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의심


뭐 맨날 취조지.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는?

-관심없어. 일단 밥이나 주고 다시 하지?

-니가 빨리 불어야 밥을 주지.

-이거 규정에도 어긋나잖아. 빨리 밥 줘.

-알았어. 알았다고. 야, 빨리 밥 가져와!


이런걸 요새말로 밀당이라고 하던가? 나야 어차피 죽을 건데 느긋하지 뭐.

근데 나를 취조하는 사람들은 난리도 아니야. 자기네 임금을 죽이려한 대역죄라니까 형사나 검사는 아주 피똥을 싸는 거지.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아주 쩔쩔매는 모습이 보기에도 안쓰러워.


나야 완전히 신경 꺼 버렸으니까 그렇다 치더라도 솔직히 취조하는 형사나 검사가 무슨 죄가 있나. 저들이 아무리 천황의 개들이라고는 하지만 가끔씩 연민마저 느껴져. 이거 까딱 잘못되면 모조리 모가지가 날아갈 판이거든.

왜놈뿐만 아니야. 조선인 악질 검사나 형사도 나중에 나쁜 짓 하다가 딱 걸리면

이렇게 말했다지?


-이게 다 애들이랑 마누라 먹여 살리려고 한 거요.


밥줄이 그런 거야.

처자식 먹여 살린다는 게 그렇게 무서운 거라고.

그건 그렇고,

장장 9일을 유치장에 풀려 있다가 간신히 풀려났어.

유치장, 그거 정말 무서운 거더라고. 무거운 징벌을 받은 것도 아닌데, 나오고 보니까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해 봤는데 몸이 많이 축나서 곧바로 일을 못나겠더라고.

하는 수 있나. 거의 2주 이상을 쉬고 나서야 간신히 일터로 나갔지.


-어이, 왜 이렇게 늦게 나온 거야.

-사실은 일이 좀 꼬여서 이렇게 늦었어요.


총무쪽에서도 결근내용을 알아야 하니까 설명을 하긴 했는데 왜 이렇게 한참 동안 회사에 안 나왔는지 말도 많고 소문도 많아.

뭐 다들 궁금해 하는데 어쩌겠어. 처음부터 끝까지 설명을 하다 보니 하루가 다가.

천황 얼굴이나 보려고 갔다가 2주 동안이나 출근을 못했던 사연도 나중에 말 하면서 정리를 해 보니까 한편의 소설이 되더라고.

그렇게 열심히 설명을 했는데도 사람들의 표정이 참 묘해.


-그래도 뭔가 이유가 있으니까 그렇게 잡아놓은거 아냐?

-아니라니까! 내가 조선인이라서 다짜고짜 잡아놨다니까!

-그렇게 대놓고 조선인 차별하는 거 못 봤는데?

-그럼 니가 한번 당해볼래? 어떤 기분인지!

-어어이. 왜들 그래. 다들 일이나 하라고. 잡담 그만하고!


설명을 하면 할수록 대화가 산으로 가.

일본사람은 적어도 나 같은 차별을 당하지 않았으니까, 전혀 와 닿지가 않는 거지.

아무리 친하고 마음이 통하는 일본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조선인이라서 잡혀 있었다는 말은 인정하지 않으려는 눈치야. 말도 안 된다나 어쨌다나.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니였으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마는 거지.


-근데 저 자식은 별 일도 아닌 것 가지고 난리를 쳐.

-그러게. 성격이 욱하는 데가 있다니까.

-원래 조선인들이 저런가?

수군수군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다 들려.

적당히들 좀 해라, 이것들아!


뭐 거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쳐.

근데 소문에 소문이 꼬리를 물더니 이제 이런 소리까지 들려.


-야. 이봉창이가 공산주의자라며?

-내가 들은 건 다른데? 걔는 무정부주의자라던데?

-무정부 뭐? 그게 뭔데? 그런 게 있어?

-여하튼 뭐든 간에 일본정부에 대드는 나쁜 거라는데? 자세한 건 나도 잘 몰라.

-흐으음. 그런 거구나. 무정부 뭐시기랑 공산주의랑 걍 나쁜거구나.

-거. 조선인들 그렇게 안 봤는데. 은근 무섭네...


허. 기가 막힐 노릇이야.

천황 얼굴 한번 보려다가 유치장에 9일이나 잡혀 있던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이제는 무슨 사상범 취급이야.

-이것들 보세요. 나도 당신네들처럼 먹고 사느라 무정부주의고 공산주의고 뭐고

관심도 없다고! 그런 게 뭔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엄한 사람 잡지 말라고!


여하튼 당한 사람이 억울하다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를 못하고 말야. 에이, 뭔지 몰라도 가까이 하면 다칠 것 같으니 일단 피하고 보자. 딱 이런 눈치라고.

나 똥 된 거 맞지?

아. 일 할 맛이 싹 사라져.

나처럼 당하지 않은 순평이나 마에다도 슬금슬금 내 눈치나 보면서 한마디도 안 보태.


-이 자식들. 너희들은 아무 피해도 안 봤다 이거지!


부글부글 끓어오는데 괜히 큰소리 냈다가는 또 나만 병신될 것 같아서 걍 참았어.

에라, 너희들 꼴리는 대로 생각해라. 이랬지 뭐.


다행이 소문은 소문으로 끝났고 내가 공산주의자니 무정부주의자니 하는 말도 시간이 지나니까 쑥 들어가더라고.

그럴 수밖에.

내 평소행동에 무슨 이상한 점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무슨 요상한 전단지를 돌리면서 선동질을 하는 것도 아니니까, 누굴 포섭한답시고 일부러 다가가서는,


-여기 싸고 좋은 공산주의 있어요. 공산주의가 싫으면 재밌는 무정부주의도 있어요.

이러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여하튼 소동은 그렇게 싱겁게 끝이 났는데 마음속에 계속 앙금 같은 게 남더라고.

뱃속에 뭔가 꽉 차가지고 말야, 도저히 못 참을 것 같은 엿 같은 기분이랄까.


그러다가 연말이 왔어.

내가 뚱한 표정으로 일만 하고 있었더니 한참을 말도 못 건네고 있던 순평이 하고 마에다도 놀러왔어. 막 내 눈치를 보는 꼴이 지들도 왠지 미안하기는 했던가보지?

-야, 이거나 마시면서 얘기나 좀 하자.

-나, 얘기 할 사람 많다. 딴 데 가봐라.

-거, 그러지 말고. 술 한잔 하면서 신년맞이나 하자고.

-그래. 우리도 다 사정이 있었잖아. 너 잡혀갈 때 하도 순식간이어서 도와줄 시간도 없었잖냐...


하긴 얘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어. 대꾸할 시간도 없이 개처럼 끌려갔는데 무슨 변명을 대신 해 줬겠냐고. 에이, 대인배인 내가 또 참아야지.

그렇게 새해를 나, 순평이, 마에다 셋이서 맞이했어.

술이지 뭐. 장가가서 식솔들이 딸린 것도 아니고 다들 독신이었으니까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하면서 내기 마작도 좀 하고 그랬지.


그렇게 신년연휴를 며칠 보내니까 술은 일찌감치 질렸고, 슬슬 여자 생각이 나더라고. 내친김에 근처 유흥가에서 한바탕 놀다왔어. 근데 한참을 술 퍼먹고 돌아다니면서 여자들과 놀다보니까 뻔한 공장 일꾼 월급이 어디 남아나기나 하겠어.

하여튼 그렇게 미친 듯이 놀면서 시간을 보냈으면 좀 잊을 듯싶기도 한데, 여전히 분이 풀리지를 않더라고.


이참에 뭔지는 잘 몰라도 확 그냥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가 될까 싶기도 했어.

근데 그러면 뭐해. 주변에 많이 배운 사람이 있기를 하나, 아는 조직이 있기를 하나, 책 한권 얻어 볼까 싶어도 여긴 죽어라 일만하는 공장이잖아. 기본적으로 사상이니 뭐니 관심도 없는 사람이 태반이야. 그게 또 정상이고.


-아, 바빠 죽겠는데 무슨 놈의 책!


이런 욕이나 안 먹으면 다행이지.

역시 힘들더라도 학교를 좀 더 다녔어야했는데...

아쉽기는 한데 좀 알아보다가 말았지 뭐.

아. 근데 오늘따라 취조가 끝이 없네!


-이제 이해가 좀 돼?

-그러니까 정말 공산주의나 무정부주의는 아니였던거지? 확실하지?

-아니라니까 그러네! 거, 니들 괜히 아무거나 막 엮으려는 거 아냐!

-뭐. 역시 조선인의 극심한 반항심이 공산주의보다는 설득력이 있겠지?

-그럼요. 이런 일에는 사상보다는 민족주의 쪽이 확실히 어필하죠.

어라? 이러면서 검사들하고 경찰들이 자기네 멋대로 쇼부를 치네?


에라. 이 한심한 놈들아.

조선이나 일본이나... 하나같이 자기들 편한 대로 조서를 꾸며대니까 이 모양이지.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세계평화가 늦어지는 거야!

근데 막상 이렇게 말하다보니까 왠지 내가 많이 배운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같긴 해? 후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