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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역사소설] 쾌남 봉창! #15
게시물ID : history_290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괴발살!
추천 : 1
조회수 : 39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1/17 13:3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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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다시 오사카.


오늘은 감기 기운도 있고 으슬으슬 떨려서 많은 말은 못 할 것 같아.

아. 이놈의 취조실은 왜 이렇게 추운지. 바닥에서 찬 기운이 막 피어올라.

감기약 좀 달라고 해 봤는데, 그 시절에 제대로 된 감기약이 있을 리가 있나.

대신에 무슨 인심이나 쓰듯 담배 한대를 쓰윽 꺼내주더라고.

-야. 이거나 한 대 피워. 대역죄지만 특별히 신경 쓰는 거야.

-생색은... 그럼 이거만 싹 피우고 암 말도 안 할까?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지금처럼만 잘 협조해.

-거 담배 한 대 가지고 더럽게 생색은...


아. 몸도 안 좋으니 심기도 안 좋네.

그래도 할 말은 마저 하고 쉬어야겠지?

수금한 돈을 쥐고 다시 오사카로 온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오사카도 예전만 못 해. 동경이 그 모양인데 오사카에서 뭘 기대하겠어.

예전 같으면 하루치기 노가다라도 싫어서 안 했지, 없어서 못하지는 않았거든.

아무리 허접한 일자리라도 찾으면 얼마든지 있었는데 말야.

그 놈의 세계대공황인지 뭔 놈의 탓인지 노가다판도 아주 씨가 말랐어.


소문을 듣자니 식대 빼면 남는 것도 없는 잡역부 자리 하나 잡는데도, 현장책임자 찾아가서 몇 푼씩이라도 미리 상납해야 한다는 말도 있더라고.

말하자면 관리노동자가 현장노동자의 피를 빠는 셈이지. 그래도 찍소리 못하고 일 하는 게 요새 오사카라고 하더군.

세상이 이렇게 망가져가나?

갈수록 태산이라고 이게 바로 그런 거 같아.

뭐 내 탓도 없진 않지만... 조선에서 잘 안 풀려서 어찌어찌 여기까지 흘러왔는데 결국에는 일자리 하나도 못 찾는 개털신세야.

그러다가 박태산이라고, 아는 친구하고 연락이 돼서 간만에 소식이나 들을까 해서 만났지.


-야. 그러지 말고, 아예 상해로 가보면 어떠냐?

-상해? 갑자기 상해는 무슨... 중국말도 전혀 못하는데?

-아니. 거기 검표원 자리가 있는데 수입이 꽤 짭짤하다고 그러더라고. 업무상 필요한 영어나 중국말 좀 간단하게 배우면 되고. 조선인 차별도 일본에 비하면 거의 없다고 하던데?

-그래? 확실히 상해에 조선인들이 일 할 자리가 있다는 말이지?

-그럼. 내가 언제 거짓말 하더냐? 그리고 상해에는 임시정부도 있고 조선인 단체도 있다고 하니까. 아마 일본보다는 상해가 낫지 않을까? 나도 갈까 싶은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제서야, 아. 상해구나, 싶었지.

그 때 말야. 뭘 고르고 자시고 할 여유 같은 건 없었어.

하루치기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 뭐든지 재빨리 판단해야만 했거든.


-에라. 모르겠다. 그래 상해로 가자.

-야. 결정이 너무 빠른 거 아냐? 좀 더 알아보고 가던가, 뭔가 준비를 해야...

-준비는 무슨. 언제 나, 이봉창이가 무슨 준비하고 다니던. 걍 지르는 거지.

말 나오자마자 결정을 해 버리니 친구가 더 놀래. 뭐 나야 먹여 살릴 처자가 있기를 하나, 마누라, 애 딸린 친구들에 비하면 확실히 날라리지 뭐.


그래도 상해로 떠날 때 그나마 피붙이라고 조카 은임이 생각은 나더라고.

사실 조카 은임이 핑계대고 일본에 온 것도 있고, 일본 와서 좀 있다 은임이도 결혼을 했는데, 조카라고 해서 어디 한번 맛있는 걸 사준 적이 있나. 결혼했다고 축하 해 주기를 했나. 그저 미안하기만 해.

그렇다고 어느 날 갑자기 나 상해간다. 하는 것도 좀 웃기고. 걍 편지 한통 부쳐서 상해가면 다시 연락하겠다, 하고 말았지.

하여간, 사람들이 나보고 역마살, 역마살 하는데 그게 맞는 소린 것 같기는 해.

어디 한군데 궁둥이 붙이고 있는 게 영 성미에 안 맞더라고. 그냥 남들처럼 죽느니 사니 해도 어딘가 착 달라붙어서 버텨야 하는데, 난 그게 잘 안되더라고.

뭐. 일본 생활도 질리도록 해 봤겠다. 상해가 그렇게 좋다는 말은 예전에도 여러번 들었는데 막상 가본 적은 없거든.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나 궁금하기도 하고. 

짐이라고 해봐야. 옷가지 조금이니까 따로 챙길 것도 없었어. 남은 돈을 닥닥 긁어모았더니 딱 상하이까지 갈 뱃삯 정도는 나오겠더라고.

이제 몸만 가면 되는데 그놈의 도항서류가 문제야.


서류에 이름란이 있는데 이번에는 뭐로 쓸까. 심히 고민되더라고.

막상 오사카로 돌아왔을 때는 그냥 이봉창으로 살자고 결심까지 했는데 천황 얼굴 구경 갔을 때처럼 아무 죄도 없는데 무슨 봉변이라고 당할까봐 겁이 덜컥 나더라고. 이런 걸 조건반사라고 하던가? 아무튼 기분 더러워.

잠깐 도항서류의 이름란을 빤히 보고 있는데 일본인 세관관리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핥듯이 내려다보는 게 느껴져.

에라. 모르겠다. 그냥 기노시타 쇼조로 쓰자, 이러고 말았지.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하냐고? 원래 한번 당한 놈이 겁이 많은 법이야. 괜히 이봉창이라고 본명이라도 썼어봐. 어이, 이 친구 쳐 넣어. 이럴 것 같은 생각이 확 밀려오더니 소름이 다 돋더라고.

게다가 재수라도 없어봐. 아무런 죄도 없는데 며칠씩 경찰서 유치장에 잡혀 있다가 풀려나면 나만 손해 보는 거 아닌가?


다행히 이번 도항은 별 일 없이 넘어갔어. 생각해 보면 열불 나는 일이야. 조선인 이름을 쓰면 무조건 불이익을 받을 것 같은 생각에 등골이 다 싸늘해지니 말이야. 거꾸로 일본인 이름을 쓰면 뭐든지 별 탈 없이 다 잘 될 것 같다는 착각에 빠져. 그리고는 다시 후회가 막 밀려와.

-에혀... 그래도 조선이름을 쓸 걸.


이건 뭐. 어쩔 수가 없어. 입으로는 다 같은 일본인이라고 떠들면서도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가 않거든. 

심지어 기노시타나 마쓰다도 다 같은 가짜 이름인데 이 이름을 쓰면 그럭저럭 지낼만 하고, 조선인이라고 하면 일용잡부 말고는 취직도 어림없다고. 망할!

말 나온 김에 좀 더 해야겠어.


예전에 부두에서 잡역부 할 때 말야. 아예 대놓고 일본인 행세를 하다가 조선인이라는 게 알려진 순간 일당까지 깍였잖아! 이래도 차별이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 나와 보라고 해!

내가 돈에 환장한 놈은 절대 아니지만, 사람이 살면서 돈,돈,돈 안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이나 되는지 한번 나와 보라고. 적어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 급여도 똑같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냐? 왜 조선 사람이라고 차별하냐고!


근데 내가 왜 자꾸 이런 생각을 해야만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난 걍 내 일이나 열심히 하고 그걸로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데 말야.

어쩐지 세상이 날 가만히 놔두질 않는 것 같아.

그러다 또 이런 생각도 들어.

나보고 자꾸 대역죄, 대역죄 하는데 일본 임금은 무슨 하늘의 자식인가?

그 놈도 나랑 똑같은 인간일 텐데. 먹고, 자고, 싸고 할 건 다 할 거 아냐.

그럼 내가 나하고 똑같은 사람을 죽이려고 했으면 걍 살인미수죄 아닌가?

살인미수건 뭐건 일본법에도 다 있을 거고 뭔가 원칙도 있을 거 아냐.

근데 어디 시대극에나 나올 것 같은 대역죄나 갖다 붙이고 그러는지 난 잘 모르겠어.


아. 그렇잖아. 촌스럽게 대역죄가 뭐야. 이거 완전히 시대에 역행하는 거 아냐?

조선인이고 일본인이고 일본의 울타리 아래서는 만민이 평등하다며?

근데 천황은 무슨 특별한 예왼가? 사람 위에 또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그냥 법대로만 하자고! 살인미수죄면 되는 걸 대역죄는 무슨, 그렇게 오버들을 하고 그래.

뭐 죽이건 살리건 애초부터 그런 건 신경 안 쓴다니까.

맘대로 하라고. 맘대로 하긴 하는데 대역죄는 좀 아니지.

난 걍 할 일을 한 것뿐인데. 일본애들이 자꾸 대역죄, 대역죄 하니까 내가 무슨 엄청난 공명심에 빠져버린 미치광이처럼 보이잖아. 사람 어이없게시리.


난 걍 죽여야 할 놈을 죽이려고 했다니까?

그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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