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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 백제 성왕의 전사 - 55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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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역사광황
추천 : 1
조회수 : 168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09/23 11:09:30

백제와 신라 사이에 벌어진 관산성(管山城)전투는 두 나라 미래의 명운을 결정짓는 한판의 승부였다. 이 전투의 중요성을 보면 작지가 않은데, 백제는 중흥의 기틀을 빼앗기고 신라는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다지는 그런 역사적 사건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이 적지 않게 나왔음은 그를 방증한다.

554년의 관산성 전투와 관련한 기록 가운데 풀리지 않은 채 궁금증은 싸움이 마무리될 즈음에 일어난 백제 성왕(聖王)의 마지막 처형 장면이다. 거기에는 사로잡은 성왕의 목을 치려는 신라의 전사(戰士)가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둔 성왕(聖王)과 나누는 대화 속에 신라의 국법(國法)을 운위(云謂)하고 있다. 이제 전사(戰士)는 성왕이 죽어야만 하는 이유로서 신라의 국법을 어겼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무엇 때문에 전사가 포로로 잡은 백제 성왕의 목을 베려 하면서 굳이 신라의 국법을 어겼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내세우는가, 이것은 지금까지 풀지 못하고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대상이다.


※ 관산성 전투 전후의 관련된 연표를 다음과 같이 작성해 보았다:

552년 5월 : 백제, 왜에 원병을 요청하며 고구려와 신라의 화친을 언급함

552년 후반 : 백제, 한성과 평양 포기 -> 신라가 한성을 차지

553년 7월 : 신라, 신주(新州, 경기도 광주)) 설치

553년 10월 : 백제-고구려 백합야 전투 / 백제 성왕의 딸이 신라로 시집감

554년 5월 : 왜, 백제에 파병

554년 7월 : 백제-신라의 관산성 전투 시작, 초반 신라의 고전

554년 9월 : 백제, 신라의 진성(珍城, 충남 금산?) 공격

554년 겨울 : 고구려, 백제 웅천 공격

554년 12월 : 관산성 전투, 성왕 사망, 백제 · 대가야 · 왜 연합군 신라에 궤멸

555년 2월 : 백제, 성왕의 사망을 천황에게 보고


그리고 당시의 대외적인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혼란과 고구려, 신라, 백제, 가야, 왜의 충돌은 무관하지 않다.

- 534년 북위의 분열

- 548년 남조의 양, 후경의 반란

- 550년 북제의 성립

- 551년 남조의 양, 후경이 황제에 오르지만 552년에 전투 중 사망

- 551년 돌궐의 독립

- 556년 북주의 성립


* yellow의 세계사 연대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550


그 당시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료를 찾아 보았다. 아래에 언급한 『일본서기』는 720년에 완성되었으며 <동북아 역사재단>의 번역본을 참조하였고, 삼국사기는 1145년에 완성되었으며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를 참조하였다.



554년


※ 삼국사기 제4권 신라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第四) - 진흥왕

15년(서기 554) 가을 7월, 명활성(明活城)1을 보수하여 쌓았다.

백제 왕 명농(明穠, 성왕)이 가량(加良)2과 함께 관산성(管山城)에 쳐들어왔다. 군주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金武力)3이 주의 병사를 이끌고 나아가 어우러져 싸웠는데, 비장(裨將)인 삼년산군(三年山郡)4의 고간도도(高干都刀)가 빠르게 공격하여 백제 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서 크게 이겼다. 좌평(佐平) 네 명과 병사 2만9천6백 명의 목을 베었으며, 돌아간 말이 한 마리도 없었다.

十五年 秋七月 修築明活城 百濟王明穠與加良 來攻管山城 軍主角干于德伊飡耽知等 逆戰失利 新州軍主金武力 以州兵赴之 及交戰 裨將三年山郡高干都刀 急擊殺百濟王 於是 諸軍乘勝 大克之 斬佐平四人 士卒二萬九千六百人 匹馬無反者

- 명활성(1) :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 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보이므로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알 수 있다.

- 가량(2) : 가야(伽倻)의 다른 이름.

- 김무력(3) : 김유신(金庾信)의 조부이고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仇衡王)의 셋째 아들로 532년(법흥왕 19)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자 부왕과 왕모 및 형 김노종(金奴宗), 김무덕(金武德) 등과 함께 신라에 투항하였다. 553년(진흥왕 14) 진흥왕이 백제와 연합으로 고구려의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이어 백제의 영토까지 점령하여 한성(漢城)을 중심으로 신주(新州)를 설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아찬(阿湌)의 관등으로 신라의 경기도 지역을 통치하는 신주(新州: 廣州)의 책임자인 군주(軍主)가 되었다.

- 삼년산군(4) : 신라의 상주(尙州) 삼년군(三年郡)이다. 현재 충북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大也里)와 어암리(漁岩里) 사이에 있다.




※ 삼국사기 제19권 고구려본기 제7(三國史記 卷第十九 高句麗本紀 第七) - 양원왕

10년(서기 554) 겨울, 백제의 웅천성(熊川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했다.

12월 그믐날, 일식이 있었다. 물이 얼지 않았다.

十年 冬 攻百濟熊川城 不克 十二月晦 日有食之 無氷




※ 삼국사기 제26권 백제본기 제4(三國史記 卷第二十六 百濟本紀 第四) - 성왕

32년(서기 554) 가을 7월, 임금이 신라를 습격하고자 몸소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狗川)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혼전 중에 임금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聖)이라 하였다.

三十二年 秋七月 王欲襲新羅 親帥步騎五十 夜至狗川 新羅伏兵發與戰 爲亂兵所害薨 諡曰聖




※ 일본서기 권 제19 - 흠명천황(킨메이 천황)

15년 봄 정월 무자삭 갑오(7일)에 황자 정중창태주부존(渟中倉太珠敷尊 ; 누나쿠라노후토타마시키노미코토)을 황태자로 삼았다.

병신(9일)에 백제가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1와 전부 시덕 왈좌 분옥(施德曰佐分屋)2 등을 축자(筑紫 ; 츠쿠시)에 보내 내신(內臣)3과 좌백련(佐伯連 ; 사에키노무라지) 등에게 "덕술 차주와 간솔 색돈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臣) 등[신 등은 내신을 말한다.]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게 말은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한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대강이나마 듣고 미리 군영의 성벽을 쌓고자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이제 듣자니 황공하신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축자에 가서 보내 줄 군대를 환송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에 없이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주실 군사를 정월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내신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구원군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라고 대답하였다.

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 장군 삼귀(杆率將軍三貴)와 상부 나솔 물부오(奈率物部烏)4 등을 보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덕솔(德率)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를 바치면서 이전의 번(番)인 나솔(奈率) 동성자언(東城子言)과 교대시키고, 오경박사 왕류귀(王柳貴)를 고덕(固德) 마정안(馬丁安)과 교대하도록 하였다. 승려 담혜(曇慧) 등 9인은 승려 도침(道深) 등 7인과 교대시켰다. 그리고 따로 칙을 받들어 역박사(易博士) 시덕(施德) 왕도량(王道良),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 의박사(醫博士) 나솔(奈率) 왕유릉타(王有㥄陀), 채약사(採藥師) 시덕(施德) 반량풍(潘量豊), 고덕(固德) 정유타(丁有陀), 악인(樂人) 시덕(施德) 삼근(三斤), 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 계덕 진노(進奴), 대덕(對德) 진타(進陀)를 바쳤다. 모두 요청에 따라 교대시켰다.

3월 정해삭(1일)에 백제의 사신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 등이 돌아갔다.

여름 5월 병술삭 무자(3일)에 내신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로 갔다.

겨울 12월에 백제가 하부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 신(臣) 명(明)과 안라의 여러 왜신들, 임나의 여러 나라의 한기들이 아룁니다. 사라(斯羅)5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박(狛)6과 마음을 같이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爾居)7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유지신(有至臣 ; 우치노오미)8 등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신라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황이 보낸 유지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12월 9일에 신라를 공격하도록 보냈습니다. 신이 먼저 동방령(東方領) 물부막가무련(物部莫哥武連 ; 모모노베노마카루노무라지야)을 보내 그 방(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유지신이 거느리고 온 죽사물부막기위사기(竹斯物部莫奇委沙奇)는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으로 이 달 9일 유시(酉時)에 성을 빼앗아 불태워버렸습니다. 단촐한 사신을 배로 급히 파견하여 아룁니다."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만약 신라 뿐이라면 유지신이 데리고 온 군사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박(狛)과 신라가 함께 힘을 합하였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 ; 츠쿠시노시마)9 근처에 있는 여러 군사들을 보내 신의 나라를 도와주시기를 엎드려 청합니다. 또한 임나를 도울 수 있다면 일은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주상하였다. 그리고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은 정말 급해서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는 것입니다. 좋은 비단[錦] 2필, 탑등() 1령, 도끼 3백 구,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2명과 여자 5명을 바칩니다. 변변치 않아서 죄송할 따름입니다."라고 주상하였다.

여창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모의하니 기로(耆老)10가 하늘이 아직 우리와 함께하고 있지 않습니다.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언하였다. 여창이 "늙었구려, 무엇을 겁내는가.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는데 어찌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신라국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11에 성책을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은 여창이 계속된 전쟁에 오랫동안 쉬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였다.어버이의 자애로움도 펼치지 못하고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도 효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몸소 가서 그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몀왕이 친히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징발하여 길을 차단하고 격파하였다. 또한 이때 신라에서는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12[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놈"이다. 명왕은 유명한 군주이다. 이제 비천한 노비에게 유명한 군주를 죽이게 하자.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얼마 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도록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명왕은 "왕의 머리를 노비의 손에 건네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고도는 "우리나라 법에는 맹약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노비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말하였다[어떤 책에는 "명왕이 호상(胡床)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곡지(谷智)에게 차고 있던 칼을 풀어 주며 베도록 하였다."고 한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까지 사무쳤다. 돌이켜 헤아려 보아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고 하면서 머리를 내밀어 베도록 하였다. 고도는 목을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어떤 책에는 "신라는 명왕의 두골을 남겨 매장하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춰 백제에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다. 이름하여 그 관청을 도당(都堂)이라 한다."고 한다.]. 여창은 마침내 포위당하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축자국조(筑紫國造 ; 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13라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앞으로 나아가 활시위를 당겨 신라의 기병 중 가장 용감한 자를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은 예리하여 말안장 앞의 전륜(前輪)과 후륜(後輪)을 관통하여 갑옷의 옷깃까지 다다랐다. 계속해서 쏜 화살은 비 오듯이 줄기차게 이어져 포위한 군대를 퇴각시켰다. 여창과 여러 장수들은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갈 수 있었다. 여창은 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며 안교군(鞍橋君 ; 쿠라지노키미)이라 높여 불렀다[안교는 여기서는 구라니(矩羅膩 ; 쿠라지)라고 한다.]. 이때 신라 장수들은 백제가 피로하고 지쳤음을 알고 드디어 전멸시키고자 하였다. 그러자 한 장수가 "안 된다. 일본 천황이 임나 문제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 관가를 멸망시킨다면 반드시 후환이 따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만 중지하였다.

- 시덕문차(1) : 중부 목리 시덕 문차(木刕施德文次), 목리는 백제의 복성이고 문차가 이름이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543) 3월에 귀국한다. 『일본서기』에서는 '부+성+관등+이름'의 표기와 '부+관등+성+이름'의 두 계열의 백제인명 표기를 확인할 수 있다.

- 전부 시덕 왈좌 분옥(前部施德曰佐分屋) (2) : 왈좌를 백제의 성으로 보고 前部施德曰佐分屋을 백제인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으나, 왈좌씨는 도래계 씨족으로서 왜국에도 있었으므로 그는 왜계 백제관료였을 가능성이 높다.

- 내신(3) : 『일본서기』에서는주로 왕의 측근으로 집정관적인 성격을 가진 자에게 붙는 직위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 나솔물부오(4) : 물부씨계 왜계 백제관료로 이름은 烏이다.

- 5 : 사라(斯羅)란 신라의 비칭이다. 『양직공도』백제국사조에서는 백제사신이 양(梁)나라에 가서 백제 주변에 있는 작은 나라들을 열거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기록에서도 신라를 斯羅라 칭하고 있다.

- 6 : 박(狛)은 고구려를 뜻한다.

- 7 : 미이거(彌爾居)는 관가(官家, 궁궐)를 뜻한다.

- 8 : 내신(內臣)과 동일인물

- 9 : 현재 일본 규슈(九州)를 가리킨다.

- 10 : 기로(耆老)는 당시 백제 조정의 원로 대신들을 가리킨다.

- 11 : 구타모라(久陀牟羅)는 현재 충북 옥천군 군서면의 한 촌으로 추정된다. 牟羅는 村의 의미이다.

- 12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군 裨將인 삼년산군의 고간도도(高干都刀)의 습격으로 백제성왕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苦都는 都刀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高干은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3등에 해당하는 高干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에 천민인 사마노(飼馬奴)와 신분상 큰 차이를 보인다.

- 13 : 축자국조(筑紫國造)는『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 5월조에 內臣이 이끌고 온 수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三國遺事 卷第一 紀異 第一) - 진흥왕

문무왕 8년 (668년) 

제24대 진흥왕은 왕위에 올랐을 당시 나이가 15세였으므로 태후가 섭정을 하였다. 태후는 곧 법흥왕(法興王)의 딸이자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였다. 왕은 임종할 때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고 돌아가셨다.

승성(承聖) 3년(서기 554) 9월에 백제의 병사가 진성(珍城)1에 쳐들어와서 남녀 39,000명과 말 8,000필을 빼앗아갔다. 이에 앞서 백제는 신라와 군사를 합쳐 고구려를 치려고 하였지만, 진흥왕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내 어찌 고구려의 멸망을 바랄 수 있겠느냐?”

그리고는 이 말을 고구려에 전하였다. 고구려는 이 말에 감동하여서 신라와 사이좋게 지내게 되었다. 그러자 백제가 신라를 원망하여서 이렇게 침범한 것이다.

第二十四 眞興王卽位 時年十五歲 太后攝政 太后乃法興王之女子 立宗葛文王之妃 終時削髮 被法衣而逝

承聖三年九月 百濟兵來侵於珍城 掠取人男女三萬九千 馬八千匹而去 先是 百濟欲與新羅合兵 謀伐高麗 眞興曰 國之興亡在天 若天未厭高麗 則我何敢望焉 乃以此言通高麗 高麗感其言 與羅通好 而百濟怨之 故來爾

진성(1) : 충남 금산?



※ 삼국사기 제43권 열전 제3(三國史記 卷第四十三 列傳 第三) - 김유신

문무왕 8년 (668년)

문무대왕이 영공과 함께 평양(平壤)을 격파한 다음 남한주(南漢州)에 돌아와서 여러 신하들에게 말했다.

옛날 백제의 명농왕(明穠王, 백제 성왕)이 고리산(古利山)1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 했을 때 유신의 조부 각간 무력(武力)이 장수가 되어 그들을 맞받아쳐 이겼으며, 승세를 타고 그 왕과 재상 네 명과 사졸들을 사로잡아 그들의 세력을 꺾었다. 또한 유신의 부친 서현(舒玄)은 양주(良州) 총관이 되어 여러 차례 백제와 싸워서 예봉을 꺾음으로써 그들이 우리 국경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로써 변경의 백성들은 편안히 농사와 양잠에 종사하였고, 임금과 신하는 나라에 돌보는 데1) 근심이 없게 되었다. 지금은 유신이 조부와 부친의 유업을 계승하여 나라의 안위를 맡은 중신이 되었다. 그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하였고, 들어오면 정승의 일을 하였으니 그 공적이 매우 크다. 만일 공의 가문에 의지하지 않았더라면 나라의 흥망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직위와 상을 어떻게 하여야 옳겠는가?”

여러 신하들이 말했다.

“저희들의 생각이 참으로 대왕의 뜻과 같습니다.”

이에 유신에게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의 직위를 제수하고, 식읍을 5백 호로 하였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전에 오를 때도 추창(趨蹌, 예법에 맞게 허리를 굽히고 빨리 걷는 것)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를 보좌하는 이들에게도 각각 직위를 한 급씩 올려 주었다.

文武大王旣與英公 破平壤 還到南漢州 謂群臣曰 昔者 百濟明穠王在古利山 謀侵我國 庾信之祖武力角干 爲將逆擊之 乘勝俘其王及宰相四人與士卒 以折其衝 又其父舒玄 爲良州摠管 屢與百濟戰 挫其銳 使不得犯境 故邊民安農桑之業 君臣無宵旰之憂 今 庾信承祖考之業 爲社稷之臣 出將入相 功績茂焉 若不倚賴公之一門 國之興亡 未可知也 其於職賞 宜如何也 群臣曰 誠如王旨 於是 授太大舒發翰之職 食邑五百戶 仍賜輿杖 上殿不趨 其諸寮佐 各賜位一級

1 : 고리산은 환산(環山)이므로 『일본서기』의 함산성(函山城)이 있던 곳과 같을 듯




http://yellow.kr/blog/?p=2414 글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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