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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체제 (Wiener System, 1815 ~ 1848)
게시물ID : history_295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옐로우황
추천 : 0
조회수 : 144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8/07/16 17:07:21
빈 체제 (Wiener System)는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빈 회의(Congress of Vienna, 1814~1815) 이후 30여 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국제 정치 체제로 절대왕정을 유지하기 위해 각국의 자유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을 억압하는 반동 복고적 성격을 지녔다. 그 반동적인 성격이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당시 처음으로 나타난 국민전이라는 전쟁 형태의 잔혹성 때문이기도 했고 또 당시 많은 나라에서 자본주의 경제가 움트면서 평화의 가치가 엄청나게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보수적 · 반동적인 상호 협조의 기치를 내걸었다고는 하나 처음부터 끝까지 이 체제의 성격으로 일관되었던 것은 상호 견제의 세력 균형 체제였다고 할 수 있다.

※ 옐로우의 세계사 연표 : http://yellow.kr/yhistory.jsp?center=1815

빈 체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의 신성동맹(Holy Alliance)과 4국동맹(Quadruple Alliance, 신성동맹 + 영국)을 기반으로 하였는데, 오스트리아의 재상이었던 메테르니히(Klemens, Furst von Metternich)가 주도했기 때문에 ‘메테르니히 체제’라고도 한다. 크게 보면 영국 헤게모니의 도구로 작동한 유럽협조체제(Concert of Europe)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

빈 체제의 기간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장기 19세기(The long 19th century)'의 첫 번째 기간인 1789년 ~ 1848년의 '혁명의 시대(The Age of Revolution)'와 칼 폴라니가 말한 1815년에서 1914년에 걸친 유럽의 '100년 평화'와 겹친다. 폴라니에 따르면, '100년 평화'의 거의 3분의 1세기 동안인 빈 체제 시기의 적극적인 평화 정책에 이념적 원동력과 강제력 모두를 제공한 것이 바로 "혈연과 신의 은총의 계서제"로 형성된 신성동맹이었다. 신성동맹의 군대는 유럽 전역을 어슬렁거리면서 소수자들을 짓밟아버리고 다수자들을 억눌렀던 것이다.

폴 슈뢰더(Paul W. Schroeder)에 따르면, 당시 유럽의 지배 세력이 가장 우려했던 것은 또 다른 혁명이 아니라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이었다. 혁명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을 막기 위해 평화가 필요했던 것이다. 모두 평화를 원했기에 모두 오스트리아를 도왔다고 했다.

빈 체제는 1848년 유럽 혁명으로 붕괴되었다. (1848년 혁명 : http://yellow.kr/blog/?p=2535 )
프랑스에서는 2월혁명으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3월 혁명으로 메테르니히가 실각하였고,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던 중부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입헌정부가 수립되었다. 독일의 영방 국가 대표들은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통일 문제와 헌법 제정을 협의하였고, 이탈리아에서도 통일운동이 일어났다. 이로써 옛 질서를 유지하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억압하기 위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

미국의 독립선언에서 나폴레옹 전쟁까지, 국가 간 투쟁과 국가 내 투쟁의 과정에서 베스트팔렌 체계의 원칙, 규범, 규칙이 광범위하게 침해당했다. 특히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아래로부터 반역을 도발하고 위로부터 제국적 지배력을 부과함으로써 유럽 통치자들의 절대적 지배권들을 짓밟았다. 동시에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유럽 대륙 대부분에 걸쳐서 몰수, 봉쇄, 지령경제를 통해 비(非)전투자들의 소유권과 상업의 자유를 침해하였다.
영국은 절대적 지배권들의 침식에 저항하고 베스트팔렌 체계를 복구시키려는 싸움에서 주로 왕조 세력들의 거대한 동맹을 이끌면서 처음으로 헤게모니적이 되었다. 베스트팔렌 체계는 1815년 빈 회의와 뒤이은 1818년 엑스라-샤펠 회의(Congress of Aix-la-Chapelle)와 더불어 성공적으로 복구되었다. 이 시점까지 영국 헤게모니는 네덜란드 헤게모니의 복제판이었다. 네덜란드인들이 제국을 자임하려는 합스부르크 에스파냐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막 태어나려 하던 국가간 체계를 성공적으로 이끈 것과 마찬가지로, 영국인들은 제국을 자임하려는 나폴레옹 프랑스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막 소멸하려 하던 국가간체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와 달리 영국은 계속해서 국가간체계를 지배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계속되는 혁명적 격변이 열어 놓은 새로운 권력 현실에 적합하게 그 국가간체계를 크게 재편하는 일을 맡았다. 그렇게 등장한 체계는 존 갤러거와 로널드 로빈슨이 자유무역 제국주의 - 베스트팔렌 체계를 확장하고 지양한 통치의 체계 - 라 부른 것이었다.

폴라니는 『거대한 전환』에서 '100년 평화'를 가능하게 했던 배경으로 '오트 피낭스(high finance)'를 꼽았다. 오트 피낭스는 원래 로스차일드 가문처럼 글로벌 거대 금융자본을 의미하는데, 로스차일드가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였지만 자신의 탐욕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막고 평화체제를 지켜냈다는 것이다. 주로 '100년 평화'의 후반기에 나타난 상황이지만 신성동맹 또한 로스차일드의 도움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신성동맹의 특등 동맹국"이라는 당시의 쓴소리도 있었다.

출처 http://yellow.kr/blog/?p=3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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