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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대륙 해상물류장악을 위한 바이킹들의 작업(1)
게시물ID : history_299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
조회수 : 7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06 03:07:00
유라시아 대륙은 말그대로 거대한 대륙이다. 따라서 가장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한다면 택배배달이나 컨테이너나 철도운송만으로 대륙전체의 구석구석을 모두 커버할 수 있다. 
단지, 북남아메리카와의 교역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적어도 그러한 교역형태는 당현종까지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당의 주류인종을 자처하는 돌궐계 절도사들의 내부충돌과 결정적으로 인종적으로는 고구려계였지만 당의 하수인이 되는 것으로 작정했던 고선지라는 놈이 당시에 중국에서는 사국이라고 불리었던 사마르칸트를 비롯한 트란스옥시아나를 공격하면서 중국과 트란스옥시아나 국가들이 상호적대관계가 되면서 비단길이 완전히 끊기게 되었다.

그 이후에 중국은 해상물류를 통한 아랍과 인도의 교역에 치중하게 되었고, 물론 그 것조차도 비단길이 끊기고 나서도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였다.

적어도 그 것은 원대에는 일시적으로 회복되었던 마냥 묘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원의 멸망 이후에 카의 직위가 티벳으로 물러난 몽골계 군벌들에 의해서 장악된 기간동안에 상호투쟁으로 인해서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특히 오이라트부의 에센 타이지가 명의 정통제를 포획했을 때에 거의 극에 달하였고, 거의 비슷한 시기에 주치의 후손인 무함마드 샤이반이 샤이반 왕조를 설립하면서 징기스칸의 후예의 권위를 회복하겠다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통일을 추진했을 때에 혼돈이 극에 달하였다.

무함마드 샤이반의 전쟁을 통한 팽창은 결국에는 실패하였는데,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이란세력의 반격과 견제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아주 오랜 동안 오늘날의 이란의 파르시계들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몰락 이래에 트란스옥시아나에 군세를 파견할 여력을 상실했지만 샤이반느 칸의 팽창에 위협을 느끼자 이란의 샤들이 결국에는 군사행동을 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란이 해당 지역을 항구적으로 영유할 국력은 없었기 때문에 후일의 우즈베키스탄인 부하라칸국과 카자흐스탄은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러시아제국이 유라시아대륙의 육상교역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그러한 지배는 무려 1990년대의 현대에 와서나 겨우 청산되게 될 것이다.


위의 일들이 일어나던 시기에 30년 전쟁을 종교전쟁이라고만 알고 있을 수 있는데, 실상은 그 와중에 매우 유라시아 교역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그 것은 폴란드가 쇠퇴하고, 발트해교역이 일어난 것이다.

상기한 시대까지는 적어도 카스피해연안에서 키에프를 거쳐서 돈강과 드네프르강으로 연결되는 육로를 통해서 폴란드의 크라쿠프나 보헤미아지역에 교역이익이 발생하였다.
오늘날에도 중앙아시아발 컨테이너의 상당수의 종착지는 폴란드 크라쿠프이다.

그러나 1550년대부터 영국과 네덜란드 상선들이 발트해의 물류를 장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영국을 키웠다는 여왕 엘리자베스 1세때부터이다.
여기서 30년 전쟁은 이미 1530년대에 일어난 전쟁의 2차전이고, 1555년에 맺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결렬에 의한 결과라는 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즉 이 것들의 원흉은 영국여왕에게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30년 전쟁이 종교전쟁으로 비화되자 개신교를 표방한 영국은 실상은 칼뱅파나 루터파와 같은 독일의 정교 신교와는 전혀 무관한 종파라고 할 수 있는 성공회였음에도 불구하고 초록은 동색이라는 식으로 반카톨릭진영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영국왕의 적극적인 후원에 의해서 그 유명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1세따위가 개입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전란으로 휩싸인 유럽의 육상교역이 완전히 침체되었을 뿐 아니라 폴란드까지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서 발트해교역은 완전히 정착하였고, 영국과 네덜란드야 말로 진정한 승자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폴란드는 크고 작은 분쟁에 시달리다가 끝내는 러시아에 합병되고 만다. 특히 러시아는 표트르 1세라는 놈이 발트해연안에 상트페테르부르크라는 도시를 세우고 대놓고 영란계의 편을 들었다. 즉 그 것은 발트해의 해상교역의 일부에 러시아도 밥숫갈을 올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렇나 구도에 의해서 북방전쟁이 벌어졌을 때에 영란계 자본은 스웨덴을 버리고 러시아의 편을 들게 되었다. 이제 유라시아 대륙의 물류는 육상에서 해상으로 꺾는 작업은 발트해 연안에서 유라시아 대륙 전체로 확대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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