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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황 (1873년 ~ 1896년)은 제1차 세계대전을 낳았다
게시물ID : history_2946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옐로우황
추천 : 1
조회수 : 332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5/07 12:18:29
1929년 10월 월가의 주식 대폭락으로 시작된 1930년대 경기 침체를 현재 '대공황(Great Depression)'이라고 하지만 원조는 따로 있다. 1873년의 공황이 바로 그것이다. 1930년대를 강타한 대공황 이전까지 ‘대공황’이라고 하면 1873년 공황을 의미했다. 1873년의 공황은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장기불황(Long Depression)’ 또는 '대불황'이다.

1873년 대불황은 인류가 본격적으로 경험한 전 지구적인 장기불황으로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최초의 장기적이고 세계적인 전쟁을 낳았다. 불황의 타개책을 대외팽창에서 찾은 유럽과 미국은 식민지 경쟁을 펼쳐 새로운 시장을 열고 경제 회생에도 적지 않은 성과를 거뒀으나 결국은 전쟁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떠오르던 독일과 지는 해인 영국 간 식민지 쟁탈전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폴라니(Polanyi)는 제1차 세계대전을 19세기 유형, 즉 세력 균형 체제가 작동을 멈추는 바람에 터져나오게 된 강대국들 간의 갈등에 불과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글로벌 철도 투자 열풍과 1860년대 중반의 글로벌적으로 과잉된 생산 지표가 악화되자 악명 높은 '1873년의 공황'은 20여년간의 생산성 저하, 물가의 하락 및 글로벌 포퓰리즘과 보호주의의 등장을 예고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73

1873~1896년 대공황이 '과도한' 경쟁과 '비합리적으로' 낮은 이윤 때문에 풀이 죽은, 무엇보다 사업가들의 병이었다면, 1896~1914년의 '좋은 시절(벨에포크)'은 무엇보다 이런 병에서 회복되어 기업 간 경쟁을 누르고, 결국 수익성을 상승시켰다. 그러나 교역, 생산, 그리고 노동계급 소득의 팽창에 관해서 상승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순간은 소수에게만 화려했고, 그 소수에게조차 이는 단명했다. 몇 년 안에 "군사적 분란"이 파국으로 전환되었고, 19세기 자본주의는 결코 그로부터 회복되지 못했다.

1873년 대불황, 장기불황의 성격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하다. "대공황보다 심각했다"는 평가 반대편에 "생산과 소비가 성장했기에 공황에 끼지도 못한다"는 시각이 상존한다.
대불황의 정도를 단순히 거시경제 지표상의 여러 추정치로만 판단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동시대의 사람들이 불황을 어떻게 느끼고 인식하였는가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그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대불황(Great Depression)'이라는 말은 그 시대에 쓰여졌던 표현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불황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었다.

홉스봄(Eric Hobsbawm)이 말한 '자본의 시대(1848~1875)'가 끝나고 '제국의 시대(1875~1914)'로의 시작 즈음에 1873년의 대불황이 있다. 그런데 어떤 이점이 중심부 국가로 하여금 제국주의적 팽창을 하도록 만들었을까? 여기서 홉스봄은 식민지 확장에 대한 보다 설득력있는 일반적인 동기는 시장의 확보일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대공황의 '과잉생산'은 수출을 지향함으로써 상당 부분 해결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제국주의는 주로 유럽 강대국들이 정치적 보호 장치가 없는 시장으로 자신들의 무역을 확장할 특권을 얻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러한 수출의 압력 뿐만 아니라 열띤 제조업 경쟁이 시작되면서 이들 강대국들 사이에 원자재 공급을 둘러싼 식민지 쟁탈전까지도 포함한다.

1873년 이래 20여 년간 지속된 '대불황'은 이전의 불황에 비해 몇 가지 새로운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그것은 종래의 경기 순환에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오랫동안 진행되었으며 영국 · 프랑스 · 독일 · 미국 등 선진 산업 국가들에서 거의 동시에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대불황은 화학, 전기, 석유 및 철강 분야의 기술 혁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2차 산업혁명과 비슷한 시기에 맞물려 전개되었다.

대불황은 2차 산업혁명기에 나타난 부문간 불균형을 해소하는 일종의 구조조정의 시기였으며, 그 과정에서 자본 집중과 기업 합동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낸 소수의 거대 기업들이 시장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주로 독일이나 미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영국에서는 오히려 그 양상이 뒤쳐진 것처럼 보인다.

영국은 19세기 말까지 세계정부 기능을 수행했다. 그러나 1870년대부터 영국은 유럽의 세력균형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곧이어 전지구적 세력균형에 대한 통제력 또한 상실하기 시작했다. 영국의 세계권력에 대한 독일과 미국의 도전은 서로를 강화하였고, 영국의 국가간체계 통치 능력을 손상시켰으며, 결국 전례 없는 폭력과 광포함이 난무한 상태에서 세계적 우세를 둘러싼 새로운 투쟁이 벌어졌다.

아래의 그림은 브로델(Fernand Braudel)의 장기순환을 보여준다. 대불황의 시기 즈음에 영국 체제의 실물적 팽창 단계에서 금융적 팽창 단계로의 변화로 보고 있다.
브로델의장기순환.jpg


루빈스타인(William D. Rubinstein)은 영국의 19세기 후반 이래 공업의 비중이 그 이전보다 더 떨어진 것에 대해서, 산업 쇠퇴를 경제 쇠퇴와 동일시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19세기 후반에 영국의 산업은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만, 런던 시티를 중심으로 하는 상업-금융 부문은 절정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의 구조적 장기침체(secular stagnation, 경기침체와 소득불평등 심화로 세계 경제가 만성적 수요부진에 빠진 상태)와 가장 비슷한 역사적 사례로 1873년 ~ 1896년의 '대불황'이 대표된다. 당시 영국체제에 독일과 미국의 부상이 현재의 미국체제에 중국의 부상이 비슷하기도 하다.

2008년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2010년에 현재의 경제 상황을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위기라고 강조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 “경기침체는 흔하지만, 불황은 드물다.”면서 “지금까지 불황이라고 할 만한 역사적 사례는 1873년 공황 이후의 장기 불황과 1929~1931년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대공황뿐”이라고 밝혔다. 이어 “두 불황 모두 경기가 지속적으로 떨어진 것은 아니지만, 중간에 나타난 경기회복세가 불황의 타격을 극복할 정도로 충분하지 않아 결국 더블딥에 빠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크루그먼 교수는 2010년 당시의 경제 상황을 세 번째 불황의 초기 단계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1929년의 대공황보다는 1873년과 닮아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각국 정부는 대규모 지출을 기반으로 한 정책을 내세워 지난해 여름 경기침체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인다.”면서 “그러나 훗날 역사학자들은 지금의 경기회복기가 제3의 불황의 끝이라고 기록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2010년 당시 일본의 경제 관료 출신인 ‘미스터 엔’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사카키바라 야오야마 카쿠인대 교수도 "글로벌 경제, 1873년식 대공황 진입 중"이라며 같은 견해를 언급했다.

아래의 그림처럼 콘트라티에프 파동으로도 대불황의 시기를 관찰할 수 있다.
kondratieff1.gif


※ 출처 : http://yellow.kr/blog/?p=2927

출처 http://yellow.kr/blog/?p=2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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