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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대기근 (1845년 ~ 1849년)
게시물ID : history_294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사광황
추천 : 8
조회수 : 3379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8/04/26 16:20:41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45

기근은 전쟁, 인플레이션, 흉작(凶作), 인구 불균형 또는 정부 정책을 비롯한 여러 요인에 의해 야기된 광범위한 식량부족 상황을 말한다. 기근이 발생했을 때의 많은 죽음을 특정 사건이나 특정 대상을 비난하는 단순한 해석은 적절치 않다. 여기에는 문화, 정치, 경제, 작물과 병균, 기후의 역사 뿐만 아니라 지질학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요소가 있다.

1800년대 초 아일랜드의 가난하면서도 급격히 증가하는 농촌 인구는 거의 하나의 농작물에 의존하게되었다. 감자만이 아일랜드 소작농들이 영국 지주들에게 수탈당하면서도 가족을 부양할 수있는 식량이 되었다. 저급하게 여겨졌던 감자는 농업에서 놀라운 작물이었지만 전체 인구의 삶을 흔들 정도로 아주 위험한 작물이기도 했다. 때때로 일어나는 감자의 흉작은 1700년대와 1800년대 초 아일랜드를 괴롭혔다. 그리고 1840년대 중반에 곰팡이에 의한 마름병이 아일랜드 전역의 감자를 덮쳤다. 몇 년 동안의 감자 흉작은 전례없는 재앙을 불러왔다. 그리고 아일랜드와 미국 사회는 엄청나게 바뀌었다.

좀 다른 이야기가 되겠지만, 기근의 규모를 한 축으로 하고, 빈도수를 한 축으로 하면 기근은 멱함수를 따른다고 볼 수도 있다.(http://yellow.kr/blog/?p=2824 참조) 이 말은 대기근이든 작은 기근이든 비슷한 구조에 의해 발생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역사적으로 가장 잉여 농산물이 많은 현재에도 아프리카 등에서 기근은 계속 발생하고 있는데 그 원인을 아일랜드 대기근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이런저런 자료로 정리해 보았다.

(1) 대기근의 배경

◎ 기후와 토양 그리고 감자
아일랜드의 조그만 국토엔 늪지대와 얕은 호수가 많다. 토양이 산성이라서 나무나 곡식이 잘 자라지 않아 늘 가난 속에서 살아왔다. 기후는 북위 50도나 되는 고위도 지방이지만 멕시코 만류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따뜻한 편이다. 그러나 비가 자주 내리고 매우 습한 기후를 보인다. 이러한 기후로 인해 토지는 항상 녹색을 띄고있어 아일랜드를 '녹색의 나라'라고도 부른다.
영국의 식민지로 가난에 찌들어 있던 아일랜드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감자가 전파되면서부터다. 감자는 1600년 전후 남아메리카에서 도입되어 아일랜드에서는 17세기 후반에 상당한 규모로 재배되었다. 감자는 심어보니 기가 막힌 식품이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아일랜드에서도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
감자는 곧 아일랜드의 주 식량이 되었다. 전 국토가 감자밭으로 개간되기 시작했다. 감자는 1690년대에 스코틀랜드인들이 당했던 극심한 기근을 아일랜드인들이 모면하게 해준 귀중한 주식이 되었다. 아일랜드의 감자 재배는 그 뒤 반세기 동안 20배로 늘어났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 곡식 가격의 상승은 경작지의 확장과 감자 재배의 절정기였다. 아일랜드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수가 필요한 열량의 4분의 3 이상을 감자에서 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 식민지
사람들이 흔히 잊어버리지만 아일랜드는 세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식민지였다. 아일랜드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부유한 곳이 될 수 있었지만 800여년의 식민 지배를 겪는 바람에 망해버렸다. 아일랜드의 지위는 식민지 시대의 아메리카,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중상주의 이론에 따르면 식민지의 목적은 원료와 시장을 공급하고 대도시의 권력자를 영원히 부유하게 만드는 데 있었다. 따라서 아일랜드는 영국의 권력자를 부자로 만들어야 했다. 게다가 세계에서 대부분의 식민지처럼 저개발되었을 뿐 아니라 인구가 감소한 몇 안되는 곳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오늘날의 아일랜드는 19세기 초의 인구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
17세기에 들어서자 아일랜드에는 전례 없는 잔혹한 사건이 잇달았다. 1641-53년과 1689-91년 두 차례에 걸친 잉글랜드 내전에서 아일랜드는 철저하게 짓밟혔다. 이러한 상황에 농토마저 남아나지 않았다. 더욱 척박해진 환경과 소작의 대가로 얻은 땅 한 뙈기에 심을 작물로 아일랜드인들은 영국인들이 수탈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감자를 심을 수 밖에 없었다.
19세기 초 아일랜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빈곤함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 동요, 종교정책의 실수, 인구 증가, 가혹한 지주들과 영국의 그릇된 지배 때문이었다.
1841년 아일랜드인의 2/3 이상이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나머지 1/3의 상태는 형편없었다.

◎ 인구
1770년대에 영국이 산업혁명으로 공업화되면서, 또 1800년대에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엄청나게 많은 감자를 수출할 수 있었다. 곡물가격이 상승하자 감자 경작지 확장이 계속되었다. 일손이 필요해짐에 따라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이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은 유럽 대륙보다 영양상태가 좋았다. 성인이 감자를 하루에 7kg, 여자와 아이들도 5kg 정도를 먹었기 때문이다. 풍부한 식량으로 인해 1700년대에 200만 명이던 인구는 1800년대에는 500만 명으로 늘어났고, 1821년에는 700만 명이 되었다. 대기근 발생 직전인 1845년에는 850만 명에 이르러 인구밀도가 유럽에서 가장 높았다.
아래의 아일랜드 인구 수치는 정확성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영국 정부의 10년 주기 인구 센서스 통계이다.
1821년 - 6,801,827 명
1831년 - 7,767,401 명
1841년 - 8,175,124 명
1851년 - 6,552,385 명


(2) 대기근의 원인

◎ 감자 마름병
감자 전염병이 아일랜드에서만 발생한 것도 아니다. 미국 농가의 감자밭을 휩쓴 ‘감자 잎마름병’이라는 전염병에 대해 영국 최초의 보도가 나온 시점은 1845년8월16일이다. 첫 보도 이후 각지에서 무수히 많은 보도가 쏟아졌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북부 프랑스와 영국 남동부 지역이 전염지역으로 입에 오르내렸다. 얼마 안 지나 감자 잎 마름병은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이 균이 아일랜드를 덮친 것은 1845년 10월이었으며 가을에 수확해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썩기 시작하면서 재앙이 닥쳐오고 있음을 알렸다. 밭에 남아 있던 감자들과 저장해 놓았던 감자들이 다 썩어갔다.
감자잎마름병이 다시 발생한 것은 아일랜드에서 가장 온난하고 다습한 서쪽 끝 지방에서였다. 1846년 이른 여름이 되자 서풍을 타고 1주일에 80km의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8월 초에는 아일랜드 전역을 휩쓸어 무성했던 감자밭이 하룻밤 사이에 썩어 버렸다. 1846년에 감자 수확량이 4분의 3 이상, 심한 곳은 90%나 감소했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매우 좁은 땅에서 감자 농사에 전념했기에, 감자 생산이 준다는 것은 식량이 소진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 유럽이 공유한 전염병에서 왜 아일랜드만 극심한 피해를 받았을까.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여건. 덥고 습기가 많은 기후로 전염 속도가 빨랐다. 두 번째로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밀과 귀리 같은 작물은 대부분 영국으로 반출되고 아일랜드 주민들은 먹고 살기 위해 감자 재배에 매달렸다.  세 번째는 영국 식민당국의 뒷북 행정과 식민지에 대한 차별. 번번이 대응 방향을 잘못 잡고 시기를 놓치면서도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다.

◎ 영국의 정책
감자를 못 쓰게 만든 것은 감자 역병균이었지만 수확 실패를 대기근으로 바꾸어 놓은 것은 아일랜드의 영국 통치자들이 행한 독단적인 자유방임 정책이었다. 1845년 당시 영국은 온통 자유방임주의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영국 정부는 식민지 아일랜드인들이 게으르고 자립심이 없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원조를 외면하다시피 했다. 대기근 동안 지원한 구제사업비는 고작 810만 파운드. 몇 년 뒤 크림전쟁에서 지출한 전비의 20%도 안 되는 액수였다. 이런 처사에 아일랜드인은 분노했고 지금까지도 영국인을 증오하고 있다.
사람들이 굶어 죽어 나가는 마당에서도 곡물 수출을 강행한 계층은 부재 지주. 영국인이나 영국계 아일랜드인들인 땅 소유주들은 구제보다 자기 몫 챙기기에만 눈을 돌렸다. 심지어 대기근의 틈을 타 소작인들을 쫓아내는 악행도 유행처럼 번졌다.
아일랜드 정치인들이 농민과 주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점도 대기근의 화를 키웠다. 아일랜드는 1801년 영국과 통합 이후 105명을 영국 의회 하원에, 28명을 상원에 보냈으나 따로 놀았다. 1832년부터 1859년 동안 의원의 70%가 지주 또는 지주의 아들이어서 아일랜드 주민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그리고 철옹성 같던 영국의 곡물법은 끊임없는 반곡물법 운동과 참정권 요구,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무너졌다. 반곡물법 운동이 선거법 개정 요구와 맞물려 사회 불만 요소로 자리 잡고 아일랜드의 대기근이 발생, 수십만 아사자가 나오는 상황에 봉착한 로버트 필 수상은 1845년 말부터 생각을 바꿨다. 곡물법을 없애지 않는 한 영국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그는 폐지론자로 돌아섰다.

◎ 영국 지주와 아일랜드 소작농
1846년 서부 밸린그래스에서 한 부재 지주가 군 병력을 동원해 소작농 76가구가 사는 마을을 불 태우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강제 퇴거가 줄을 이었다. 강제 퇴거 이유는 감자 흉작으로 소작료를 내지 못했기 때문. 연간 수입 4파운드 이하인 소작농을 거느린 지주들이 구빈세를 부담해야 한다는 법규 또한 강제 퇴거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세금을 내느니 소작농들을 몰아내 고소득 작물을 재배하는 대농장을 만들겠다는 지주들의 선택으로 약 30만명이 고향에서 영원히 쫓겨났다.
영국인 부재지주 중에서 소작인들을 축출하지 않은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강제 퇴거 당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처벌하는 법까지 만들 정도로 영국인들은 아일랜드를 괴롭혔다. 지주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만든 밑바닥에는 민족적 우월감과 맬서스주의가 깔려 있었다.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 ‘빈민가를 더 좁고 더럽게 만들어 전염병이 돌도록 유인해야 한다’던 경제학자 맬서스식 사고로 영국인들은 ‘열등민족 아일랜드의 불행’을 당연한 귀결로 여겼다.


(3) 대기근의 결과

1921년, 아일랜드가 독립을 쟁취했을 때 인구가 대기근 이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끔찍한 상황을 잘 말해준다.

◎ 백만 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는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는데, 거기에는 영양 미달의 사람들이 매서운 겨울 추위에 노출되고, 죽 급식소(soup kitchen)와 작업장에서 전염되며, 위험한 공공작업을 수행하는 등 수많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 미국으로의 이주
아일랜드인들은 1700년대부터 노동자, 일꾼, 하인 등으로 미국으로 이주해 왔으나 매우 수가 적었다. 초기 아일랜드 정착민들은 주로 동북부의 대도시에 거주했다. 1820년대부터 '이리 운하'를 비롯한 대규모 토목 공사에 많은 아일랜드 노동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고 이들 노동자들을 기반으로 아일랜드 이민자 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840년대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계기로 수 백만의 가난한 아일랜드인들이 미국과 캐나다로 이주하기 시작한다. 기근이 끝난 이후에도 많은 수의 아일랜드인들이 가족을 찾아 미국으로 이주해 온다.
아일랜드인들은 주류 사회의 차별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힘겹게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아일랜드인들은 뉴욕과 보스턴, 시카고 등의 대도시에 거주하여 도시 빈민층을 이루었다. 대부분 영세 소매업과 육체 노동직에 종사한 아일랜드인들은 차별에 맞써 강한 단합력을 자랑했으나 이는 역차별로 작용하여 흑인과 중국계 이민자들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낳기도 했다.
단합력으로 이름이 높았던 아일랜드인들은 사회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사회적인 힘을 키워 나갔다. 아일랜드인들의 노력으로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카톨릭계 학교, 대학교, 자선단체, 공공단체들이 창설되었고 이는 오늘날 미국 카톨릭 교회의 기반이 되고 있다. 또한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은 정치적으로도 단합하여 민주당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보였고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2015 American Community Survey'에 따르면 아일랜드계 미국인 인구는 약 3350만 명이다.


아일랜드와영국인구증가.png

– 영국과 아일랜드의 인구 지수 비교. ‘The vanishing Irish: Ireland’s population from the Great Famine to the Great War’ by Timothy Guinnane (HI 5.2, Summer 1997, p. 33).


※ 발췌 : http://yellow.kr/blog/?p=2900

출처 http://yellow.kr/blog/?p=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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