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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근세 특이한 향우회
게시물ID : history_291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2
조회수 : 105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1/26 18:26:20


북경 똥장수라는 책을 읽다가 특이한 거를 발견해 요약해서 올립니다.


중국 근세 이후 도시사회에서 특이한 점 중 하나는 회관의 등장이다. 회관은 동향 네트워크를 조직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도시 이주민들이 스스로 사회 안정망을 확보하려는 노력에서 태어났다. 원래 회관은 명초 이후 동향의

과거 응시자나 상공업자가 수도나 성도에 머물 때, 그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사설기관였다.

그러던 것이 청 중기 이후 신사 및  상공업자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친목, 부조, 이익을 위해 동향 조직을 결성할 때

회관이 조직적 기반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베이징에서 회관은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영락제가 기원이다. 영락제가 베이징으로 천도하자 과거를 치를 사람들의

숙박과 식사가 새로운 문제로 떠올랐다. 명 조정은 거마비 정도는 제공했으나 중국 각지에서 밀려오는 과거생 모두의

숙박과 식사를 제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러한 것이 사회문제로 떠오르자 회관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올랐다. 안휘성 우휴현 출신 고위 관료가 친척과 동향사람들을 위해 우후회관을 만들자 이어 광둥회관 푸저우 회관 등이

생겼다. 이렇게 명대 과거를 보러 오는 이들을 위하여 출발하였던 회관은 각 지역 출신 관료들의 후원으로 출발하였기

때문에 곧 과거응시생의 숙박시설 뿐 아니라 지역출신 관료들의 모임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명이 망하고 청이 들어선 후에도 회관은 계속 늘어났다. 현 단위 회관이 가장 흔했지만 그보다 더 큰 단위인 성 단위 회관도

많았으며 청말에 이르면 전현직 관료뿐 아니라 지역 출신 대상인들도 회관을 후원하고 이용함에따라 회관의 숫자와

크기, 시설 등은 도시에서 해당 지방 출신들의 위상을 잘 보여줬다.청이 망해도 회관은 계속 늘어났다,

청대에 비하면 늘어나는 수는 줄었지만 신해혁명 이후 회관은 반청, 반만주족 운동의 거점으로 변하였다.

또한 과거가 폐지됨에 다라 이전부터 진행된 회관의 직종회관화, 일종의 길드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민국시기 도시 이주민들은 출신에 따라 직업을 갖는 경향이 있었는데 가령 청말부터 안휘성 출신 이주민들이 베이징의

연극계를 장악하자 안휘성 회관은 지역 출신의 친목조직임과 동시에 연극업계의 직업회관적인 성격도 동시에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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