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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악대, 프란츠 에케르트, 애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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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
조회수 : 56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0/19 23:19:24



군악대와 프란츠 에케르트

 

1896, 3월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참여한 특명전권공사 민영환은 10월에 러시아에서 귀국하면서

군사교관과 같이 돌아왔다. 돌아온 민영환은 1021일에 러시아식을 근본으로 하는 군제개혁안을 건의하였고

고종이 이를 승인하였다. 군제개혁안을 건의하여 군부대신에 오른 민영환은 러시아 교관들의 도움으로 군대를

개편함과 동시에 군악대의 설치를 추진했다. 서양의 악기들을 받아들여 군악대를 만들어서 사기를 높이고

지휘를 원활하게 하고자 함이었다.

 

이렇게 하여 시작된 군악대는 1896년부터 군악대비라는 명목으로 약 4,600원의 예산을 지원받았고

추가로 1897년에는 악기를 러시아에서 수입해오기 위해 약 3천원을 추가로 받았다. 세밀한 기록이 부족하여

러시아에서 어떤 악기를 수입해 왔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에 나팔류와 북류를 위주로 수입해왔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렇게 창설된 군악대를 당시에는 곡호대라고 불리었다.

 

이렇게 1896년 만들어진 곡호대는 1901년 프란츠 에케르트 초빙으로 변화의 계기를 맞는다.

곡호대는 서양악기를 갖춘 군악대이기는 했지만 초빙된 러시아 교관들 중 전문적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곡호대는 음악을 연주하기 보다는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돕는 나팔소리나

북소리를 내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악기는 있으나 가르칠 이가 없어 군악대로서의 기능을 제약받는 곡호대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궁내부는

음악교사를 초빙하고자 하였다. 단순히 나팔과 북소리가 아니라 음악을 연주하여 국가 행사나 왕실 행사에

쓰고 싶었던 고종과 한국정부는 한국에 음악교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궁내부는 한국에 음악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외무부에 고문으로 와 있던 미국인 윌리엄 샌즈와 총세무사인 맥리브 브라운에게 알리고

그들에게 음악교사 고용을 주선해줄 것을 부탁했다. 한국 정부의 부탁을 받은 두 명은

주한독일영사인 바이페르트에게 독일인 음악교사를 한국에 초청할 것을 요청하였다.

바이페르트가 프러시아 왕실군악대장인 프란츠 에케르트를 추천하였고 파리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민영찬이

에케르트와 직접 교섭하여 프란츠 에케르트를 초빙하는 데 성공하였다.

 

프란츠 에케르트 : 슐레지엔 출생, 드레스덴 음악학교에서 공부하였고 해군 군악대 장교로 활동하다가

일본 해군 군악대의 초청을 받아 1879년부터 20년간 일본에 머무르며 일본 군악대 설립과 훈련, 서양음악

전파에 종사하였다. 이시기 그가 한 가장 유명한 일은 일본의 요청으로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만드는데

참여한 것이다. 1899년 독일로 돌아가 프러시아 군악대장을 맡고 있다가 한국의 요청으로 1901년 한국으로

건너왔고 1916년 양화진(현 마포구)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

 

19012월 서울에 도착한 에케르트는 군악대 음악교수로 임명되었다이전에 러시아에서 수입해 온 악기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지만 에케르트가 한국에 오면서 가져 온 악기 46개는 모두 기록이

남아 있어 어떤 악기를 가져왔는지 잘 알 수 있다. 에케르트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월급이 300원에

방세 30원을 따로 지급받았고 가족을 동반하면 300원을 추가로 받는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프란츠 에케르트가 가르친 군악대가 처음으로 연주한 것은 190197일 고종의 50번째 생일기념 연회였다.

에케르트가 훈련시킨 군악대는 연회에 참석한 각국 공사를 포함한 외국 귀빈들이 보기에도 짧은 훈련 기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에케르트는 독일과 일본 등에

서 오랫동안 군악대를 교육하거나 지휘하였기 때문에 여러 나라의 곡에 익숙하였고 이는 한국 군악대 훈련에

굉장히 좋은 영향을 미쳤다.

 

프란츠 에케르트가 가르친 군악대 중 일부는 1907년 군대해산 이후에도 족적을 남겼다.

 

백우용(1883~1930) : 독일어 통역학교 학생으로 에케르트의 통역을 담당하여 군악대원이 되었다. 이전까지는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었지만 에케르트의 교육을 받고 클라리넷을 연주하는 황실 근위 군악대원이었다.

1919년 이왕직 양악대장을 지낼 때 양악대를 일제가 해산시키는 것을 막고자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28, 이왕직 아악부에서 궁중의 아악을 서양의 5선 악보로 옮겼고 여민락을 악보로

옮겼다. 이외에도 다양한 전통 음악을 서양식 5선악보로 옮기는 업적을 남겼으며 휘문학교나 연희 전문학교

등에서 음악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정사인(1881~1958) : 플루트 연주자였고 황실 근위 군악대원이었다. 군대 해산 이후 경성관련악단에서

활동하였고 송도 고등 보통학교에서 음악교사를 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작곡 실력이 뛰어나 행진곡인 추풍,  

돌진이나 민요 늴리리야, 가곡 타향 등을 작곡하였다. 특히 가곡 중 ‘내 고향을 이별하고는 홍난파의 봉선화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가장 사랑 받은 가곡 중 하나였다.


이들 2명 이외에도 군악대 출신 20~30 여명은 군대 해산 이후에도 후학을 가르치거나 악단을 이끌며

음악 보급에 노력하였다.

 


대한제국 애국가

 



  

고종은 국가의 상징체계를 정비하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이제부터 언급할 애국가뿐 아니라 1902년 국기, 군기, 어기, 예기, 친왕기 등의 제작을 위한 기장조성소를

설치할 것을 명령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각종 깃발이나 문장 뿐 아니라 애국가 제정도 비슷한 시기에

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9021, 고종은 국가제정을 명령하였다.

 

국가 제작을 명하자 국가를 작곡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당시 한국에는 전통적인 가락을 이용하여

노래를 만들 수 있는 이들은 있었지만 서양음악에 정통한 이는 에케르트 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종은 에케르트에게 애국가 제정을 명령했다. 고종은 에케르트를 통해 서양음악을 참조하지만 국가 자체는

전통음계를 채택하기를 바라였다. 에케르트를 통해 전통적인 음을 가지면서도 5선보를 통해 서양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애국가를 원한 것이다. 이렇게 제작이 시작된 대한제국 애국가는 190271일부로

반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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