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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는 개구라다.
게시물ID : history_3001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
조회수 : 140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07/23 17:43:24
중국남부문명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이 버마와 윈난성쪽에서 근거하였지 하은주가 아니라는 것이지.

리델하트같은 전사가들의 견해따위를 참고하면 대략 기원후 3~4세기경부터 기병군사집단들의 우위의 시대가 지속되었음. 그러나 그러한 그들도 진짜 역사적인 근본 그딴건 아니란 것이지.

갸들이 거진 2천년을 해 먹는 동안에 생긴 인지가 중국인들의 하은주 기원설로써 허난성의 말의 먹이인 기장을 기르는 지역이 마치 중국사의 근본이 있는 지역인 것처럼 각색이 되었다는 거에요.

승자의 관점이지.

그러나 기병군사집단의 우위가 사실은 그 것은 기원전 3세기경에 알렉산드로스의 컴패니언 기병대로부터 문화적인 근거는 가지고 있었지만 보병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제국인 로마제국이 등장하면서 헬레니즘세력들을 일시적으로 일소시켰기 때문에 기병군사집단 엘리트들의 지배사회는 서로마제국의 멸망(475년) 이후에나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임.

마찬가지로 중국의 역사역시도 초한전쟁 당시에 기병이 그다지 활용되었다고 하기가 어렵고, 초나라라고 하는 지금 한참 홍수로 개판된 대량의 보병을 징집할 수 있는 인구밀집지역에서 기득권이 형성되어 있었으므로 이때까지는 선비족으로 대표되는 기병군사엘리트집단의 패러다임이 아니었다고 해야 하며, 그 시대의 초기 시대에 관한 언급이 공자가 쓴 역사서로써 명백하게 기록되었다는 특이점이 존재하였음.

그 것이 공자의 저서에 언급된 초장왕과 기원전 550년경에 초나라지역에서 등장한 집권세력으로 봐야하며, 항우와 항백의 시대까지 대세이던 패러다임의 등장을 공자라는 놈이 잘 기록하였다고.

게다가 스촨성 지역의 초기 버마계 이주집단의 무덤들, 절벽 위에 관짝을 올리는 그러한 무덤양식조차 발견되고 있고, 진과 초는 스촨성을 교집합으로 하는 실상 같은 출계집단들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출한 것이다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지.

그러한 의미에서 진을 대체한 한과 초나라가 쟁패를 벌이는 과정 자체가 버마-윈난계 이주집단들 패러다임 내에서 존속하는 것 뿐 아니라 후한말기에는 아직 정저우와 카이펑, 혹은 쉬창(=허창)일대에 선비족 이주집단이 존재하지도 않았는데, 삼국이 정립된다는 것 자체가 엉터리라는 거에요. 

삼국지 게임 그 것도 죄다 엉터리다. 정저우와 카이펑, 쉬창 일대에 둔전을 하면서 말을 먹이는 집단들이 중국의 패러다임을 장악한 것 자체가 북위의 성립으로 봐야하며, 조조라는 존재는 그 것은 있을 수 없는 존재에요.

되려 북위 성립 이후에도 환온과 유유의 시대까지는 여전히 초나라계의 남부군사집단들이 북부의 오랑캐들을 몰아내려고 했다고.

어쩌면 유라시아대륙내에서 기병군사집단들이 중국에서 승리를 하는 과정은 여진계와 한국계의 고구려와 싸우는 과정에서 진화하였다고.

투르크계 군사집단들은 애초에 그닥 기병산지에서 등장한 집단이라고 하기는 어려웠어요. 그들은 그레코-박트리아 왕조나 쿠샨왕조쪽에서 나왔는데,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인도북부와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 전혀 기병군사문화가 발달한 곳이 아닌 곳이 그들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정작 스키타이계의 기병군화문화는 트란스옥시아나의 키르기스족이나 고구려가 가지고 있었고, 키르기스족은 서돌궐과 고구려는 동돌궐과 중국돌궐(=수나라, 당나라)과 싸우는 과정에서 서로 문화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보여진다.

당나라는 중화돌궐로 나는 비정한다.

따라서 이주영-고환계의 중화돌궐놈들 중에서 그들의 전세대에 또한 강력한 집단이던 모용씨들이 광개토대왕이라는 놈을 필두로 하는 고구려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고, 선비족의 한축이 거의 무너졌지만 역설적으로 이주영과 후경의 대에 고구려와의 군사문화교환으로 인하여 남조에 대한 육군군사우위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즉, 선비족이 처음부터 기병집단이었다고 보이지는 않지만 지배성분들은 헬리니즘식의 컴패니언 기병대들 이너써클들이 주도하는 군사문화이자 정치문화를 가지고는 있었다.
그러나, 선비족이 중국에 난립할 당시에 그들의 주력은 사산조 페르시아의 트란스 옥시아나 침공으로 촉발된 중앙아시아계 농민들의 보병이었다고 보여진다.

비수대전이나 참합피 전투까지는 아직 탁발씨들의 기병이 조금 언급되지만 모용수는 기병에 대한 경각심을 별로 가지지 않았던 것으로 묘사되는 것으로 봐서는 선비족들의 중국북부지역의 말먹이를 먹인 전마의 보급율은 높았던 것이 확실하지만 전술이 확립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주영의 대에 가서야 명백해진 것은 선비족 지배의 한 축은 이미 몽골에 있었다는 것이다. 몽골에서 돌궐이 발흥하면서 돌궐의 기병군사를 받아오는 것이 패권경쟁에서 대세가 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집권한 것이 수나라의 양씨라고 칸다.

https://namu.wiki/w/%EB%8F%8C%EA%B6%90
북주 시절 우문태 밑에 있던 양견은 돌궐 군사의 협력을 받아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양견은 수나라를 건국한다. 572년 동돌궐은 수나라 수도 장안까지 쳐들어가 백성 6만명을 끌고 간다. 579년 돌궐이 다시 장안에 들어가 나가질 않자 수문제는 공녀를 보내기로 하고 달래어 장안에서 철수한다. 동서돌궐의 싸움은 수문제의 이간책까지 겹쳐 격화됐다. 궁지에 몰린 사발략가한은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587년 그의 동생 막하가한은 동부는 되찾았으나 서돌궐과 싸우다 전사, 이후 야미 카안(Yami Kağan, 계민가한) 치세 때 동돌궐은 서돌궐을 이기기 위해 수나라에 일시적으로 협력했댜.


즉, 선비족들의 기병문화는 나중에는 돌궐 군사를 빌어오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키르기스와 이리가한이나 발해의 함보가 그들의 투멘이라는 따위로 키르기스족과 고구려사를 싸그리 아우르려는 지점은 그냥 유목민 새끼덜의 개구라일 뿐이다.

<북사> 등에는 북녘 색국의 아방보(阿諸步) 부락의 17[2]명의 아들 중 하나이자 이리의 소생인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 Igil Nisha čor로 추정)가 아방보가 망한 뒤 여름 신 및 겨울신과 혼인하여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이 흰 기러기로 변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검수(劒水)와 아보수(阿輔水) 사이에서 키르기즈를 세웠고, 또 한 명이 처절수(處折水)에서 나라를 세웠다. 큰아들인 눌도육설(納都六設, Nur Türk shad로 추정)은 발사처절시산(跋斯處折施山)에 살며 추위로부터 여러 부락을 구제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10명의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들은 각자 성(姓)을 가지게 되었고, 눌도육설이 죽자 그들 중 아현설(阿賢設, Ashana shad로 추정)이 부족을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지랄말이다.

왜냐면 정작 한국쪽의 기록에 고구려와 돌궐은 철천지 원수였음이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즉, 그냥 적군도 모두 사해만민의 텡그리신의 자손이다 그 지랄을 하려고 키르기스족과 여진족도 모두 그들로부터 쳐 나왔다고 우길려고 만든 엉터리가 아방보의 아들이 키르기스를 세웠다는 개소리나 발해의 함보가 그들의 투멘의 하나이다라고 쳐 찌끄린 것이다.

그냥 마유주나 쳐 마시는 야만인 버러지가 개수작을 역사에 싸 지른 그따구 것인 것이다.

고구려와 돌궐이 철천지 원수였음에 한국인들로부터 기록되었듯이 키르기스족들도 서돌궐과 철천지 원수였다고 정작 세계사에는 기록되어 있음에도 저게 뭔 뜻이지도 모르는 것들이 내가 뭘 적고 있는지 이해도 못하니까 낭설이나 개구라도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가이족계의 스키타이들이 후일에 카자흐스탄인이 되었던 부분이 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의 마이너팩션이라고 봐야 하는 키르기스족들도 스키타이계 군사문화를 일찍이 받아들였음이 분명하다.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와 같은 일들이 대애충 일어난 연대가 기원후 5세기는 되어야 한다는 거에요. 그러므로 기원후 3세기의 삼국지라는 개구라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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