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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한국사> 미씽 :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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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드림해적선장
추천 : 3
조회수 : 168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7/11/25 21: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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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안녕하세요^^
올해 몇 번 역사 이야기를 올린 적이 있는데, 반응이 좋아서 출판사에 투고를 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적처럼 계약을 하게 되었고, 제가 쓴 역사 이야기를 묶어 "찌라시 한국사" 라는 제목으로 12월 출간을 앞둔 17년차 직딩입니다.
오랜만에 새로운 이야기 하나 투척 해 드리고 갑니다.
베오베에도 몇 번 오르고 해서^^:

100개가 넘는 벼루와 천 자루가 넘는 붓을 사용하고 나서야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는 추사체!
타고난 재능에 엄청난 노력이 더해져 이름만으로도 브랜드가 된 추사 김정희. 그는 19세기 조선뿐만 아니라 동북아 최고의 예술가로 칭송을 받았는데! 그가 남긴 작품 중에 글씨가 아닌 그림 세한도는 화가가 아닌 문인이 그린 그림 중 최고레벨로 평가 받고 있어. 서예의 황제 김정희가 남긴 그림 세한도에 얽힌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알아보자고.
 
추사 김정희는 1786 (정조 10)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어. 본관이 경주야. 그 동안 작가가 다룬 수 많은 역사 속 인물 중 처음으로 집안 어른이 나오셔서 굳이 본관을 밝힌 바 지나친 거부반응은 반사!
모든 천재가 그러하듯 추사 김정희도 어마 무시한 탄생 설화를 가지고 있는데 잠시 살펴 보고 가자고. 그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24개월 만에 태어났다고 해. 이날 고향 뒤뜰의 말라버린 우물이 다시 샘솟고, 팔봉산의 초목이 물 만난 고기처럼 마구 피어 올랐다고 하니 그야 말로 대.... 이렇게 요란하게 태어나 보니 증조부가 영조임금의 사위였어. 조선 최고의 집안인 전주 이씨 로열 패밀리와 친인척인 금수저 집안에 태어난 거야.
 
천재는 만들어 지기도 하지만 사실 어느 정도 타고난다고 봐야 하지 않겠어?
<대동기문>에 기록된 이야기에 따르면, 추사가 일곱 살 때 쓴 글 입춘첩이라는 글씨가 그의 집 대문에 붙여져 있었다고 해.
우리 애가 한글을 가르쳐 준 적도 없는데, ‘자를 방금 읽은 것 같아요라고 모든 부모들이 호들갑 떨듯이 추사의 부모도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싶었겠지. 때 마침 이 글을 지나가던 체제공이 보고 집안으로 굳이 들어와 글씨의 주인공을 찾았다고 해. 체제공님은 찌라시 한국사 1 김만덕 편에 당대의 정승으로 등장하신 그 분이 맞아.
저기 대문에 걸려있는 글씨가 비록 아이가 쓴 글씨 같긴 하다만 보통 글씨가 아닌 거 같아 내 이리 집안으로 들어오게 됐소이다.”
대감마님은 역시! 제 아들놈이 쓴 글씨입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데 안 사람이 자꾸 자랑하고 싶다고 하여 그만. 헌데 대감마님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혹시 달리 하실 말씀이라도?”
이 아이는 장차 역사에 남을 명필에 될 것이오. 그러나 계속해서 글씨를 쓰게 되면, 또한 기고한 운명의 사슬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이니 참으로 안타깝도다.”
그 해결책이 없으면 덕담이나 해주고 갈 것이지, 괜히 불길한 말만 남기고 훌쩍 떠나 버리실 건 머람. 역시나 체제공의 불길한 예언은 어린 시절부터 들어 맞기 시작했는데, 20대가 되기 전에 부모님과 스승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부인과 사별까지 하게 되었어. 하지만 이런 역경은 시작에 불과했어. 추사는 정말 붓을 놓아야만 행복해지는 사주를 타고 났던 걸까?
 
김정희는 23세 되던 해에 재혼을 하고, 이듬해 에는 호조참판으로 승진한 아버지를 따라 연경(북경)으로 떠나게 되었어. 연경의 첫 방문이 김정희의 인생관을 송두리째 바꾸게 되었는데, 그는 연경 체류기간 중 당대 최고의 금석학자 옹방강 및 다양한 분야의 석학들과 교류하게 되었고, 어리지만 명석한 김정희는 그 들로부터 사랑과 귀여움을 받으며 학문의 나래를 더욱 펼쳐 나갈 수 있었어. 여기서 잠깐 김정희가 추사로도 유명하지만 조선 최고의 금석학자라도 역사책에 많이 나오잖아. 이 금석학이란 쉽게 말해 고대의 돌이나 비석에 새겨진 문자들을- 탁본을 떠서- 연구 하는 학문이라고 간단히 알아두면서 교양을 쌓아두자고.
 
김정희는 34세가 되던 해에 대과에 급제를 하고 10여 년과 정부의 주요요직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 하였어. 체제공의 예언은 빗가간 것이구나 하고 안도하는 찰나. 행복 끝 불행 시작.
하늘의 명을 알았다는 지천명을 앞두고 김정희는 안동 김씨들의 계략에, 파직이 됨은 물론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어. 그냥 유배 정도가 아니라 가택연금이 되었는데, 말이 가택 연금이지 싸리나무 대문에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만들고 일체의 면회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적 사형선고나 다름 없었어. 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던 제주에서의 유배 생활은 장장 9년 동안이나 이어지는데, 이 때 문제의 세한도가 완성이 돼.
 
블랙리스트 최 상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귀양생활 초기에는 많은 지인들이 그를 찾아 오기도 하고, 인편을 통해 생필품을 보내 오기도 했었어. 하지만, 조정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고 유배생활이 생각보다 길어질 거라는 소문이 들자 그를 찾는 발길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어.
추사는 이제 끝났구나. 이렇게 보내기에는 참으로 아까운 인물인데 말이야.”
그 괜히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게. 지금은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때야. 혹시라도 유배에서 풀려나면 그때 못다한 마음을 다하세.”
그러다가. 영영 풀려나지 못하면, 그때의 찜찜함 마음은 누가 씻어주나?”
그 참. 자네도 같이 블랙리스트에 올라가고 싶어 이러나.”
 
제주도의 유배 생활 중에 베프 김유근의 사망과 부인과의 사별을 다시 겪은 김정희 심리상태는 극도로 지쳐 있었어. 이 정도면 누구나 우울증 초기 증세를 겪지 않았을까? 모두가 몸을 사리며 추사를 찾는 발길이 완전히 끓어진 어느 날.
야음을 틈타 추사의 허름한 집으로 들어가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김정희의 제자 역관 이상적이었어.
아니 자네 또 왔는가? 이러다 정말 큰일 나네. 나야 자네가 이리 생각해 주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맙지만, 내가 걱정이 되고, 염치가 없을 정도네.”
스승님 당치 않은 말씀이십니다. 세상이 다 버려도 스승님에 대한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번 연경 출장 길에는 제가 무엇을 구해왔는지 아십니까? 이 것을 구하고 스승님이 기뻐하실 생각을 하니 잠 자는 시간도 아까워 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출장비도 빠듯한데 또 무엇을 구해왔단 말인가? 그리고, 그렇게 어렵게 구한 것이라면 안동 김씨한테 바쳐 일신의 영달에 힘쓸 것이지, 블랙 리스트에 올라있는 나 같은 늙은이에게 왜 가져 온단 말인가. 자제는 참으로 미련한 자 일세. 이번이 마지막이니 다시는 나를 찾지 말게
 
떠나는 이상적의 등 뒤에 대고 말은 차갑게 했지만, 추사는 소나무처럼 변함없는 이상적의 마음에 큰 감동을 받았어.
가만있자. 내가 우선(이상적의 호)을 위해서 멀 해줄 수 있을까? 글씨 말고 먼가 좀 더 특별한 것을 해주고 싶은데 말이야. 옳거니! 소나무처럼 변하지 않는 우선의 절개를 그림으로 그려 봐야겠다. 내 글씨도 좋지만, 그림이라면 훗날 더 가치가 있지 않을까? 국보는 몰라도 보물급으로 지정된다면 그의 후손들에게도 좋을 터. 어디 보자. 슬슬 한 번 작업을 시작해 볼까?’
 
이런 마음으로 추사 김정희는 초라한 집 주위에 늘 푸르른 소나무와 잣나무를 그린 세한도를 완성하였어. 김정희인데 글씨가 빠질 수 없잖아. 누가 봐도 김정희가 이상적에게 준 선물임을 알 수 있게 추사체로 우선시상이라고 적었어. 마치 유명 가수가 자신의 앨범에 Thanks to 이상적 이라고 새겨 넣듯이 말이야. 또한 PS정무상망이라고 남겼는데, 우리 오래 오래 서로 잊지 말자란 뜻이니 사제지간의 브로멘스에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야. 이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다음 출장 길에 김정희와 교류하던 중국의 학자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줬어.
당신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하는 추사 김정희가 나 개인을 위해 이런 그림을 그려줬소이다. 으하하하!’ 하는 마음도 조금은 있지 않았을까?
 
스승님이 유배생활 중 그린 그림입니다. 혼자 보기 아까워 이렇게 여러 대인들께 보여 드리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띵호와! 역시 추사는 대단하다 해. 어찌 글씨뿐만 아니라 그림도 이리 멋 들어 지게 그린다 해?”
이 그림을 본 당대의 잘나가는 중국의 석학 16인이 찬시를 지어 주었고, 이상적은 그걸 표구해서 다시 조선으로 가지고 오게 되었어. 이러면 세한도의 그림 값은 따따블이 되었겠지? 나만 이런 세속적인 생각을 한 거야?
 
헌데 이런 세한도가 100년이 지나 일본인의 손에 들어 가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추사의 세한도를 손에 넣은 일본인은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후지쓰카 였어.
조선은 참으로 희한한 나라이므니다. 어째서 추사 김정희 선생님 같은 분의 후손들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들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스므니다. 추사는 조선은 물론 청나라를 통틀어서도 당대 최고였으므니다. 나는 그 분의 열렬한 팬으로써 그 분이 남긴 모든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것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 있스므니다.”
당시 대학교수로써는 치르기 힘든 거액을 지불하고, 세한도를 비롯한 추사의 작품을 열성적으로 모았던 거야.
 
그 반대편에 세한도를 되찾기 위해 모든 걸 내건 20세기 한국 서예의 거장 손재형이 있었어.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긴 하지만, 어찌 추사 선생님의 세한도를 일본인의 손에 맡겨 둘 수 있겠나! 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세한도를 되찾을 것이다.’
손재형 선생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세한도를 되찾기 위해 현해탄을 건넜어. 무작정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가서, 세한도를 조선인의 품에 돌려 달라고 호소를 하였어.
손 상, 여기 니폰까지 찾아온 당신의 노력과 정성에 참으로 탄복하여 쓰미니다. 하지마는 추사를 향한 나의 마음도 어느 조선인 만큼 못지 않스므니다. 추사 선생님은 이미 국적을 초월하신 분 이므니다. 고로 선생의 작품을 잘 관리 할 수 있는 사람 손에 있는 것이 맞다고 생각 하므니다.”
 
손재형 선생은 문전박대를 당하는 날도 있었지만, 100일 기도의 심정으로 3달이 넘는 시간 동안 후지쓰카의 집을 찾아갔고, 마침내 그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고 해.
! 손 상! 참으로 끈질기므니다. 내가 죽고 나면, 내 아들 편에 세한도를 손 상에게 반드시 전해 주려고 했스므니다. 하지마는 손 상이 아무래도 나 보다 세한도를 더욱 사랑하는 거 같스므니다. 이런 걸작은 돈으로 거래 되어서는 아니되므니다. 내가 손상에게 그냥 줄 테니 반드시 잘 간직 하기 바라므니다. 내가 반드시 지켜 보겠스므니다.
세한도를 향한 두 사람의 애정이 빛을 발한 것일까? 세한도가 조선으로 돌아온 후 후지쓰카의 집이 폭격을 맞았다고 하니, 세한도라는 마스터피스의 위엄이 느껴지는 대목이야.
이상이 대한민국 국보 180호로 지정되어 있는 추사 김정희의 그림 세한도의 이야기야.
PS : 양평에 가면 맛 집이나 두물머리만 가지 말고, 물과 꽃의 정원이라 명명된 세미원을 꼭 들러 보길 바래. 이 곳에는 세한정이라는 곳이 있는데, 추사의 세한도를 재현해 놓은 정원이 있어. 송백정이라는 집 한 채 앞에 아름다운 소나무 하나가 덩그러니 있으니, 같이 가는 여자친구나 아이들에게 역사지식을 뽑낼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지 않을까?

요즘 팟캐스트라는 1인 방송을 시작 해보았는데 재미가 쏠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도전해 보세요.
책 제목과 같은 "찌라시 한국사"로 검색을 하셔도 되고 아래의 링크로 들어 가 보셔도 됩니다.
16년간 사무직원으로 회사만 다니다 어쩌다 글을 쓰게 되었는지 간단한 설명도 있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도 있습니다.^^

http://www.podbbang.com/ch/1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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