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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친일파+강간범=육군참모총장?
게시물ID : history_2907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oull00
추천 : 11
조회수 : 2082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1/17 21:3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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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마 다케토시(이응준). 1890. 8. 12. ∼ 1985. 7. 8.

대한민국 국군(이하 국군)의 뿌리가 구 일본군과 만주군이라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물론 중국군 출신도 있긴 하지만, 그들은 극소수에 불과하죠.) 오늘은 친일파의 후예인 국군의 대표 격인 인물, 초대 육군 총참모장(현재 육군참모총장)인 이응준에 대해 다루어 보려고 합니다.


그는 1890812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고향인 안주에서 한학을 배우던 그는 16세가 된 1906년 서울로 올라와 수표교 근처 여관에 묵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여관 주인의 소개로 군부대신 이근택(을사오적 중 한 명)의 부관이던 이갑(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 참령의 집에 기거하게 되었습니다. 이갑의 배려로 그해 가을 보성보통중학 1기로 입학해 수학하다가 1908년 노백린(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이 교장으로 있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편입했습니다. 19099월 통감부에 의해 육군무관학교가 폐지되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육군중앙유년학교 예과 2년으로 편입해 1912년 본과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그는 도쿄에 있는 제1사단 제3연대에서 6개월간 실습한 후 191212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45월 제26기생으로 졸업해 견습사관을 거쳐 같은 해 12월 일본군 육군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일생의 시작부터 친일파의 악취가 뿜어져 올라오지만 고작(?) 이 정도라면 제가 이 글을 쓰지도 않았겠죠.


그가 소위로 막 임관했던 시점인 1915, 그는 데이트 강간을 저지릅니다. 피해자는 최초의 여성 근대 문학가인 김명순입니다. 시부야의 국정여학교를 다다니던 김명순은 19157월 동경 아오야마(청산) 연병장 근처 숲에서 함께 산책 중이던 일본군 소위 이응준으로부터 강간당합니다. 그 때문에 김명순은 자살을 시도했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피해자인 김명순은 학교에서 제명당해 귀국했다. 이 사건에서 김명순은 엄연히 피해자인데도 기생의 딸이라는 출생과 결합하면서 가부장제 사회는 그에게 헤픈 여자라는 레테르를 덮어씌웁니다. 당대의 이름난 소설가인 김동인, 김기진, 전영택은 모두 그의 행실을 비난했고, 심지어 김동인은 <김연실전>이라는 소설을 써서 김명순의 명예를 악의적으로 훼손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셋은 모두 친일파가 됩니다. 그리고 가해자인 이응준은 이 사건으로 인해 어떠한 처벌이나 불이익도 받지 않았습니다.


강간을 저지른 이후 그는 1916년 지바보병학교에서 3개월간 보병전문교육을 받은 후 육군 중위로 진급합니다. 19188월 일본군으로 시베리아 간섭전쟁에 참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일본 파견군사령부로 배속되었는데, 그곳에서 러시아인·중국인·조선인 공산주의자의 동태를 파악하는 업무를 담당합니다. 이 무렵 이갑의 유언에 따라 그의 무남독녀인 이정희와 결혼합니다. 이 대목에서 독자 분들은 친일파인 이응준이 어떻게 독립운동가 장인을 둘 수 있냐고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혼인할 무렵 그가 맡았던 임무가 러시아인·중국인·조선인 공산주의자의 동태를 파악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독립운동가의 자녀와 혼인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독립운동가의 동태를 파악하기 유리해질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수는 있을 것입니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인인 그는 일본 육사 26기 동기생인 김광서(김경천), 지석규(지청천)와 함께 일본군적을 버리고 중국으로 탈출할 것을 모의했습니다. 김경천과 지청천이 계획대로 탈출하여 무장 독립 운동의 중추가 된 것과 반대로 이응준은 계획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19209, 그는 조선군사령관 우츠노미야 타로 육군대장의 배려로 용산에 주둔한 조선군 제20사단 제40여단 제79연대로 배속되었습니다. 이후 1925년 대위로 진급해서 대대부관을 거쳐 중대장에 임명됩니다.


192511월 일본군이 중국 동북지역 군벌인 장쭤린의 부하인 궈쑹링 모반사건에 개입하기 위해 중국 봉천으로 출동할 때 파견되어 현지 경비업무를 수행합니다. 이후 1933년 일본군 육군 소좌(소령)로 조선군 제20사단 제79연대 부관, 19348월에는 제79연대 대대장으로 근무합니다. 19357월에는 일본군 장교로 장기 복무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4등 서보장을 수여받습니다. 1936년에는 일본군 육군 중좌(중령)로 진급해 경성의학전문학교와 경성약학전문학교의 교련담당 배속장교로 일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전선에 출정하여 제20사단 사령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9381월에는 중국 베이징 주둔 일본군 북지파견군사령부에 근무하면서 난위안 전투, 스자좡 전투, 산시성 전투에 참전하고, 선무공작을 맡아 대동아건설정신을 중국인에게 선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19391월에는 훈3등 서보장을 받았고, 이후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 병사구 사령부를 거쳐 19408월부터 조선군 대구사령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941, 그는 조선인으로써는 세 번째로 높은 계급인 육군 대좌로 승진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36년 동안 대좌 이상의 계급에 진급한 것은 이은(영친왕, 중장), 홍사익(중장), 김석원(대좌), 이응준(대좌), 이렇게 단 4명에 불과합니다. 이후 19425월 일본군 북지독립 제7여단으로 배속되었다가 1943년 초 중국 칭다오 교육대 대장으로 5개월간 현지 신병보충과 교육에 종사했습니다.


그는 일본군 장교로 재임하면서 중일전쟁을 선전하고 조선인의 입대를 권유하며 적극적인 참여를 선동했습니다. 4383일 그는 생사를 초월하라는 회견에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징병제 실시에 대하여 무한한 감사와 적극적인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방하면서 인력 동원에 앞장섰습니다. 1943119일 경성부민회관에서 열린 특별지원병제는 반도 민중의 활로, 학도의 중대책임을 각오하라라는 강연을 하며 참전을 권유했습니다. 같은 해 가을, 독립 제7여단에서 편성한 토벌부대의 지휘관을 맡아 산둥성 황해안지구의 팔로군 진압작전에 참여했습니다. 팔로군에 공산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다수 참여했던 점으로 봤을 때 사실상 독립군을 진압한 셈이지요. 1943년 말부터 1944년 초까지는 중국 진저우 정차장사령관(수송사령관)으로 근무했습니다. 1944년 봄 그는 서울 용산정차장 사령부 사령관으로 전임되어 주로 북중국 전선과 관동군에게 보내는 병사·장비·피복·군량 등을 수송했습니다. 19456월 원산항 수송부로 배속되어 근무하다가 해방을 맞았으며, 소련군이 진주하기 직전 아깝게도 서울로 탈출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그의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84802)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 그는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은 채로 미군정청의 요청 11월 전조선임시군사준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군사영어학교의 생도모집을 주도했습니다. 이듬해인 19461월에는 미군정청 국방사령부 고문으로 임명되어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국방경비대를 창설하는 등 핵심적으로 건군을 주도하며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이 국방경비대에 입대하도록 후원했습니다. 6월에는 국방경비대 감찰총장으로 임명되면서 제1여단과 제3여단을 편성하였고, 1947년에는 제1여단장이 되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육군 총참모장(총참모장이 참모총장이 된 것은 195359일 이후입니다.)에 취임하여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19495월 춘천 제8연대의 2개 대대병력이 월북한 사건이 일어나자 그 책임을 지고 참모총장직을 사퇴합니다. 이후 제3사단장과 제5사단장을 역임했고, 5사단장으로 재임할 때 한국전쟁이 발발합니다. 개전 이후 그는 수원지구방위사령관, 전라남도편성 관구사령관, 서남지구전투사령관, 마산지구와 제주지구계엄사령관, 전라남도 병사구 사령관 및 전라남도 계엄 민사부장 등 요직에 임명되어 복무를 계속합니다. 하지만 국방장관 신성모와의 불화로 195011월 전역하고, 2대 상이군인회 회장으로 추대됩니다. 하지만 1951년 거창 학살사건과 국민방위군사건으로 신성모 국방장관이 사임하자 195211월 현역으로 복귀해서 육군대학 총장에 취임하고, 중장으로 승진하여 1953년 제1훈련소 소장, 1954년 육군참모차장을 역임합니다.


하지만 그는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군복을 벗게 됩니다. 그가 육군대학교 총장 및 육군 중장 재직 시기이던 1955년 육군대학교에서 진급 심사 시험 중 발생한 커닝 사건 때문에 당시 준장 2명과 중령 1명이 부정행위로 군복을 벗었는데, 이 중에 이응준의 장남 이창선(육군참모총장 비서실장)이 연루되어 559월 아들 이창선과 함께 예편합니다.


이후 그는 19589월까지 이승만 정권의 체신부(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전신) 장관을 지내고, 사임한 직후부터 자유당 성북을구 지구당 위원장을 지냈습니. 4월 혁명 이후인 1960729일에는 총선거에서 무소속(강원도 철원)으로 민의원에 출마했지만 당연히 낙선합니다. 19615·16 군사쿠데타 이후 자유당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정치활동이 규제되었고, 1962년 재향군인회 고문으로 추대됩니다. 정치활동 규제대상에서 풀린 뒤인 그해 81일 국민의당(이후 민주당에 흡수되어 현재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전신 중 하나가 됩니다.) 창당 발기인대회 지도위원으로 추대됩니다. 사실 양김이 등장하기 이전의 민주당은 정권을 잡지 못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자유당-민주공화당과 이념적으로 크게 다르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런 사람도 당의 간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후 1965년 성우구락부 회장, 1967년 반공연맹 이사장, 1968년 상무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1972년에는 반공유공자 보국훈장 통일장을 서훈 받습니다. 서훈 이후 1979년 국정자문위원, 1980년 국방정책자문위원장, 통일원 고문 등을 지내며 승승장구하다가 1985년에 향년 96세에 사망합니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일제의 군인이 되어 독립군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동시에 그는 앞길이 창창한 문학가를 성폭행하고도 사과 한 번 하지 않은 파렴치한 성폭행범입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현재까지도 국립서울현충원 장군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20043'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이듬해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친일파에 대한 역사의 재판이 미약하게나마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진상규명위는 2007년 그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립니다. '조선인으로서의 자각은 갖고 있었다고 보여지나 군인으로서 충성해야 할 국가에 대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었다. 직업군인이기 때문에 일제에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는 논리는 같은 일본 육사 출신이면서도 대륙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한 선후배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합리화될 수 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후 과거 이명박근혜 정권의 적폐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적폐를 완전히 청산하기 위해서는 과거 일제강점기와 독재정권에서 생겨난 적폐에 대한 청산이 필수적입니다. 이번 정부에서 우리 사회의 적폐를 완전히 청산하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마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https://ko.wikipedia.org/wiki/이응준_(군인)
https://namu.wiki/w/이응준
http://www.doopedia.co.kr/mo/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2&MAS_IDX=101013000856352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5502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34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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