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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역사소설] 쾌남 봉창! #10
게시물ID : history_289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괴발살!
추천 : 4
조회수 : 33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0/13 23: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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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유치장에서 9일


아참. 한 가지 까먹고 말 안한 게 있어.

예전에 말이야. 나 때는 예비검속이라는게 있었거든.

쉽게 말하면 국가에 무슨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위험인물로 보이는 사람들을 미리미리 잡아 넣는거야. 요새는 임의동행이라는 것도 있지만, 그마저도 불법의 소지가 많다고 하지?


근데 이건 임의동행하고는 많이 달라.

임의동행이면 최소한 물어보는 시늉이라도 하는데 예비검속은 말이지, 그런 것도 없고, 사람을 잡는데 무슨 기준 같은 것도 없어.

-나라에 큰 행사가 있다. 그러니까 미리 이상해 보이는 애들 왕창 다 잡아다가 정해진 할당량 꽉 채워라. 오케이?


이게 다야.

근데 행사까지 시간은 별로 없지. 무조건 경찰 한 명당 몇 명 잡아들여라, 이런 계산이 나오니까, 경찰이라고 별 수 있나. 그냥 월급쟁인데.

위에서 까라면 까라는 대로 했겠지.

재수가 없으려니까 내가 딱 그 케이스에 걸린 거야.

임시경비본부에 붙들린 채로 잠시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아예 정식으로 경찰소로 데리고 가더라고. 직장에서 하도 진급을 못했더니 경찰이 내 소원을 대신 풀어준건가? 이런 걸로 진급을 했지 뭐야. 젠장!


경찰서에 가보니 나처럼 마구잡이로 잡혀온 사람들이 수십 명은 더 있었어.

경찰서도 소란한 건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경찰이 지켜보고 있으니까 이런저런 항의도 할 수 있었지.

근데 괜히 경찰 건드려서 좋을 건 없으니까 난 항의는 안하고 선처를 바랬어.

왜 죄도 없는데 선처를 바랬냐고? 그땐 말이지 정말 이랬다고.

-너, 죄 있지? 그냥 인정해라. 인정만 하면 형량도 깎아주고 잘 해줄게.

-난 죄 없는데요? 뭘 인정해요?

-넌 확실히 죄가 있어.

-그러니까, 무슨 죄요?

-지금 막 나한테 대든 죄!


뭐. 그 다음부터야 뻔하지. 비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 거지.

나는 그 와중에서도 아주 침착하게 물어봤어.

-조선에서도 못 본 임금얼굴이에요. 일본에 온 김에 천황폐하 얼굴 꼭 한번 보고 싶었어요. 직장도 쉬고 왔는데, 이렇게 붙잡혀만 있다가는 볼 수 도 없잖습니까. 사정 좀 봐주세요.

-어, 별일 없을 거야. 금방 나가게 해 줄 테니 일단 기다려보라고.


그나마 멀쩡한 대화를 했다 싶었는데, 사실 대화는 이게 다야.

경찰이 별 일 없을 거라는데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나.

그때까지만 해도 난 좀 느긋했어. 그야, 난 아무런 죄가 없으니까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아쉬운 데로 천황행차를 볼 수가 있다는 기대가 있었거든.

기대는 개뿔!


날이 어둑어둑 해 지니까 그때서야 이 사람, 저 사람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더라고.

거기에 내 이름은 없었어. 나야 원래 성격이 느긋하니까 걍 그런갑다 했지.

하여간 그렇게 유치장에서 밤을 새야만 했어.

남들은 잠도 못자고 이리저리 뒤척이면서 무슨 잠꼬대까지 해 대는데 난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어. 다음 날 아침쯤 되면 오해가 다 풀려서 확실하게 풀려날 거란 생각에 난 유치장에서도 두다리 쫙 뻗고 푹 잤다고. 난 정말 아무 죄가 없으니까.

-어우. 잘 잤다. 이제 슬슬 보내주겠지?

원래는 이래야 하는데 그 다음날 아침도 똑같아.

이런 저런 사람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만 쏙 빠져있네?


이쯤 되면 좀 껄끄럽기는 해도 항의는 해 봐야겠지?

근데 말야. 천황이 온다고 경찰서도 온통 난리법석이라 유치장 문에 자물쇠만 걸려있고 경찰은 한 사람도 안 보이더라고. 이러니 항의를 할래야 할 수가 있어야지. 경찰이 하나도 없는데.

가만 보니까 어제 밤까지만 해도 제법 시끄럽던 유치장도 한산해.


왜냐고? 유치장에 딸랑 세명만 남았거든.

-뭐 하다 잡혀왔수?

-천황폐하 한번 뵈러 왔다가 어쩌다 이렇게 됐수.

-그러는 당신은 왜?

-가만히 걸어가고 있는데 내가 일본말을 잘 못하니까 그냥 막...

-거긴 또 왜 잡혀 온 거요?

-나? 난 도박하다가 잡혀왔는데? 웬 천황폐하?


조선인이 두 명에, 도박으로 잡혀온 일본인 범죄자 한명.

이게 유치장에 남은 사람 전부야.

아. 정말 억울하더라고.

일본인은 상습도박범이니까 유치장에 갇혀 있는 게 맞겠지. 근데 말야. 없는 형편에 천황 얼굴 한번 보겠다고 구경 온 사람을 아무 이유도 없이 유치장에 쳐 넣다니 이게 말이나 되냐고!


이것도 하루, 이틀 정도였으면 걍 내가 재수가 없는 거지, 하고 말 일이었어.

근데 같이 유치장에 있던 일본인 상습도박범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하더라고.

-당신들, 어차피 25일까지는 못나가.

-그게 뭔 소리요?

-천황폐하는 25일께나 되야 동경으로 돌아가시거든.

-그러니까, 그게 나랑 뭔 상관이냐고?

-당연히 상관있지. 당신들 조선인이잖아? 그래서 못 나가는 거라고.


어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렇네. 예비검속 때문에 잡혀왔다가 반나절이나 하루 만에 풀려난 사람들은 죄다 일본인이었어.

이거 뭐, 속에서 천불이 나는데 뭐라 물어볼 사람도 없고 사람 좀 불러달라고 해도

감감 무소식이야. 아주 가끔씩 말야. 밤새 멀쩡한지 당직 같은 사람이 슬쩍 확인만 하고는 금세 가버려. 물어 볼 새도 없이 말야.


그렇게 9일이 지났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자그마치 9일이라고! 9일!

아무리 회사에 얘기까지 다 하고 왔다지만, 이번에도 또 애매한 일로 짤리면 나 정말 괴로워지거든? 내가 어ᄄᅠᇂ게 구한 직장인데!

이렇게 오래 유치장에 있다가 나가면 또 어ᄄᅠᇂ게 꼬일지 모르니까 종일 초조하고 불안하더라고.


사람 미치기 일보직전인데 그제서야 유치장에 형사가 들어오는 거야.

-이 편지, 무슨 내용이야?


기가 막히지.

-그래서 내가 조선에 있는 고향친구에게서 온 안부편지라고 설명하려고 했잖아!

근데 경찰은 코빼기도 안 보이고, 하나 묻지도 않더니만 왜 9일이나 지난 이제와서 묻냐고!


내가 그렇게 대답했냐고? 당연히 그런 말 못했지.

괜히 말 실수 하다가는 또 무슨 죄를 엮어서 아예 감옥에 보낼지도 모르잖아.

난 최대한 신중하게 대답했어.


-조선에서 온 친구편진데, 조선말에 원래 한자말이 많이 섞여있습니다. 진짜 별거 아닙니다. 단순한 안부편지입니다.

-어. 그래? 한자는 대충 읽겠는데, 내가 조선말을 몰라서... 번역 좀 해 줄 수 있나?

억울하게 잡혀 있는 것도 열 받는데 이제 편지까지 일본말로 번역해 달래.

번역해서 읽어 줬더니 내용을 아는지 모르는지 흠,흠 하면서 고개만 끄덕거려.


에라, 모르겠다. 여기까지 왔으면 한번 질러야겠다 싶더라고.

-이봉창이 누구냐고 OO서,OO형사한테 연락해 보시면 제 신원확인이 될 겁니다.

-진작에 말하지 그랬어. 그럼 이런 일도 없잖아.


이럴수가!

유치장에 잡혀있는 내내 형사는커녕 일반경찰도 못 본 내가 무슨 말을 해 볼 수나 있었나!

형사가 말야. 내가 불러준 경찰서 번호로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해 보더니 금세 태도를 바꾸더라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한 눈치야.


-어, 이 조선놈 봐라. 일본형사하고 친하다니 진짜 나쁜 놈은 아닌 것 같네?

-미안하게 됐다. 야. 여기 풀어줘.

-풀어주시는 김에 저기 조선인도요.

-그럼, 그럼. 죄 없는 사람 잡아 둘 게 뭐 있나...


아. 진짜!

내 어지간하면 이런 말 안하려고 했는데...

그놈의 천황 얼굴 한번 보려다가 이 고생을 한 걸 생각하면 말야.

유치장에서 나가자마자 폭탄이라도 있으면 천황한테 확 던져버리고 싶더라고.

조선이건 일본이건 살면서 차별 같은 게 살짝살짝 느껴지기는 했는데, 그야, 내가 워낙에 가방끈도 짧고 노동일이나 전전하다보니까 사람들이 얕잡아 본다고 생각해서 별 말 안하고 꾹 참고 지낸 거였거든?

그래서 되지도 않는 형편에 꾸역꾸역 공부도 해보려고 했던 거고.


근데 이렇게 대놓고 죄 없는 사람을 무기한 잡아놨다가 지들 꼴리는 대로 풀어주는 건 난생 처음 당해보니까 말야. 꼭지가 확 돌더라고. 그것도 아주 제대로!

아. 그놈의 민족의식!

항상 강조하지만 솔직히 난 말야. 평소에도 그런 거 별로 없던 놈이었거든?

어려운 말 같은 건 쓸 줄도 모르고 여하튼 골치 아픈 건 질색이었다고.

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하게 유치장에 9일씩이나 잡혀 있다 보니까 점점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이게 다 내가 조선인이라서 이런 꼴을 당하는거잖아!

이걸 유치장 9일코스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민족의식 자각 9일코스?

한번 제대로 당해보니까 지금까지 내 안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민족의식이 확 눈을 뜨는 거야!


그때 어렴풋이 깨달음이 왔다고나 할까.

뭐. 큰스님들처럼 대오각성한 정도는 아니고.

차별의 끝에는 깊은 빡침이 있었다는 걸 확실히 느낀 정도로 해 두자고.

그럼 다음에 또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그만할까 해.

또 취조 받아야 하거든. 이제까지 똑같은 얘기를 한 삼천번도 더 한 것 같아.

이러다가는 왜놈들이 사형시키기도 전에 지겨워서 먼저 죽어버릴 것 같기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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