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갈등


아. 하루 종일 취조를 받았더니 좀 지쳐.

비누가게 취직한 얘기까지 했었지?

도대체 몇 번이나 직업을 바꿔야 안정이 되려는지 알 수 없어.

내가 싫어서 제 발로 때려친 것도 있고, 어쩔 수 없이 그만둔 것도 있고.

이것저것 막 섞여 있어서 가끔 가다가 나도 헷갈리니까 독자여러분들도 좀 이해해 주시고?

이왕에 나온 김에 직업 얘기 좀 더 하려고.

원래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하는데 그런 거 다 개소리더라고.

직업에 귀천이 왜 없어.

편하고 월급 많이 받는 직업이 따로 있고, 죽어라 힘들어도 밥 새끼 먹을 돈도 못 버는 일이 천지에 널려있던데!


근데 일본인한테는 직업귀천하고 직업연령이 얼추 맞아 떨어지더라고.

좀 행색이 괜찮아 보이면 4,50대 일본인 관리직이고, 열심히는 하는데 어딘지 좀 어설프다 싶으면 100% 젊은 일본사람들이지.

그런데 이것도 일본인한테만 통하는 얘기야.

유독 조선인한테만은 그런 경험이나 연륜은 전혀 통하지를 않더라고.

적어도 그때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에게 나이나 경험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어.

그보다는 먼저 일본인이냐 일본인이 아니냐만 중요했다고.

어쩌다 내 나이도 벌써 스물 중반을 훌쩍 넘겼는데 고작 얻을 수 있는 일이 비누가게 점원이야. 아니면 전에처럼 공장이나 부두에서 일 할 수 밖에.

뭐 못 배워서 그런 거라고 치면 어쩔 수가 없는데, 조선출신이면 일단 번듯한 직장을 얻을 길 자체가 없었거든.

어쩌다 일을 얻는다고 해도 일본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허드렛일 밖에는 없어.

그마저도 조선인들끼리 일자리를 다투니까 살아있는 게 살아있는 게 아니지.


그러다보니까, 같은 조선인들끼리 칼부림도 많이 나고 주먹을 휘두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 그 모습을 보고 또 일본인들이 뒤에서 쑤군거려.

-저것 봐! 조선인들은 어쩔 수가 없다고.


요새 사람들은 이런 걸 보고 뭐라고 그럴까, 이런걸 사회구조적 모순이라고 할려나?

한마디로 악순환인거지.

원래 사람이 1차적으로 먹고 자고 싸야하는 동물이라는 점은 전에도 말했고, 그런 1차적인 것조차 해결이 잘 안되니까, 조금만 뭐가 마음에 안 맞으면 서로 반목하고 죽을 때까지 서로 물어뜯게 되는 거지. 무슨 교양강좌에나 나올 법한 동물의 왕국 얘기가 아니야. 인간이 원래 그렇게 돼 있는 거라고.

꼴이 이 모양이다 보니까 조선에서는 똑같이 가난했어도 서로 돕고 살던 사람들이,

일본에 와서는 더럽게 나쁜 일본인 이상으로 지독해지는 거야.

그렇게 아등바등 해 봐야 조선에 있을 때보다 생활이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나빠지기만 하니까, 한마디로 인생 개판되는 거지.


여하튼 이 모양, 이 꼴이 된 게 조선인들의 잘못은 아니지만, 일본도 다 알면서 그냥 냅두는거야. 일본인보다 훨씬 싼 급여에 몇 배나 일을 더 시켜도 관청에서는 그냥 그런가 보다, 나 몰라라 하거든. 원래 그러려고 조선인들 부려먹는 거니까.

다만 조선인이라고 대놓고 차별을 하면 언제 폭동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적당히 넘길 건 넘기고. 관대한 척하면서 봐주기도 해.

그러다가 일본인들이 딱 선 그어놓은 곳을 조금만 넘어와도 그때부터는 죽음이지.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

뭔 일만 나면 일본의 잘못은 되도록 덮고 그게 다 몹쓸 조선인들의 소행으로 둔갑하는 거지. 저번에 있었던 관동대지진 때도 그랬지. 자연재해하고 조선인이 무슨 관계가 있나 싶겠지만 말야. 덮어씌우려고 작정하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어.

-이게 다 조선인들 탓이다.


그때는 일본에 사는 조선인들의 상황이 그랬어. 요새는 좀 나아졌을려나?

조선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져서 일본으로 떠났는데 막상 일본에 오니까 이건 뭐. 완전히 우는 놈 뺨 때리는 격이야. 어디로 가도 탈출구가 없는 거라고.

난 그나마 형편이 좋은 편이었어. 일단 일본사람 이상으로 일본어를 잘 했으니까.

그 덕분에 난 조선인들보다는 일본인 친구들이 훨씬 많았지.

아예 한복 같은 건 입지도 않았으니까 말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그냥 일본인 기노시타 쇼조야. 일본인들도 내가 조선인인걸 전혀 몰랐고 비누가게에 취직한 다음부터는 아예 대놓고 난 일본인이라 광고를 하고 다녔어. 그게 훨씬 편했거든.


하여튼. 내가 아예 안 할 때는 좀 그렇지만, 막상 하면 또 잘 하잖아?

이래봬도 가게점원으로 잔뼈가 굵은 나야.

주인도 밥 먹고 살아야 하니까 직원 월급 빼 먹으려면 이놈이 얼마나 잘하는지 두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거든. 직장이 다 그렇지 뭐.

일단 한달 정도 빡세게 일을 시키더니 좀 괜찮다 싶었나봐. 조금씩 대우가 좋아져.

난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한 게, 뭔가 하나 붙잡으면 그냥 끝장을 봐야 직성이 풀리더라고. 뭐 여러 사정으로 직장을 관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니까 나도 할 말이 그리 많은 건 아냐.

하지만 노가다를 하건, 뭘 하건 도중에 일 배우다 때려친 적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

분명히 하고 싶은 건 말야. 여러 사정상 직장 자주 옮긴 건 인정.

그렇다고 중간에 일 배우다 말고 도망친 적은 없다는 거.

한번 일하면 그만두는 날까지는 죽어라 열심히 했다는 거.


그러던 어느 날이야. 어느 조선인 여자애가 비누를 사러왔어.

한 열 댓살쯤 됐으려나. 검은 치마저고리에 어쩐지 꽤죄죄한 행색.

뻔하지 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어디 일 할 곳도 없는 흔한 조선인.

딱 봐도 견적이 나오잖아.

하여간 그 여자애가 비누가게에서 할 수 있는 게 뭐겠어. 그냥 비누 사러 온 거지.

뭐라 뭐라 조선말하고 되지도 않는 일본말을 섞어 쓰는데 일본인 주인이 신문을 보는 척 하면서 쓰윽 내게 신호를 보내.


-야. 저 조선인 좀 가게에서 치워라. 아, 짜증...

딱 이런 표정이야. 아. 갈등 때리더라고.

주인은 나를 일본인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데,


-어떤 물건을 사려고? 내가 함 봐줄까?

이렇게 갑자기 조선말로 물어보기도 그렇잖아.

뭐가 그렇게 조선말 쓰는 게 어렵냐고?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으면 내가 할 말이 딱 하나 있지.


-그럼 이런 엿 같은 시대에 니가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아봐라!

괜히 일본인 행세를 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무슨 가중죄가 붙는 것처럼 바로 대접이 달라지는 게 그 때 일본이야.

이렇게 설명하면 그 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좀 이해가 가려나?


일본인은 일본인이라서 빳빳하게 고개 들고 다니는데 말야.

조선인이 조선인이어서는 안돼.

뭔가 이상하지?

나처럼 조선인인데 일본인 행세를 하다가 걸리면 조선인이 원래 저렇지 라면서 무슨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뒤에서 손가락질을 한다고.

여하튼 여자애가 빨리 가주면 좋겠는데...

일본말로 안 판다. 어서가라 해도 막무가내야.

어쩔 수 없지 뭐. 주인 대신에 나라도 쫒아내야지.

정말 어찌어찌 쫒아 보내긴 했는데, 아 정말 괴롭더라고.

-어이, 기노시타! 빨리 소금 뿌리고 배달이나 다녀와!

-하이, 하이,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비누배달을 하려고 자전거를 타고 거리로 나갔는데, 아까 내가 가게에서 쫒아낸 조선인 여자애가 울면서 터벅터벅 걷고 있는 거야.

아마. 아까 내가 조선인한테는 비누 안 판다고 해서 그런 거겠지. 젠장, 얼마나 서러웠을까... 돈을 준다고 해도 비누 하나 못 사고 쫓겨나는 처지가.

순간 양심에 확 찔렸어. 얼굴이 다 화끈거리더라고.

아. 이거 말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기, 아까는 정말 미안했어. 나도 같은 조선인인데 일단 이 비누라도...

내가 배달하던 자전거를 딱 멈추고 영화에서처럼 멋지게 그럴 줄 알았지?

아냐. 고백하지만 난 결코 그러질 못했어.

그냥 모르는 채 하고 지나갔어.


-그 여자애가 조선인이라 일본말을 잘 못해서 비누도 못 사고 쫓겨난 게 내 죄는 아니잖아?

그 일이 있은 후에 자꾸 그런 식으로 내 자신을 속여도 보고 했는데 그 때 일이 평생 잊혀지지 않을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어.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천하에 못된 짓을 한 거였어. 아. 죄책감이란게 진짜...

솔직히 저번에 일본천황한테 폭탄을 던진 건 전혀 안 미안한데 그 조선인 여자애한테는 지금도 죽을 죄를 지은 기분이야. 지금 이렇게 갇혀 있어도 자꾸만 생각이 난다고.

-젠장, 이것도 그리 오래 할 짓은 못되는 구나.


싶었지만... 생각만 그랬지.

뭐가 어떻건 꾸역꾸역 가게에서 부지런히 일해야지.

주인집에 더부살이 한다지만 때 되면 밥 나오지, 월급 나오니까  또 밥그릇에 칭칭 매여 있는 거라고.

아. 정말 한심했다. 한심했어.

아마 그때부터인거 같아.

그냥 세상도 싫고, 나 자신도 싫어지고 조선도 싫고 일본도 싫고 이렇게 오사카 부근을 뱅뱅 도는 것도 지겨웠지. 만사가 다 귀찮고 허무하고 그렇더라고.

그 때 마음이 걍 그랬어.


그래봐야 나 같은 떠돌이 일꾼이 달리 뾰족한 방법이 있겠어?

속은 타는데 다른 방법은 없고. 그러다가 틈만 나면 또 술이나 푸고 여자들하고 노닥거리고 그랬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건전하게 살 생각은 없었냐고?

제발 부탁인데 그런 걸 나한테 따지지는 말아줘. 나도 당신들의 개인생활에 시시콜콜 관여하지 않잖아. 그러니 걍 이대로 나를 좀 놔두면 안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