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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분쟁의 내면
게시물ID : history_299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
조회수 : 846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5/22 01:56:33
사실 그 것은 무역분쟁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제 이해할 수 있지만 중국인들이 하는 일을 미국인이 한다고? 그건 한국에서 외노자 다 쫓아내면 한국인들 완전고용 될 것이라는 수준의 개소리이다.

오늘날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브라질의 육류생산이 미국 경제에 지대한 도움이 된다. 마데 인 차이나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화폐를 장악하고 뿌려대면 그에 걸맞는 실물의 공급을 해야 될 세력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다면 미국의 발권력은 단지 스스로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인플레를 초래할 제팔 짤라먹기에 불과할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은 거대한 '대륙'이기 때문에 앞으로 육상교역이 교역의 주가 될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 택배로 식자재나 의복 쇼핑까지 시키듯이 말이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의 중간에는 망망대해 뿐인 해상교역과는 다르게 육상교역은 부가가치가 생성되는 거주구들 사이를 이동하며, 비교적 짧은 거리를 가더라도 운임이 떨어지는 해상교역과는 효율성에서 상대가 안 되는 생산성이 있다.

시애틀에서 부산항을 거쳐서 항저우따위로 가려면 망망대해에서 수천킬로를 가야지 겨우 운임이 발생하지만 서울내에서 당일대송시키면 끽해야 30킬로 정도 왔다갔다하면 수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세계 인구수준이 20세기초나 19세기와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것도 육상교역에는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택배수요는 사실상 소비수요와 거의 같이 움직이는 개념이기 때문에 다다익선이라고 할 수 있다.
육상교역의 주가 트레일러로 권역간 중장거리 수송을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단거리 수송이나 소화물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무역분쟁은 덴마크 선사나 노르웨이 선주나 런던항이나 로테르담항구가 있는 나라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유는 간단한데,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이 육상교역으로 대체가 되면 남는 것은 유라시아와 신대륙간의 해상교역만이 남게 되는데,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간의 해상교역을 딱 봐도 아는 것이지만 중국이 장악하고, 한국과 일본이 중계해상교역으로 흥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즉 발트해와 지중해의 물동량이 감소하거나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되는 추이에서 앞으로 전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은 싸그리 중미교역으로 집중될 것이다.
그에 따라서 해운사들도 중국국적사로 대체될 수 있고, 선주들도 중국인 큰 손들이 선주가 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코로나로 인해서 그러한 변화는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특히 대형 컨테이너선을 한 개인이 보유한다는 것은 상당한 일인데, 그러한 큰 자본이 들어가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는 중국인들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은 가격이 천억원 단위라고 한다. 그러한 배들을 가진 선주들로부터 선사들이 배를 용선해서 해운업을 돌리는 것이다.

초대형 선박의 세계는 말 그대로 자본이 일을 하게 하는 전형적인 바닥이다. 그러므로 가장 자본이 많은 나라인 중국인 선주들이 앞으로 대세가 될 것이 뻔한 것이다.

게다가 중미간 해상교역만이 앞으로 전세계 해상교역의 주가 된다면 말이다.

미국 외에도 해상교역이 필요한 나라는 인구만 2억7천만인 인도네시아와 호주정도인데, 죄다 중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이다. 심지어 인도네시아 경제의 상당부분은 화교들이 꽉 잡고 있다고까지 말해지는 수준이다.


여기서 한국인들 중에서 조선업에 종사하는 분이라면 알겠지만 현재에도 노르웨이 선주들은 선수금을 줄 여력이 없어서 한국정부가 일종의 고용안정대책으로 대놓은 펀드를 받아서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한 것을 완제품만 사가는 것으로 계약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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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2019년 기준인데, 이미 중국해운사인 COSCO 그룹이 3위까지 올라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CMA CGM이 3빠였는데, 그 사이에 역전당하였다.

그리고, 5위인 하팍로이드는 독일회사지만 6위부터 ONE는 일본, 에버그린과 양밍은 대만, HMM은 현대해상으로 한국, PIL은 싱가폴 선사로써 동북아시아가 물동량을 모조리 쳐 먹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위, 19위, 24위도 모두 한국선사이다.

그리고, 가장 위의 회사들은 전세계를 누리고 있지만 에버그린이나 양밍부터는 그들은 단지 아시아-미국간 교역과 동남아와 아프리카 정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비교적 지역적인 회사지만 워낙에 중미간 교역이 많다보니까 무시할 수 없는 처리량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것은 현대 HMM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미국경제에는 전혀 해가 되지 않으며 되려 미국으로 전세계의 재화가 쏠리는 현제의 팍스-아메리카 체제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단상이다.

즉, 여기서 일자리를 뺐기는 것은 미국인들이 아니며 되려 덴마크나 독일의 선사들이나 노르웨이나 영국의 선주들에게 그간 그들이 꽉 잡고 있던 해상물류판도에서 밀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미관계가 수틀리길 학수고대할 인간들은 실상은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노르웨이에 있단 것이다. 그 쪽 국가들은 이미 영국병이나 네덜란드병을 겪고 있는지 오래이고, 특히 영국섬과 저지대는 해상교역에서의 헤게모니가 상실되면 1453년의 백년전쟁이 끝나던 시대 판세 이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1437년에 신성로마제국황제위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 넘어가기전에 독일의 황제위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기도 했던 지기스문트라는 놈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무위키의 
지기스문트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를 4세와 포메라니안의 엘리자베트 사이의 아들이었다.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의 왕 러요시 1세는 카를 4세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그래서 지기스문트는 어린 나이에 헝가리로 보내져 헝가리어와 그 밖의 교육을 받았다. 러요시 1세는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왕국 왕위 계승자로 내정해 두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장녀인 마리어 공주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지기스문트는 7살인 1374년에 마리어와 약혼했으며 11살이 되는 1378년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었다.

1381년에 14살이 된 지기스문트는 형인 로마왕 벤체슬라스에 의해 폴란드 크라코프로 보내져 그곳에서 폴란드 어를 배우며 사람들과 안면을 익혔다. 벤체슬라스는 또 그에게 브란덴부르크와 폴란드 사이에 있는 노이마르크를 주었다. 노이마르크는 교통이 상당히 편리한 곳이었다. 그의 음모 때문에 지기스문트는 폴란드에서 쫓겨났다. 헝가리의 왕을 노리는 다른 후보가 나타나자 지기스문트는 아내와 함께 탈출했다.

15살이 된 1382년에 헝가리 왕국의 왕인, 러요시 1세가 죽으면서 그의 딸인 마리어가 헝가리 여왕이 되었고, 지기스문트는 그녀와 15살이 된 1385년에 즈볼렌에서 결혼했다.

상기한 항목에서 보이듯이 1380년대만 하더라도 미래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놈이 겨우 폴란드에서 더부살이나 하던 처지였다. 지기스문트는 가서 폴란드어나 배우고 오라는 형의 안배에 의해서 폴란드로 유학을 갔던 것이다.

1380년대만 하더라도 폴란드나 보헤미아가 강대국이었고, 특히 유럽의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453년에 영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지만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폴란드를 통해서 육로로 프랑스까지 교역이 이어지면 그 혜택이 바로 파리 근교인 il-de-france일대에 혜택을 주면 그러한 프랑스 교역권에서 칼레를 통해서 물건이나 떼가는 처지였던 것이 영국이었던 것이다.

바로 크라코프의 유대인들이 유럽의 육상교역을 꽉 잡고 있을 시절에 말이다. 그 때는 영국은 유럽 변방의 촌동네에 불과해서 프랑스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지만 프랑스의 아키텐 영지를 상속받은 상속녀인 엘레노오르 라는 여자와 결혼한 뒤에나 겨우 영국왕은 빛을 봤다고 한다.


즉, 오늘날에 와서 영국의 해상왕국으로써의 옛 명성은 완전히 끝물에 다다른 느낌이고, 브렉시트도 상당히 논란이 되는 것이 영국의 생필품들은 이미 상당수 프랑스와의 교역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유로존이 처음에 생겼을 때에 값 싼 프랑스 생필품들이 대거 영국으로 밀려와서는 프랑스인들은 되려 역으로 물가상승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즉, 이미 국제교역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프랑스제품이나 소비해주는 프랑스시장의 종속경제화 되는 경향이 이미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보호무역을 통해서 자국의 생산력을 끌어올리자는 전략 자체가 미국의 것이라기 보다는 영국섬의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은 2차대전 전후에 금융업을 통해서 덩치를 불려왔는데, 금융업과 북해산 석유 때문에 인플레가 발생해서 자국산 공산품의 가격경쟁력무역분쟁이 아니다. 한국인들은 이제 이해할 수 있지만 중국인들이 하는 일을 미국인이 한다고? 그건 한국에서 외노자 다 쫓아내면 한국인들 완전고용 될 것이라는 수준의 개소리이다.

오늘날 코로나 사태에서 보듯이, 브라질의 육류생산이 미국 경제에 지대한 도움이 된다. 마데 인 차이나도 마찬가지다. 미국이 화폐를 장악하고 뿌려대면 그에 걸맞는 실물의 공급을 해야 될 세력이 필요하다. 그러지 않다면 미국의 발권력은 단지 스스로 화폐가치를 떨어뜨리는 인플레를 초래할 제팔 짤라먹기에 불과할 것이다.

유라시아대륙은 거대한 '대륙'이기 때문에 앞으로 육상교역이 교역의 주가 될 것이다. 마치 한국에서 택배로 식자재나 의복 쇼핑까지 시키듯이 말이다.
출발지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의 중간에는 망망대해 뿐인 해상교역과는 다르게 육상교역은 부가가치가 생성되는 거주구들 사이를 이동하며, 비교적 짧은 거리를 가더라도 운임이 떨어지는 해상교역과는 효율성에서 상대가 안 되는 생산성이 있다.

시애틀에서 부산항을 거쳐서 항저우따위로 가려면 망망대해에서 수천킬로를 가야지 겨우 운임이 발생하지만 서울내에서 당일대송시키면 끽해야 30킬로 정도 왔다갔다하면 수익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전세계 인구수준이 20세기초나 19세기와는 비교가 안 되게 많은 것도 육상교역에는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택배수요는 사실상 소비수요와 거의 같이 움직이는 개념이기 때문에 다다익선이라고 할 수 있다.
육상교역의 주가 트레일러로 권역간 중장거리 수송을 포함하고 있긴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단거리 수송이나 소화물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지금의 무역분쟁은 덴마크 선사나 노르웨이 선주나 런던항이나 로테르담항구가 있는 나라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여진다.

이유는 간단한데, 유라시아 대륙의 교역이 육상교역으로 대체가 되면 남는 것은 유라시아와 신대륙간의 해상교역만이 남게 되는데, 북아메리카와 유라시아간의 해상교역을 딱 봐도 아는 것이지만 중국이 장악하고, 한국과 일본이 중계해상교역으로 흥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즉 발트해와 지중해의 물동량이 감소하거나 상대적으로 감소하게 되는 추이에서 앞으로 전세계 컨테이너 물동량은 싸그리 중미교역으로 집중될 것이다.
그에 따라서 해운사들도 중국국적사로 대체될 수 있고, 선주들도 중국인 큰 손들이 선주가 되게 될 것이다. 아마도 코로나로 인해서 그러한 변화는 더 앞당겨질 수도 있다.

특히 대형 컨테이너선을 한 개인이 보유한다는 것은 상당한 일인데, 그러한 큰 자본이 들어가는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미래에는 중국인들 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은 가격이 천억원 단위라고 한다. 그러한 배들을 가진 선주들로부터 선사들이 배를 용선해서 해운업을 돌리는 것이다.

초대형 선박의 세계는 말 그대로 자본이 일을 하게 하는 전형적인 바닥이다. 그러므로 가장 자본이 많은 나라인 중국인 선주들이 앞으로 대세가 될 것이 뻔한 것이다.

게다가 중미간 해상교역만이 앞으로 전세계 해상교역의 주가 된다면 말이다.

미국 외에도 해상교역이 필요한 나라는 인구만 2억7천만인 인도네시아와 호주정도인데, 죄다 중국에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나라들이다. 심지어 인도네시아 경제의 상당부분은 화교들이 꽉 잡고 있다고까지 말해지는 수준이다.


여기서 한국인들 중에서 조선업에 종사하는 분이라면 알겠지만 현재에도 노르웨이 선주들은 선수금을 줄 여력이 없어서 한국정부가 일종의 고용안정대책으로 대놓은 펀드를 받아서 선박을 건조하기 시작한 것을 완제품만 사가는 것으로 계약을 하였다.


이건 2019년 기준인데, 이미 중국해운사인 COSCO 그룹이 3위까지 올라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과 얼마전까지만해도 CMA CGM이 3빠였는데, 그 사이에 역전당하였다.

그리고, 5위인 하팍로이드는 독일회사지만 6위부터 ONE는 일본, 에버그린과 양밍은 대만, HMM은 현대해상으로 한국, PIL은 싱가폴 선사로써 동북아시아가 물동량을 모조리 쳐 먹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위, 19위, 24위도 모두 한국선사이다.

그리고, 가장 위의 회사들은 전세계를 누리고 있지만 에버그린이나 양밍부터는 그들은 단지 아시아-미국간 교역과 동남아와 아프리카 정도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비교적 지역적인 회사지만 워낙에 중미간 교역이 많다보니까 무시할 수 없는 처리량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 것은 현대 HMM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하지만 이와 같은 것은 미국경제에는 전혀 해가 되지 않으며 되려 미국으로 전세계의 재화가 쏠리는 현제의 팍스-아메리카 체제에서 벌어지는 하나의 단상이다.

즉, 여기서 일자리를 뺐기는 것은 미국인들이 아니며 되려 덴마크나 독일의 선사들이나 노르웨이나 영국의 선주들에게 그간 그들이 꽉 잡고 있던 해상물류판도에서 밀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미관계가 수틀리길 학수고대할 인간들은 실상은 영국이나 네덜란드나 노르웨이에 있단 것이다. 그 쪽 국가들은 이미 영국병이나 네덜란드병을 겪고 있는지 오래이고, 특히 영국섬과 저지대는 해상교역에서의 헤게모니가 상실되면 1453년의 백년전쟁이 끝나던 시대 판세 이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

1437년에 신성로마제국황제위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 넘어가기전에 독일의 황제위는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이기도 했던 지기스문트라는 놈이 차지하고 있었다.

나무위키의 
지기스문트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카를 4세와 포메라니안의 엘리자베트 사이의 아들이었다.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의 왕 러요시 1세는 카를 4세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했다. 그래서 지기스문트는 어린 나이에 헝가리로 보내져 헝가리어와 그 밖의 교육을 받았다. 러요시 1세는 지기스문트를 헝가리 왕국 왕위 계승자로 내정해 두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장녀인 마리어 공주와 결혼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지기스문트는 7살인 1374년에 마리어와 약혼했으며 11살이 되는 1378년에는 브란덴부르크 변경백이 되었다.

1381년에 14살이 된 지기스문트는 형인 로마왕 벤체슬라스에 의해 폴란드 크라코프로 보내져 그곳에서 폴란드 어를 배우며 사람들과 안면을 익혔다. 벤체슬라스는 또 그에게 브란덴부르크와 폴란드 사이에 있는 노이마르크를 주었다. 노이마르크는 교통이 상당히 편리한 곳이었다. 그의 음모 때문에 지기스문트는 폴란드에서 쫓겨났다. 헝가리의 왕을 노리는 다른 후보가 나타나자 지기스문트는 아내와 함께 탈출했다.

15살이 된 1382년에 헝가리 왕국의 왕인, 러요시 1세가 죽으면서 그의 딸인 마리어가 헝가리 여왕이 되었고, 지기스문트는 그녀와 15살이 된 1385년에 즈볼렌에서 결혼했다.

상기한 항목에서 보이듯이 1380년대만 하더라도 미래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놈이 겨우 폴란드에서 더부살이나 하던 처지였다. 지기스문트는 가서 폴란드어나 배우고 오라는 형의 안배에 의해서 폴란드로 유학을 갔던 것이다.

1380년대만 하더라도 폴란드나 보헤미아가 강대국이었고, 특히 유럽의 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1453년에 영국은 프랑스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지만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폴란드를 통해서 육로로 프랑스까지 교역이 이어지면 그 혜택이 바로 파리 근교인 il-de-france일대에 혜택을 주면 그러한 프랑스 교역권에서 칼레를 통해서 물건이나 떼가는 처지였던 것이 영국이었던 것이다.

바로 크라코프의 유대인들이 유럽의 육상교역을 꽉 잡고 있을 시절에 말이다. 그 때는 영국은 유럽 변방의 촌동네에 불과해서 프랑스로부터 문물을 받아들이는 입장이었지만 프랑스의 아키텐 영지를 상속받은 상속녀인 엘레노오르 라는 여자와 결혼한 뒤에나 겨우 영국왕은 빛을 봤다고 한다.


즉, 오늘날에 와서 영국의 해상왕국으로써의 옛 명성은 완전히 끝물에 다다른 느낌이고, 브렉시트도 상당히 논란이 되는 것이 영국의 생필품들은 이미 상당수 프랑스와의 교역에 의존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유로존이 처음에 생겼을 때에 값 싼 프랑스 생필품들이 대거 영국으로 밀려와서는 프랑스인들은 되려 역으로 물가상승을 체험하기도 하였다.

즉, 이미 국제교역에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프랑스제품이나 소비해주는 프랑스시장의 종속경제화 되는 경향이 이미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서 보호무역을 통해서 자국의 생산력을 끌어올리자는 전략 자체가 미국의 것이라기 보다는 영국섬의 것으로 여겨진다.

영국은 2차대전 전후에 금융업을 통해서 덩치를 불려왔는데, 금융업과 북해산 석유 때문에 인플레가 발생해서 자국산 공산품의 가격경쟁력을 상실하였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파운드를 지속적으로 절하시키면서 가격경쟁력을 회복하고, 무역흑자를 보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영국섬은 교역에도 유리했지만 예로부터 프랑스, 독일과 함께 유럽의 공장이었는데, 브렉시트는 유럽의 공장으로써의 영국섬의 위치를 다지기 위해서 파운드화를 떨구기 위한 셀프 네가티브인 것이다.

현재에는 파운드와 유로화 가치가 거의 1:1에 육박하였다. 2000대 초반에 소로스가 파운드 환치기를 할 때만 하더라도 2:1이었던 것에서 파운드 가치를 엄청 절하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영국은 이제 해상교역에서 이득보던 시대는 뒤로 제끼고, 한국식 수출경제모델이 자국경제에 더 이득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자국자본이 자국에 재투자되는 반면에 해외자본유입에 대한 금융규제가 생기고, 런던에서 돈을 빌려서 배를 사서 굴리던 노르웨이인들이나 덴마크인들에게는 자본공급의 차질이 생길 수 있다.

특히 유가 하락으로 인해서 소싯적이라면 북해산 브랜트유를 퍼서 쓸어담을 돈을 유럽각국의 채무자들이 빌려갔지만 지금은 그런 돈이 거의 발생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한 부분까지 감안되어서 영국은 경제 전략을 제조업 중심으로 가는 것으로 수정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코로나 이후로 전세계의 공급에 차질이 생겨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가능성 현재는 점쳐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금리도 오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르웨이 선주들이 대출을 받아서 선박 발주를 할리가 없는 것이다. 반면에 중국은 뉴딜정책마냥 중국조선산업에 일감 주는 셈치고, 나라가 찍은 돈을 조선산업에 뿌릴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배는 채권으로 결제되어서는 저렴하게 임대된 다음에 중국선사에 넘겨질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으니까 현재에 중국의 기업부채율이 높은 것이다. 요컨데, 중국은 현재 기업간 거래의 상당이 채권에 의해서 사실상 공짜로 결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치킨게임을 벌이면 해운선사들간 경쟁에서 중국이 우위를 점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것을 가지고 무역분쟁이라고 한다면 그 것은 조금 경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차피 선사따위 중국이 가진다한들 마데 인 차이나건 코리안이건 재팬이건 타이완이건 쓰고 누리는 것은 미국인이라고.

아마도 미국인들은 미국예외주의에 빠진 머저리들이라서 이런 저런 것도 모르고, 닥치고 중국 나쁘다니까 옳소 요 지랄이나 카는 것일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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