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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의 참이면과 한국사(2) 다른 결론
게시물ID : history_2997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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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68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20 17:31:23
애초에 미국은 국민당에게 그렇게 지원을 해준 적이 없다. 게다가 맥아더와 트루먼간의 알력으로 말하자면 그 것은 이미 2차 대전 당시에 시작된 것이었다.

2차 대전 당시에 필리핀을 공략한 미군들은 그들의 다음 목표는 상하이나 혹은 광시성정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애초에 중국지역의 해방 역시도 맥아더의 핑퐁 건너뛰기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CIA의 전신이던 OSS가 매우 이상한 정세보고를 하는 바람에 좌절되었다. 물론 그 보고대상은 백악관이다. 그 결과가 오키나와로 타겟을 바꾸는 것이었는데, 오키나와에서 미군은 아주 강력한 저항을 받았고, 따라서 상당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956년에 수에즈 위기를 통해서 미국이 영, 프에 대해서 태클을 놓기 전까지는 미군의 정책은 초록은 동색이라는 식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용인하는 스탠스를 취하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반제'를 내세운 장개석 정권에 대해서 우호적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개석의 외교상의 대명분이 반제였고, 그 것은 애초에 영국, 프랑스와는 수틀릴 수 밖에 없던 것이다.

따라서 영국은 2차대전 당시에 동맹국이라고 할 수 있는 중국으로 가는 전시물자까지 자기들이 빼다 쓰는 만행을 저질렀고, 그에 따라서 어쩌면 장개석군이 창사성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퇴하게 된 원인인 스틸웰의 XY군의 차출이라는 계략까지 부리고 있었다.

스틸웰의 XY군이라는 것은 장개석이 충칭에서 키우고 있던 60만 정도의 국민당군 신부대를 말하는 것이다. 그 것이 2대군단 규모였으므로 XY군이라고 하는 것이다.
스틸웰은 이 군대를 버마에 투입하지 않으면 미국이 주는 모든 지원을 끊겠다는 강짜 혹은 갑질을 통해서 그 2개 군단을 장개석의 손에서 자신의 손으로 지휘권을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서 일본군의 대공세에 직면하였을 때에 수차례에 걸쳐서 잘 방어하고 있던 창사를 함락당하였다.

창사라는 곳이 중국의 내륙에서 사방의 교통을 이어주는 요지였기 때문에 이후에 장개석은 가뜩이나 쓰촨성 산만디로 밀려나게 되었다.

https://ko.wikipedia.org/wiki/%EC%B0%BD%EC%82%AC_%EC%A0%84%ED%88%AC_(1939%EB%85%84)

에서 언급하듯이, 

1차 창사 전투 또는 창사 전투(영어Battle of Changsha중국어第一次长沙战役)는 중일 전쟁 도중 중국의 창사에 일어난 1939년 9월 17일부터 10월 6일까지 발발한 첫 번째 전투이다.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처음으로 연합군이 이긴 주요 전투로 간주된다.

1차 창사 전투는 2차 세계 대전에서 처음으로 연합군이 이긴 주요 전투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스틸웰이 2개군단을 빼간 이후의 대륙타통작전에서는 제4차 창사전투에서는 결국 창사를 빼앗기고 말았다.

여기서 스틸웰은 애초에 장개석에 협력해야 하는 병력없는 참모장 정도로 파견되었지만 끝내는 고집을 부려서 자신의 직속부대를 얻어낸 것이었다. 그만큼 어리섞고 호승심강한 인물이었다.

https://namu.wiki/w/%EC%A1%B0%EC%A7%80%ED%94%84%20%EC%8A%A4%ED%8B%B8%EC%9B%B0

현대에 스틸웰은 아주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심지어 그는 국민당 정권이 몰락하고, 공산당이 이기게 한 것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시 말하지만 스틸웰의 2개군단 스노우볼은 국민당에게 엄청난 타격이었다. 내륙의 교통중심지이던 창사를 빼았김으로써 국민당의 전쟁수행능력을 반감이 아니라 반의 반 토막을 내었고, 스촨성 산만디에서 장강으로 내려오는 길 일체를 일본에게 빼앗긴 셈이 되었다.
삼국지에 비유하자면 관우가 형주를 빼았기고, 쓰촨성=익주만으로 뻐기게 된 촉나라마냥 된 것이다. 게다가 산업화시대에는 호북성에서 나오는 철자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해졌기 때문에 그 것을 뺐긴 장개석은 완전히 미국의 원조에만 의지하게 된 처지가 되었다.
플라잉 타이거스의 지원이라는 것도 창사를 빼았긴 이후에 일본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충칭 위로 날라다니는 상황에서야 겨우 미국이 도와준 것이다.
창사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항속거리 때문에 충칭을 일본공군이 그렇게 마음대로 유린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창사가 바로 삼국지 게임의 장사이고, 형주남부4군으로 알려진 지역이다. 전선단위로 군사개념이 바뀐 오늘날에는 창사를 빼았겼다는 것은 그 곳을 중심으로하는 교두보들이 모조리 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Ichigo_plan.jpg

애초에 이치고 작전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형주남부 4군을 먹은 뒤에 국민당군을 이제 유비가 백제성에서 뒤졌듯이 대단히 기동하기 어려운 산만디너머로 몰아고는 당시의 일본령이던 인도차이나까지 전선을 연결한 뒤에 산만디에서 내려오는 협로를 애워싸는 형태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고, 중국전선에서의 전력소모를 최소화한 뒤에 태평양이나 다른 곳에 전력을 집중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치고 작전의 키는 절대적으로 창사의 공략에 달린 것이다. 그런데, 스틸웰이라는 놈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버마를 핑계로 군대를 빼간 것이다.


허나 스틸웰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전부터 그와 마찰을 빚던 영국에서는 진작부터 스틸웰을 무타구치 렌야(!)와 동급인 인물로 폄하했고[10] 이후의 다른 연구들에서도 스틸웰 장군이 태평양 전쟁 중에 싸지른 거한 똥들이 발굴되면서 이제는 5열, X맨으로의 명성이 자자하다.

스틸웰의 평가는 전후에 재평가가 이루어져서 연합군의 X맨, 무다구치 렌야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스틸웰보다 더 지독한 X맨이 있었으니 그 것이 바로 트루먼이다.


스틸웰의 삽질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건 전쟁은 이겨버렸다. 그리고, 국민당과 공산당에게는 무려 중국의 4억 인민이 있었고, 그 인민들은 연합군과 소련의 지쳐버린 시민과 인민들과는 다르게 전투의지가 충만하였다.

요컨데 중국인들을 무장시키는 것은 1940년대 후반의 정세에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카드가 될 것이었다.

물론 어쩌면 미국이 모든 2차대전의 구형 물자들을 싸그리 중국에 줬더라면(이 부분이 소싯적 반공선전이나 하던 기성세대 한국사가들의 엉터리인데, 그들은 이 부분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식으로 거짓 선전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것은 일어난 일이 아니다.), 중국과 소련의 전쟁은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지만 그 것은 온당한 판단이 아니라고 간주된다.

오늘날 독도문제따위에서 겪는 한국과 일본의 관점이 실제의 충돌로 이어지지 않듯이 만주에 대한 영유권이 중국에 있다는 점은 동북아시아내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단지 냉전시대에만 우익깡패같은 놈들이 이상한 스탠스를 취했던 것이 한국내에서 잔존할 뿐이다.


요컨데, 스탈린이 북만주를 언급한 것은 정작 지역사내에서의 영토문제로 가면 전혀 일어날 수가 없는 난센스이다. 북만주일대는 애초에 빽빽한 산림지대에 막혀서 군사의 기동이 극히 불가능한 곳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러하기 때문에 우리가 익히 아는 고구려가 두만강 상류에 가까운 압록강 상류에 위치했던 것이다. 왜냐면 만주와 연해주와 시베리아는 산악과 산림지대에 막혀있지만 두만강 연안에서는 블라디보스톡이나 나진-선봉 일대와 흑룡강성을 있는 삼각지대내에서 만주에서 시베리아로 빠지는 통로가 예로부터 이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우수리강을 통해서 하바롭스크로 바로 빠지는 길이 있긴 한데, 그 길은 1950년대 이전에는 거의 사용될 수 없었던 길이다. 명백하게 전후에야 중국인 불법 월경자들을 통해서 우수리강, 혹은 아무르강 일대의 쌀농사가 시작되면서 벌목과 함께 강연안으로의 통로가 개척되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기억하기로는 2000년대의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서도 우수리강일대로 월경하는 중국인 불법이민자들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즉, 그러한 통로는 소련이 멸망한 1990년대 이후에나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이다.


즉, 북만주에서 중국군과 소련군이 맞불을 수 있다고? 그딴건 없다는 것이다. 그럼 당태종이나 수문제는 몽골평원을 통해서 우회해서는 고구려를 북쪽에서부터 공략해들어가는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는 것과 같은 것이라도 궁리했지 왜 그냥 요하일대로 정면으로 들이박았겠냐고?
숲이 빽빽해서 지나갈 수가 없당께요.
게다가 여름도 짧아서 가다가 막혀서 지연되면 얼어뒤진다고.

요컨데 만주와 연해주는 전략적으로 나뉘게 되는 공격하기 어려운 지형경계를 따라서 형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탈린의 북만주 패드립은 블러핑이라는 것이다.
되려 소련의 옵션은 외몽골을 통해서 중국으로 쳐 들어가는 것이 현실적이지만 그 것은 산시성과 허난성이라고 하는 중국내에서 식량생산력은 낮고, 인구는 많은 따라서 가난하고 할 일없는 총알받이들로 널린 지역을 공략하는 것이 된다.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B%82%9C%EC%84%B1

허난성(하남성, 중국어河南省병음Hénán Shěng)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부의 성이다. 허난은 노자와 장자, 법가의 상앙과 이사, 장형, 한유, 악비 등을 배출한 중국 역사의 중심지이며 뤄양과 카이펑 등 역대 왕조의 도읍지가 위치한 성이다. 현재 허난성은 인구는 가장 많고 경제적으로는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1]

허난성은 오늘날에도 인구는 가장 많고 가장 가난한 지역이다. 그러나 인구수는 9500만명으로써 우크라이나가 있는 흑해연안 따위하고는 상대가 안 되게 많은 편이다. 독일, 프랑스보다도 인구가 더 많다. 그리고, 산서성과 섬서성에도 각각 3500만 정도가 살고 있다. 따라서 1940년대에 중국의 인구가 5억정도이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최소 7천만 정도의 노던 차이니즈들을 점령하고 지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태스크는 소련에게 조차도 막대한 것이다.

요컨데 남아도는 중국인들을 무장시키는 것은 당시에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중에 누구든 먼저 먹는 놈이 놈이 임자였다. 그런데, 미국은 분명히 장개석과 관련한 어드밴티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하였다.
따라서 중국인들을 무장시켜서 자신의 편으로 부려먹는 권리는 소련이 가져갔으며 그 결과가 바로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으로써 한국인들이 미국의 졸렬한 대통령이 싼 똥인 공산진영이 무장시킨 중국인들을 상대해야 되는 똥치우기를 혈채로 갚는 피바가지를 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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