월, 임금이 담당관에게 명하여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누런 빛 용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임금이 기이하다 여기고 절로 고쳐 짓고서 황룡(皇龍)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가을 7월, 백제의 동북쪽 변두리를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

겨울 10월, 임금이 백제왕의 딸을 맞아들여 작은 부인으로 삼았다.

十四年 春二月 王命所司 築新宮於月城東 黃龍見其地 王疑之 改爲佛寺 賜號曰皇龍 秋七月 取百濟東北鄙 置新州 以阿飡武力爲軍主 冬十月 娶百濟王女 爲小妃
– 신주(新州)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300453&cid=40942&categoryId=31682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31년(서기 553) 가을 7월, 신라가 동북쪽 변경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임금의 딸이 신라로 시집 갔다.

三十一年 秋七月 新羅取東北鄙 置新州 冬十月 王女歸于新羅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4년
14년 봄 정월 갑자삭 을해(12일)에 백제가 상부(上部)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와 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보내 군병을 청하였다. style="font-size:>

무인(15일)에 백제의 사신 중부 간솔 목리금돈과 하내부 아사비다 등이 돌아갔다.
……
6월에 내신(內臣 ; 우치노오미)[이름이 빠졌다.]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양마 2필, 동선(同船) 2척, 활 50장(張), 화살 50구(具)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칙을 내려 “요청한 군대는 왕이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명하였다. 또한 따로 칙을 내려 “의박사(醫博士), 역박사(易博士), 역박사(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라. 지금 위에 열거한 직종의 사람들은 바야흐로 교대할 시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한 복서(卜書), 역본(曆本)과 여러 가지 약물(藥物)도 함께 보내라.”고 명하였다.
……
8월 신묘삭 정유(7일)에 백제가 상부(上部) 나솔(奈率) 과야신라(科野新羅)와 하부(下部) 고덕(固德) 문휴대산(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신(內臣) 덕솔 차주(德率次酒)와 임나의 대부(任那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미이거(彌爾居)의 일을 아뢰고, 엎드려 은조를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듣자니 신라와 박국(狛國)이 통모하여 ‘백제와 임나가 자주 일본으로 사신을 보내고 있다. 생각컨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려는 것이다.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을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꼴이 된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략이 이와 같습니다. 신 등이 이를 듣고 매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뢰는 것입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전군과 후군을 계속 파견하여 구원해 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 가을까지는 해외[海表] 미이거(彌爾居)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파견군이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 비용은 신이 충당할 것입니다. 임나에 도착하여도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다. 만일 (임나가) 지급할 수 없다면 신이 반드시 충당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한편 적신(的臣)이 삼가 천칙을 받고 와서 신의 나라[臣蕃]를 위무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태만하지 아니하고 정사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해외[海表]의 여러 번(蕃)들은 모두 그의 선정을 칭송하여 영원히 해표의 여러 나라에 선정을 베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도하는 바입니다. 이제 임나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의 자애로운 마음으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나를 다스리시길 엎드려 바랍니다. 또한 바다 밖의 여러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황에게 지급받아 강한 적을 막았습니다. 천황께서 자애로운 마음으로 활과 말을 많이 내려주시기를 엎드려 바랍니다.”라고 말하였다.

겨울 10월 경인삭 기유(20일)에 백제 왕자 여창(餘昌)[명왕의 아들 위덕왕(威德王)이다.]이 나라 안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여 고구려로 향하였다. 그는 백합(百合)의 들판에 요새를 쌓고 군사들과 함께 먹고 잤다. 그런데 이 날 저녁 바라보니 넓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거의 없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때 갑자기 북과 피리 소리가 들렸다. 여창이 크게 놀라 북을 쳐서 맞대응하면서 밤새 굳게 지켰다. 새벽녘에 일어나 넓은 들판을 보니 마치 푸른 산과 같이 군기가 가득하게 덮고 있었다.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기(騎), 작은 징[뇨(鐃)자는 잘 알 수 없다.]을 꼽은 자 2기, 표범 꼬리로 장식한 자 2기 등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와 있다.’고 말하였다. 어찌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속히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알고 싶다.”라고 말하였다. 여창이 “성은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군기[標]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고 머리를 창끝에 꽂아 들고 돌아와서 군사들에게 보였다. 고구려군 장수들은 격노하였다. 이때 백제의 환호하는 소리가 천지를 가르는 듯하였다. 또 부장이 북을 치며 속공하여 고구려왕을 동성산(東聖山) 위에까지 쫓아버렸다.
– 내신(內臣) : 『일본서기』에서는주로 왕의 측근으로 집정관적인 성격을 가진 자에게 붙는 직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동선(同船) : 많은 목재를 조립하여 만든 큰 배를 일컫는다.
– 이 시기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고구려왕이 백제와의 전투에 출장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아 전쟁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동성산(東聖山) : 평양 동북쪽에 있는 大聖山을 가리킨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 진흥왕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당시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이자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돌아가셨다.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第二十四 眞興王卽位 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 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http://yellow.kr/blog/?p=2400 에서 발췌

출처 http://yellow.kr/blog/?p=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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