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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사건'을 다룬 1970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
게시물ID : history_294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잉여고3
추천 : 0
조회수 : 2014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04/16 16:5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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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에 얽힌 기재(奇才)의 자폭

日 작가 미시마 할복자살 언저리

'군국(軍國)' 외친 국수주의

"일본은 뒤틀렸다" 자위대원 앞서 연설 후 고식(古式) 따라

시대착오적 행동

치밀한 사전계획…사건 나자 우익단체서 극성
천황 중심 정치의 전전복활(戰前復活) 풍조


사건 경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 康成) 다음가는 '노벨'상 후보 작가로 알려진 천재적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 由紀夫)는 일본 특유의 무사도(사무라이)적인 할복 자살로 끝을 맺었다.
 이 사건은 세계적인 작가 '미시마'의 행각이 무엇이었든 간에 '천재와 광기'에 얽힌 불가사의라는 것이 일본 일반의 여론이다.
 '미시마'와 '모리타'가 자결한 것은 25일 오후 12시 15분. '미시마'가 처음 총감 책상 앞 양탄자에 제복을 벗고 단도로 배를 가르고 옆에 있던 '모리타'가 일본도로 '미시마'의 목을 쳤다.
 이어 '모리타'도 미시마'와 똑같이 배를 가르고 잇따라 동료 '오가와'가 '모리타'의 목을 쳤다. '모리타'는 나이 25세. '미시마'는 45세.
 장소는 전전(戰前) 일본 육군의 기간장교를 양성한 육군사관학교. 지금은 육상자위대 동부방면총감부. 이날 '미시마'가 '다테노카이'(循之會=방패의 모임이라는 뜻) 제복(옛 사관학교 제복)에 회원 4명을 데리고 총감부 정문에 들어선 것은 오선 10시 40분. '미시마'는 바로 '마스다' 총감을 만나 일본도로 총감을 위협, "전 대원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달라"고 요구했다.
'미시마'는 전날 전화로 총감 면회를 요청한 바 있어 이 때 '마스다' 총감 자신은 장난하는 줄만 알았다.
 점점 사태가 심각해지자 '요시마쓰'(吉松) 막료부장(幕僚副長)은 하는 수 없이 약 1천여 명의 자위대원을 연병장에 집합시켰다.
 '미시마'는 일장기 띠(히노마루 하치마키)를 머리에 두르고 2층 베란다에 나가 다음과 같이 연설하기 시작했다.
 "지금 일본 안에서 유일하게 일본혼(日本魂)을 갖고 있는 것은 자위대 뿐이다. 그러나 자위대가 일본의 근본을 바로잡지 못하는 것은 일본이 뒤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자위대원 안에서는 "집어치워라"고 야유가 터져나왔다.
 '미시마'는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작년 10월 21일 무엇이 일어났는가. '신주쿠'(新宿)에서의 반전 데모가 경찰에 의해 제압되고 말았다. 자민당은 지금 어떠한 데모도 경찰의 힘으로 진압할 수 있다고 자신을 갖게 되었다. 이로써 헌법 개정의 길은 없어지고 말았다.
 자위대가 20여 년간 기다렸던 헌법 개정이 정치의 프로그램에서 벗어나고 말았다. 일본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가. 천황을 중심으로 한 피와 문화와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자위대가 들고 일어날 것을 지난 4년동안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은 무사(武士)들일 것이다. 그러면 자신을 부정하는 헌법을 왜 지키고 있단 말인가. 왜 굽실굽실하고 있는가. 이것이 있는 한 너희들은 영원히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어째서 이런데 생각이 못 미치는가."
 여기까지 연설한 후 '미시마'는 다시 숨을 돌려 "나의 뒤를 따를 사람은 없는가"고 외쳤으나 대원들은 오히려 "무슨 소리냐"고 차가운 야유만을 던졌다. '미시마'는 때로는 대원들을 위압하는 듯 높은 소리를 지르기도 했고 때로는 애원하듯 설명했으나 신통한 반응은 없었다. 이 때 '미시마'는 "나를 부정하는 자들에게는 따로 생각이 있다"고 한 마디 던진 후 '천황폐하만세'를 외치고 총감실로 자리를 떴다. 순간 '미시마'는 배를 갈라 자살하고 말았다.

여파
 25일 일본 경시청은 이 사건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고 '미시마'는 처음부터 자결을 각오하고 있었다고 단정짓고 있다. '미시마'가 23일 '팰리스' 호텔에서 모의한 내용으로 보아 일종의 쿠데타 상태를 일으키려고 했다고 보고 있으며 이 사건이 앞으로 우익 단체를 자극, 이와 관련된 색다른 행동이 벌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이 사건이 발생한 25일 오후 도쿄(東京) 시내에서는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자위대 정문 앞에서는 자칭 '사자(獅子)행동대'가 나타나 "'미시마' 선생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외쳤고 '호국단' '지성(至誠)동지회'는 방위청에 전화를 걸고 "'나카소네' 장관의 발언은 이상하다. 만나게 해 달라"고 장관 면회를 신청하기도 했다.
 도쿄 한복판 '스키야바시' 공원에서는 애국당에서 임시뉴스를 마이크로 소개하면서 "'미시마'는 시민들의 눈을 뜨게 한 위대한 행동을 했다"고 찬미하는 등 우익단체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일본 각계에서는 한마디로 "놀랄만한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미시마'의 격문에서 지적된 "명예스러운 국군을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자" "같이 일어나 의(義)를 위해 같이 죽자" "천황 중심의 정치" 등의 문귀는 확실히 전전(戰前)의 우익 단체의 외침과 흡사하다.
 이런 점에서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이 돤 5·15 사건, 황도(皇道)파 일부 창년장교가 국가 개조를 외치고 일어났던 1936년의 '2·26' 사건과 비교하는 이도 많다.
 특히 일본 신문들은 극렬한 내셔널리즘과 자신의 길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점은 전전의 우익과 조금도 다른 점이 없지만 이번 사건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 일부 학자는 "2·26 사건 등의 배경에는 농촌의 피폐 정치의 부패 등이 심해 그 나름대로의 동기가 있었고 어느 정도의 국민의 공감을 얻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고 조심스럽게 논평하고 있다.
 어쨌든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국군주의적인 징조의 시작 또는 군국주의 부활이라는 점에 새로운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은 틀림없으며 일반의 전례 없는 위기감과 초조감을 던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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