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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진 이중제국 잡소리, 부다페스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91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0
조회수 : 846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7/11/26 21:35:15



물론 대타협, 1867년 이전에도 부다페스트는 헝가리의 중심지였지만 대타협 이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면서 더 중요해졌으며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부다페스트는 1867년부터 1914년까지 이중제국 안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한 도시이며 가장 근대적인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다. 이 기간동안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이전에 비해 3배가 늘어나 약 80만 명에 달하였다.

부다페스트의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중제국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유럽국가의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다페스트는 원래 부다와 페스트 시가 합쳐진 것어었기 때문에 개발할 수 있는

면적이 충분하여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나는 것을 고층빌딩이 없더라도 비교적 수월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발전의 상징인 방사형 도로는 1872년에 만들어졌고 노면전차 노선은 1889년에 완성되었으며

지하철은 유럽대륙 최초로 1896년 개통했다.

(대륙에서 최초인 것은 영국이 세계최초로 지하철을 개통했기 때문)


이시기 부다페스트를 대표하는 산업은 헝가리에서 가장 발전한 공업이었던 제분공업이었다.

헝가리 왕국 내에서 재배하는 밀을 모두 가공하던 부다페스트의 제분공업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로

상당한 수준에 다다랐다. 이외에도 가축 사육에 기반한 통조림 등의 식료품 공업, 가죽공과 직물, 염색, 자동차,

건축 자재 공업도 부다페스트의 자랑거리였다.


산업 외에 부다페스트의 자랑이라면 유럽 전역에서 유명한 온천이 있었다. 이중제국 시기 철도망과 도로를 정비하자

유럽 전역에서 부다페스트의 온천으로 관광을 왔으며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부다페스트 광천수는 병에 담겨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갔다.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듯이, 폭발적인 도시 인구 증가는 전염병의 유행을 불러왔다.

1892년 하수가 수원지로 흘러들어 발생한 콜레라 유행은 희생자가 많지는 않았지만 부다페스트 시민들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발전하는 근대도시에서 콜레라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모습은 부다페스트 시가 하수 시스템을 재정비하도록

만들었다. 전염병 이외에 열악한 주거환경도 부다페스트의 어두운 면이었다. 상류층과 중산층을 사는 지역을 제외하고

부다페스트는 넓은 시 면적때문에 고층빌딩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늘어난 시민은 대개 단층짜리 집에서 벽을 세우고

나눈 부다페스트식 원룸에 살았다. 도시 인구의 3/5이 이런 단칸방에 거주했으며 부족한 화장실, 혼잡한 주방은 각종 사고가

생기기 매우 충분했다. 단칸방이라도 땅 위에 사는 이는 그나마 괜찮은 축이었다. 부다페스트의 빈민굴을

방문한 다른 유럽사람들은 부다페스트의 지하실에 거주하는 빈민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원칙적으로 지하실은 거주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는 존재하지 않으나 당대 기록을 보면 상당한 이들이 지하실에서 쥐처럼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특이한 점을 하나 꼽으라면 높은 유대인 비율이었다. 부다페스트 인구의 20%에서 25% 정도가

유대인일 정도로 유대인은 부다페스트에서 매우 중요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헝가리 귀족을 비롯한

헝가리인 상류층에게는 경멸, 중산층과 하층민에게는 적의에 가득 찬 눈초리를 받았지만 전반적으로 헝가리에

많이 동화된 상태였다. 단순히 조상이 유대인이기만 하고 유대교를 믿지 않고 가톨릭이나 개신교로 개종한 유대인도

상당 수 있었으며 유대교를 여전히 믿는다 하더라도 헝가리식 이름을 붙이는 등 헝가리 사회에 상당히 녹아들어 있었다.

부다페스트의 유대인들은 부다페스트 발전과 헝가리 발전에 상당히 공헌하면서 그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헝가리인의 출세루트인 관직이나 군인에서는 성공을 거두기가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변호사, 의사, 기자 등 민족차별을 덜 받을 수 있는 직종으로 진출했다. 그 결과 1910년 조사에 따르면 부다페스트에 있는

7천여명의 변호사 중 40%, 2,200여명의 의사중 60%, 1,200여명의 기자 중 40%를 차지할 정도였다.

특히 변호사와 의사는 부다페스트 유대인이 가장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였는데, 자신의 능력만으로 승부를 볼 수 있는

두 직종은 알게 모르게 존재하는 민족차별 과는 상관 없이 살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능력만 좋다면 헝가리인들이 선망하는

장교직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 장교로 출세하기는 어려웠지만 법무장교와 군의관은 유대인에게 상당히

열린 지위였다. 특히 군의관은 사회보다는 매우 적게 벌었지만 군에서 중요한 지위로 존경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유대인 의사들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군의관으로 복무하였고 그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


(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관은 월급이 많지 않아 장교 지위를 유지하는 기본 지출도 지탱하기 버거웠다.

그럼에도 의사면허를 이용한 외부 진료도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들은 사회에 있는 의사보다 경제적으로는 매우 뒤쳐졌다.

물론 몰래 지인과 그들의 소개로 외부 진료를 하는 군의관들이 많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도 이를 알지만

눈 감아 주는 것이 관례였다.)


(여담)

부다페스트의 많은 유대인을 보고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부인 호엔부르크 여공작 조피 마리아는 헝가리인들이 유대인들과

붙어 먹어 유대인처럼 변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물론 그녀는 헝가리인도 좋아하지 않았는데, 헝가리인을 보고

대놓고 훈족이라고 비난할 정도였으니.. 그래서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사라예보에서 암살 당하지 않았었더라도

조피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간의 유대가 깨졌을 거라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당대 헝가리인들도 조피를 좋아하지 않았고 대놓고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죽고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제위를 받으면

이중제국도 끝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호엔부르크 여공작은 개인사로는 매우 불행하였지만, 이런 일화를 보면 영..



오-헝 할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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