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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역사에서 영화나 드라마 소재로 삼을만한것 중에 이건 어떤가요?
게시물ID : history_289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쎄지고싶냐?
추천 : 2
조회수 : 682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10/05 10:14:48



발해 2대왕 대무예가 배신자인 자기 동생 대문예를 죽이기 위해
당나라 장안으로 급파한 자객단을 그린 작품 어떤가요?

대무예가 한창 영토확장에 열을 올리던 시기
발해의 압박에 고민하던 흑수말갈이
당나라와 손을 잡으려하자

이에 분노한 대무예가 동생 대문예를 토벌대대장으로 임명하지만
대문예는 지금 우리 발해는 과거 고구려때보다 인구가 몇배나 적은데
어찌 당과 대적하려 하느냐며 왕인 형의 뜻을 따르려 하지 않죠.

어쨋든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해버리고
열받은 대무예가 당현종더러 동생을 대신 죽여달라고 요구하자
당현종은 안서지방인가 당나라에서도 완전 외지로 귀양보냈다고 하지만
그게 뻥인게 발해세작을 통해 뽀록나게 됩니다.

대무예는 외교문서로 당현종에게 
" 대국이면 대국답게 행동해라. 어찌 뻥치고 그러냐? 내가 예전에 요구했던대로
죽여라"라는 내용의 분노와 조롱의 심정을 담은 외교문서를 전달하지만
당현종은 끝끝내 묵살해버리고 대문예를 이용해 발해의 왕위계승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하죠.

이에 더욱 위협을 느낀 대무예는 대문예를 죽이기 위해 자객들을 당나라 동도였던 낙양으로 잠입시킵니다.

당시 대문예는 낙양에 머물고 있었는데
사건의 배경이 됬던 733년 1월 겨울 낙양의 천진교 주변에는
온통 술집들로 사람들이 붐볐던 번화가 중에 번화가.

대문예는 망명과 피신으로 인한 고독과 두려움을 그곳에서
당나라 호위무사들속에 둘러쌓여 술로써 홀로 달래고 있었을 겁니다.

이런 대문예의 동태가 오랫동안 그를 예의주시하며 추적해오던 발해의 세작을 통해
발해 조정으로 전달됬을 것이고
더이상 대문예를 내버려두면 안되겠다고 판단한 대무예는
발해에서도 제일 가는 무사들로 자객단을 꾸려 낙양으로 급파했겠죠.

물론 이 자객단에는 대문예의 얼굴을 아는자가 필요했을 터이고
때문에 발해 왕가의 일족이거나 어렸을때부터 그와 함께 자란 고위층 귀족이거나
발해군대 고위급 장수로서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통솔을 맡았을 겁니다.

드디어 낙양으로 잠입한 자객단.

그러나 자객단은 대문예의 위치를 알아냈다하더라도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유는 대문예의 정치적 외교적 중요성을 너무나 잘알고 그를 최대한 이용하려는
당나라 조정이 발해로부터 그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숫자의 호위무사로 상시 철통경호를 했을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때문에 자객단은 그를 암살할 절호의 기회를 노리던중
드디어 733년 1월 깊은밤 그가 천진교를 지난다는 첩보를 미리 알아내어
그곳에 상인이나 행인으로 위장해있다가
그가 천진교를 지나가자 다리위에서 무협 액션 활극이 벌어집니다.

아무리 못해도 상당한 숫자의 호위무사들을 뚫어야했기에
천진교에 나타난 자객단의 숫자는 족히 수십명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들은 대문예가 다리위에 그모습을 보이자 
누군가의 신호로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호위무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을 것이고 
이들중 누군가는 "네이놈 우리 고려의 배신자 대무예! 내칼을 받으라"하며
외쳤을 겁니다. (당시 발해인들은 자기네 나라를 고구려도 아닌 고려라 불렀음)

그러나 목숨을 건 자객단의 혈투에도 불구하고
대문예는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나와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대문예를 죽이기위해 혈투를 벌이던 자객단은 현장에서 호위무사들의 칼에
죽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암살시도소식에 분노한 현종의 명령에 의해 낙양 하남부란 곳에 은신해 있던
남은 자객단이 체포되어 끝내 공개처형당하게 되고 맙니다.


영화화시킨다면 견자단 주연의 8인 최후의 결사단과 분위기에선 비슷하지만 
정반대의 설정의 작품이 되겠네요.

고대에 민족주의를 대입하긴 뭐하지만
당시 발해인과 당나라인간에는 과거 고수 고당전쟁 그리고 고구려 멸망과
733년이면 당나라에 끌려와 한창 고통받던 고구려유민들과 그 아들,딸 손자 손녀들이
학대와 차별을 당하며 살던 시기로 고구려사람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은 어느정도 남아있을수
있던 시기이기때문에 민족감정도 존재했고 나라의 배신자를 처단해야 한다는 사명감
 작전에 실패하발해로 돌아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묻어나는 작품.

이와함께 발해의 배신자 대문예에 대한 감정이입.
나는 발해의 배신자가 아니다.
오히려 고구려때와는 비하기에도 민망한 적은 숫자의 발해사람들을 위해
발해의 생존을 위해 당과의 화친하려는 현명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나는 발해를 사랑한다.
그러나 시대가 나를 내뜻과는 달리 반역자로 만들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부인 아이들이 사는 발해로 돌아가고 싶어
매일밤을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린다.

이런 대문예와.. 발해시절부터 죽마고우처럼 지내온 죽마고우이자 자객단의 수장이
733년 1월 낙양 천진교에서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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