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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잔 다르크 정정화 독립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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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드림해적선장
추천 : 7
조회수 : 119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8/03/01 00:3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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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가만있자. 올해가 몇 년도지? 1991년 이구려. 왠지 올 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 같은데…..참 한 많은 세월이었구나.

이런! 내가 사람을 앞에 두고 혼잣말이 너무 길었나? 이해해 주구려. 나이가 90이 넘으니 눈도 침침하고 어제도 오늘 같고, 그래요. 인사가 늦었구려. 내 이름은 정정화라고 해요. 그게 누구냐고? 어떻게 설명한다. 독립운동 하면 다들 김구선생님과 유관순 동생을 떠 올리니. 나도 잘 나가던 여자 독립투사인데 말이야.


아 ‘녹두 꽃’ 이라는 내가 쓴 회고록이 있긴 한데, 책 팔려는 건 아니니 흉은 보지 말아요. 그냥 그렇다고. 

요즘 사람들에게 어필 하기 위해서 그럼 내 별명을 하나 소개 하리다.


상하이에서 유학을 하면서 동아 일보 특파원으로 활동하던 우승규란 분이 아 글쎄 나 보고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했지 머유. 낯 부끄럽지만 내가 이래뵈도 남자들도 하기 힘들다는 독립운동을 꽤나 열심히 그 것도 잘 했다 우.

다들 상해 임시 정부 알지요? 임정요원들 중에 내가 해준 밥 한 끼 안 먹어본 사람 없어요. 그렇다고 내가 밥만 한 건 아니고.

아 이럴게 아니라 말 나온 김에 나 살아온 이야기 좀 들어 주구려. 나이 들어 주책이라고 흉 보지 말고! 여성 독립운동가는 나 보다 2살 어린 유관순 동생만 있었던 게 아니라 정정화란 여자도 있었구나 하고 오늘 하루만이라도 기억 해줬으면 해서. 그럼 내 힘 닿는 데로 한 번 이야기 해 보리다.

난 1900년 8월3일에 2남 4녀 중 얼굴도 안 보고 데려간다는 셋째 딸로 태어났다오. 정이품 수원유수로 재직 중이시던 우리 아버지 존함이 정주영인데, 여러분들이 잘 아는 그 분과는 다른 분이라오.


난 무려 11살 때 시집을 갔어요. 우리 시댁도 구한말 고위 관리집안 이었는데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지위를 반납하고 독립운동에 뛰어 들었어요. 요즘 말로 하면 금수저가 될 텐데 부자들이나 기득권 중에 우리 시아버지 같은 집안도 있다오.

우리 서방님도 나랑 동갑 이었으니 우리는 소꿉장난 같은 결혼 생활을 시작했어요. 헌데 나라 꼴이 우습게 되었으니 나랑 서방님은 재미난 기억 보다는 서글펐던 기억이 더 많아요. 그래서 더 애틋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20살이 되던 해에 시아버지와 서방님은 조선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독립운동을 위하여 상하이로 떠났어요. 처음에는 조신하게 집안 살림을 하는 것이 서방님과 아버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오. 하지만 난 1년 후 생각을 바꾸고 친정 엄마를 찾아 갔어요.

나라가 왜 놈 손에 넘어갔는데 부자 집 며느리라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암.!나라 되찾는데 남녀노소가 어디 있어!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날 보내 줄는지 걱정이 많았다우.

하지만 내 걱정은 기우였어요.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님도 참 대단한 분이야.

“네 시아버님과 남편도 여생을 편히 지내기 위해 상해로 간 것이 아닌걸 알고 있지? 그 곳의 생활은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힘들 것이다. 하지만 생활이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로 네 앞길을 막고 싶진 않구나. 이 노자 돈은 요긴 할 때 쓰도록 하거라.”

너무도 쿨 하게 보내 주시니 되려 섭섭하던 걸요.

그 길로 나는 상해로 떠났는데 믿기지 않겠지만 난 혈혈단신으로 국경을 넘었다오. 그렇게 상해 임시정부에 도착해 보니, 홀아비 냄새가 어찌나 심하던지.

시아버지와 서방님만큼 많은 분들이 날 반겨 주었다오. 제대로 된 집 밥 좀 얻어 먹겠구나 싶으신 거지만.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게 새로운 임무가 부여 되었어요. 국내를 오가며 독립자금을 모금 하는 것이었어요. 1920년부터 9년 동안 무려 6차례나 조선을 다녀 왔는데, 이것이 가능 했던 이유는 연통제라는 비밀연락망과 2명의 비밀 요원이 있었기 때문이라오. 조선으로 가기 위해서는 단동을 반드시 거쳐 배를 탄 후 신의주로 들어가야 했어요. 이 일을 가능하게 해준 2명의 비밀요원에 대해서 간단히 말씀을 드리리다.


단동 관할 요원 :

본명 최석순. 나카무라로 창시개명 후 현직 일본 형사로 위장근무 중.

주요 임무 : 신의주로 나가는 임정요원들의 안전한 호송을 책임 지고 있음.

신의주 관할 요원 “

본 명 : 이세창. 신의주 양복점 직원으로 활동.

주요임무 : 신의주에서 국내 기차 편 및 은신처 제공.


일본 순사로 위장 활동 중이던 최석순님께서는 나를 처음 본 날 몹시 놀라셨다오.

“여….여자였소? 거기다 이렇게 젊다니……아무튼 먼 길 오느라 고생 하셨소. 오늘은 우리 집에 가서 편히 쉬고 내일 신의주로 가는 배를 타도록 합시다. 오히려 일이 쉬울 수도 있겠소. 나이 어린 여자이니 내 여동생으로 위장 하면 아무도 의심 하지 않을 것이요.”

이렇게 나는 일본순사의 여동생으로 위장하여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에 도착을 해 또 다른 비밀요원인 이세창을 만났다오.

이 분은 나라가 망하기 전에는 천대받던 서민 이었는데, 자신을 괄시하던 그런 나라를 되찾겠다고 독립운동을 하던 훌륭한 분이었다오.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심지가 굳은 참 사내중의 사내였다오. 날 처음 만나고 떠나 보내면서 한 말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데, 어린 여자가 이런 일을 하는 것에 몹시 감동을 받았던 거 같아요. 무뚝뚝한 말투지만 정과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거. 몸조심 하라요. 내레 솔직하게 한마디 하 갔는데, 젊은 아주머니레, 더구나 귀골로 곱게 산 사람이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시다. 독립 운동하는 유명한 사람들이레 하나같이 다 이런 험악한 일을 하는 건 아니디요? 나 같은 놈이나 하는 일인 줄 알았거든.”


이렇게 조선을 6차례나 오가며 최석순 요원, 이세창 요원과 짧은 만남이지만 동지애를 쌓아 가던 어느 날 우리의 비밀루트가 발각되었어요. 일본 순사로 활동 중이던 최석순 요원은 다행히 도주에 성공하였지만, 나는 종로경찰서로 연행이 되었어요. 나라를 위한 일이지만 막상 어린 나이에 일제치하에서 악명 높던 종로경찰서로 끌려가는 길은 너무나 무서웠다오.


“이 쥐새끼 같은 년! 네 년 때문에 모가지가 날아간 대 일본제국 경찰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아느냐? 넌 오늘 내 손에 걸린 이상 죽은 목숨이다 각오해라.”

“내 당신에게 독립운동을 하란 말은 안 하겠지만, 어찌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의 개가 되어 같은 조선인을 잡으러 다닐 수 있소? 해방 후 훗날이 두렵지 않고 후손들 볼 면목이 없지 않소?”

“이 년이 아직 주둥아리를 나불거릴 힘이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구나. 저기 너랑 잘 아는 놈 한 놈이 고문에 못 이겨 기절해 있으니 깨어나면 인사나 하거라. 낄낄낄.”


온 몸이 피 칠갑이 되어 쓰러져 있던 분은 신의주에서 양복점 운영으로 위장한 이세창씨였다오. 아는 척 하고 싶었지만 조직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 없었다오. 이세창씨가 깨어나자 조선인 순사 김태식은 다시 모진 고문을 시작 했다오.

“이 독한 새끼야! 빨리 저 년을 안다고 자백을 해라. 그리고 네 놈이 실어 날랐던 나머지 놈들의 이름도 대란 말이다.”

“거 아 새끼래 참 말로 사람 말 못 믿는구나. 모르는 사람을 어찌 안다고 한다네! 아! 내가 깜빡 했구나. 네 놈은 사람새끼가 아니라 왜 놈의 개 란걸.. 근데 말이다. 내가 무식하고 못 배웠지만서도 네 놈이랑 다르게 심지가 굳어서 알아도 안다고 말 안할 거이니. 직이던지 살리던지 니 맘대로 해라야.”

이세창 요원은 끝내 죽음에 이를 때까지 의연하게 조선인 순사 김태식의 고문을 견디셨어요.


이런 분들의 값진 희생을 통해서 우리는 드디어 독립을 맞았지만, 타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우리와 임정요인들은 고국으로 바로 돌아 갈 수가 없었다오. 자랑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은 조선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들인데 조국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라우. 그래도 여러 가지 바쁜 업무가 있겠지 하고 때를 기다렸어요.


우리는 이듬해 5월이 되어서야 부산으로 겨우 들어와 서울행 열차에 올라탔는데, 정차 역 마다 경찰이 올라와 우리에게 반말을 하며 위세를 부리는 꼴이 꼭 왜정 때의 일본 순사 같았다오. 아니 우리가 독립투사들인데 왜 조선의 경찰들이 우리에게 그리 대하는 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오. 먼가 이들이 착각을 하고 있거나 고된 업무 때문에 피곤해서 그러는 줄 알았어요.

숨가쁘게 달려온 내 인생은 브레이크 없이 또 한 번 시련을 맞는데 6.25전쟁으로 우리 서방님이 그만 납북이 되고 말았다오.

그러던 1951년 9월 어느 날 난 종로 경찰서에 다시 잡혀 가게 되었어요.

종로 경찰서의 경찰은 나 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대우도 없이 갑자기 내 뺨을 후려 치더니 자백을 강요 하기 시작했소. 독립운동을 하던 내가 해방된 조선에서 조선의 경찰에게 영문도 모르고 뺨을 맞을 줄은 몰랐다오.


“이 빨갱이의 여편네! 지난 밤에 네 년을 찾아온 년이 누구냐? 북에서 온 간첩이지?. 이 빨갱이들은 하여튼 다 잡아 죽여야돼.. 가만 있어봐라? 이 년 어디서 낯이 익은데? 어라? 하하하하 이게 얼마 만이냐? 참으로 반갑구나 정정화!”

그 놈은 일본의 개로 활동 하던 일본순사 출신 김태식이었다오. 이 자를 종로 경찰서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그 순간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어간 많은 분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지나갔고, 내가 이러려고 독립운동을 했나 싶은 자괴감이 들었다오.


나는 다행히 고마운 변호사님의 도움으로 집행유예로 풀려났는데, 그 변호사님은 훗날 유신정권에 항거한 이병린 변호사님이었다오.

역사란 걸 돌아보면 악인도 많지만,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한 의인도 참으로 많은 것 같지 않소? 그래서 희망과 절망이 공존 하는 것 같은데 부디 우리 후손들은 나 보다는 조금 더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하는 게 내 간절한 마음이요.

그리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들이 살고 있는 그 세상에는 이제 친일파가 시원하게 척결 됐지요?

<정정화 선생님은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셨고, 1991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 되었다.>


PS : 2016년 1월 첫 출근 날 퇴사 권유성 좌천을 통보 받았습니다. 40대 중반을 향햐 가던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 이었습니다.

공항장애 초기 증세를 겪으며 지옥 같은 회사 생활을 이어 가던 중, 아내의 권유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무턱대고 역사관련 글을 쓰기 시작했고, 이름 모를 당신들이 달아준 댓글에..ㅜㅜ 힘을 얻어 출판사에 투고를 하였습니다.

그 동안 제 글을 읽어 주시고, 댓글을 달아 주신 여러분들이 함께 만들어 준 책입니다.

제 글이 책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기적같이 출판사와 계약도 하고 이렇게 제 인생 첫 책이 나와

소식을 전합니다.

직장과 가사, 삶에 지친 모든 분들이 저를 보금고 용기를 가졌으면 합니다.

저는 화려한 스펙도 금수저도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한 가지 잘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니 모두들 도전해 보는 2018년이 되었으면 합니다.

책 제목은 <찌라시 한국사>로 조금 자극적이지만, 내용 만큼은 충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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