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재미진 이중제국 잡소리, 1849년 헌법
게시물ID : history_291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2
조회수 : 69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11/27 00:00:42


엄밀히 말하면 이중제국시기는 아니지만 대타협에 큰 영향을 미친 사건입니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1848년 혁명은 구시대적인 면모를 많이 가지고 있으며 전통을 중요하게 여기던

오스트리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1848년_독일연방.png

1848년 독일연방 권역


프랑크푸르트를 중심으로 독일 연방에서 일어난 혁명은 최종적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에서 제정된 헌법을

독일 연방의 각 구성국들이 수용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과 국민회의에 의하여 독일 연방을 대체하여

도이치민족의 국가가 될, 입헌군주제의 독일제국 황제로 추대된 프러시아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황제위는 의원들이 추대할 수 없다고 거부하면서 실패하였다.


독일연방의 다른 지역은 혁명 실패 이후, 강력한 탄압과 회유로 혼란이 진정되었으나,

오스트리아에서는 혼란이 쉽게 진정할 것 같지 않았다. 이는 다른 독일연방 구성국들과는 다르게

오스트리아 안에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혁명가들 이외에도 민족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848년 혁명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토인 보헤미아(체코), 헝가리, 이탈리아, 크로아티아

에서 민족주의자들이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런 움직임을 진정시키기 위해 오스트리아는 1848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영토내의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제헌의회를 구성하였다. 제헌의회는 오스트리아제국을 연방국가로 변화시켜 각 민족의 평등한 관계를

구축하고 양원제 의회를 선출하여 입헌군주제로 오스트리아를 변화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제헌의회가 결정한 헌법초안을 승인하는 것을

거부하고 1849년 3월 4일, 재상, 슈바르첸베르크가 제안한 헌법을 반포했다.

이 헌법은 오스트리아제국을 연방국가가 아닌 중앙집권 국가로 한정하였고 제헌의회가 제시한

자유주의적 요소가 상당히 제거되었지만 제헌의회가 요구한 양원제 의회 개설, 각 민족의 평등을 명시했다.


그러나 1849년 헌법은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오스트리아 정부가 시간을 벌기위한 일시적인 유화책에 불과했다.

헌법은 반포만 되었고 실제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결국 1851년 12월 31일,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칙명에 의해

1849년 헌법은 폐기되었다.


이후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제군주로 군림하며 통치했다. 제국의회는 설치되었으나 자문기관에 불과했으며

의원도 황제가 지명했다. 오스트리아는 1848년 이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으며 자유주의자 뿐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각 민족의 불만은 점차 쌓여갔다.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