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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타이와 고구려, 한민족
게시물ID : history_300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4
조회수 : 179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20/07/25 17:20:37
유대인의 참스트롱홀드였던 오늘날의 뉴욕과 대비되는 크테시폰은 카스피해연안의 지방인이 후일 이란인으로 거듭나게 될 분리주의 각성에 의해서 파르티아가 망하고 사산조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완전히 박살이 나고 말았다.

그뿐 아니라 유대인을 포함한 실크로드의 개척자들이었던 파르티아계 스키타이인들이었지만 유라시아대륙에서 실크로드의 쇠퇴와 더불어서 판스키타이즘이 쇠퇴한 것이다.

사산조의 군주들은 여전히 크테시폰에서 통치하고 있었지만 중앙아시아의 문제를 군사력으로 해결하려 들었기 때문에 문제를 더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좀 더 본질적으로는 중국으로 난입한 선비-투르크계 집단간의 내부투쟁이 전혀 종식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 것은 수나라가 등장하는 무려 6세기에 가서야 종식될 문제였으므로 외교적으로 카운터파트가 될 세력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시아에는 기나긴 암흑기가 찾아오게 된다.


이 것은 한국사와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잔존 스키타이계와 신흥 투르크 집단의 투쟁으로 비정될 수 있는 투쟁이 정작 유라시아대륙 가장 동쪽의 극동이라고 불릴 지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 것이 바로 고구려와 수당의 투쟁이다.

현대까지 한민족의 구체제 사가들이 뭐라고 했던 간에 발해는 실상은 투르크계 지배계급인 탁발족의 걸걸중상의 아들이라는 대조영이라는 놈이 세운 나라이다.
그러나 국명은 정작 스키타이놈들이 많다는 뜻의 파르티아를 의미하는 발흐로 이름을 지었다. 여기서 신라 또한 스키타이의 중국쪽 호칭인 흉노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에 발흐와 흉노가 같은 신석기 동굴집단에서 기인하는 동족성을 가진 것이지. 왕가는 정작 완전히 상이한 집단이 되어 있었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발해왕가는 끝내는 요나라 건국세력에게 축출당한 것이다.


여기서 사족으로 중세의 암흑기내에서 상위 1프로가 기라면 하류들도 모조리 정체성까지 재개조되는 과정들이 일어났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정작 한국이라고 스스로 불리면서도 대외적으로는 고려를 뜻하는 코리아라고 하는 이유이다.

대표적인 비교군은 우크라이나의 루스족이다. 러시안들 말이다. 본래의 루스족이라는 것은 키에프의 도시권력을 장악한 발트해권에서 넘어온 바이킹세력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위 1프로가 루스족을 칭하자 본디는 스키타이족이던 우크라이나인들 전체가 싸그리 루스가 된 것이다.

그러한 지점이 미드 바이킹스에 잘 묘사된다. 보면 알겠지만 개또라이같은 데스포티즘의 지배층들 앞에서 정체성까지 버리지 않고 견뎌낼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다닐라 코즐롭스키가 배역하는 올레그라는 캐릭터에 잘 묘사된다.

한민족이 고려가 된 것도 실상은 그러한 암흑기적인 정렬내에서 엉터리로 강요된 것이다.

먼저 고려지배층이라는 것들은 정작 고구려지배층 출계집단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단지 그들은 그 것을 표방했을 뿐이다. 그러나 궁예라는 놈부터 처음에는 신라의 왕자라고 하더니 나중에는 후고구려의 왕이라는 식으로 오락가락하고 있다. 어쩌면 단지 매드 맥스를 찍은 공간사내에서 매드 맥스새끼가 제멋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격이다. 그 매드 맥스가 바로 궁예이고 말이다.

궁예라는 놈이 매드맥스의 임모탄 조나 마찬가지였다는 막장은 그의 유명한 관심법이라는 것과 미륵이라는 개소리정도로 단편만이 오늘날에도 전해진다만 물론 궁예는 결코 고구려의 지배계급적인 소양의 일부도 지니지 않았던 놈이고, 단지 신라가 쇠퇴한 공간사내에서 혹은 신라북부지역에서 난입해온 것들의 군사적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한 막되먹은 오랑캐난입세력과 반란세력수괴들로부터 단지 참칭된 것이 고려라는 정체성인 것이다. 게다가 왕건이라는 놈도 유려하게 적힌바와 다르게 단지 예성강 일대의 해적과 밀수집단이었다고 봐야 한다.

특히 예성강 일대의 뱃놈들은 오늘날에도 자주 서해5도 지역에 출몰하는 짱개들과 지정학적인 교집합을 지닌 것들로써 그들의 출계집단이 한민족이 다수가 아니었을 거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즉, 왕건의 출계집단은 당시에 허난성을 거점으로 자리잡았던 투르크-선비계 짱개들 중에서 산둥반도에서 바닷가에 적응했던 놈들이 한반도로 넘어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 왕씨라는 성씨자체도 짱개의 성씨인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 수나라의 지배세력으로써 당시에 저장성일대에 인스톨 된 선비계 지배집단내에서 분명히 왕씨들이 존재하였다. 바로 진패선이라고 하는 남방계 지도자들로써 선비족들의 침략에 최후까지 저항했던 인물을 부관참시했다는 놈도 바로 왕씨였던 것이다.

그 왕씨가 진패선의 얼라이언스였던 왕승변의 자손이라는 개소리는 선비족 특유의 그들의 아우르던 역사를 그들의 역사로 편입시켜버리는 뻔뻔함에서 비롯된 개소리와 주작이라고 보여진다.

선비투르계 새끼덜은 그들과 투쟁했던 키르기스족이나 고구려를 선비투르계 집단으로 묘사하려고 한 시도가 지금에 와서는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종특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들을 간파해야만 중국과 한국사 고대와 중세사를 쓸 자격이 있는 것이다.
갸들이 적은 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수준으로는 한갖 짱개의 구라로 점철된 그 역사를 다룰 일말의 자격도 없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구세대 사가들의 그 어떠한 납득도 모조리 엉터리라는 것이다.

이틀테면 돌궐과 고구려가 연합해서 당과 대립하려고 했다는 연구따위 말이다. 그러한 것들은 심각하게 그들에 대한 분석이 결여된 것이다.

고구려가 돌궐과 어떻게 연합할 수 있냐고. 철천지 원수인데 말이다. 정작 고구려 멸망 이후에 그리고 요나라도 멸망한 이후에 역시나 고구려계 출계집단들의 일부는 트란스옥시아나 지방으로 난입해서는 당시에 성하던 셀주크 투르크를 사실상 멸망시켰다. 즉, 고구려 때에도 고구려 이후에도 그들은 완전히 철천지원수였다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게다가 요나라는 그 선비투르크계 집단의 중화지배의 거점이던 야율요골이라는 놈의 지휘하에 카이펑과 정저우일대에 침략해서 해당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놓고는 그들의 거점으로 돌아갔다.
그러한 야율씨는 고구려의 지배세력의 출계집단이었음이 유력하다.

즉 어떤 견지에서는 고구려는 망했지만 고구려민족은 돌궐세력에게 후일에 창렬한 반격을 가한 것이다.

중국놈들은 그러한 패배조차도 있는 그대로 적지 않고, 절도사들의 반격에 물러났다 그 지랄이나 했지만 야율요골의 카이펑 점령은 비유하자면 한니발이 로마를 턴 것(실제로는 털지 못했다. 단지 로마의 벽까지 닿았을 뿐이다)과도 같은 임팩트 있는 성공한 원정이었던 것이다.


요나라의 카이펑 점령은 선비투르크계 지배세력에게 창렬한 영향을 발휘해서는 카이펑의 재건기 동안에 그들의 정체성이 싹 바뀌었다.
분란을 일삼는 무자비한 지배자들의 성격에서 안정된 제국을 추구하는 문명인으로 거듭날 자성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문명국가로써 중화국가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송나라이다.

송나라의 시대에 그동안 난입한 선비족 지배계급 집단으로써의 성격이 거의 희석되었고, 특히 전제왕조내에서 절도사와 같은 선비족군사계급적 전통이 공식화된 세력들의 존재가 완전히 부인되었다. 따라서 전제화된 정치를 수도에서 구현한다는 송태조 조광윤으로부터 오늘날의 시진핑에 이르는 경중심 전제지배의 정치전통이 성립한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송의 전제지배는 신라의 전제왕조나 고구려와 일본에서 대대로나 쇼군 가지던 중앙중심의 권력구조를 적어도 기원후 946년의 카이펑 함락이후에 중국인들이 경험해본 것으로써 나타난 문화적 영향의 결과일 수 있다.


따라서 매우 후일에 명과 조선은 그들의 체제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으로부터 교집합을 찾아서 중화와 소중화라고 했던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중국이 한국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되려 한국의 통경의식적인 통치전통이 고구려와 요를 거쳐서 중국으로 전수된 것이다.

물론 중국은 한국과는 다르게 매우 넓은 영토를 다스려야 할 필요로부터 특히 지방정책에서 강하게 서울에 종속시키기한 한국과는 차별성을 지닌 독특한 정치전통을 가져왔지만 적어도 그 정치전통은 946년 이후에 급격하게 유사하게 정렬되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본인의 관점에 따라서 현대의 현안들에 대해서 조금은 역사성에 입각해서 비판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duQ_mB1qYA

[최배근TV Live] 중국의 문제는 내부에 존재한다! 중국경제의 좀비화 가능성?


이 사람이 말하는 것들 따위에 대해서 말이다.

위의 동영상을 봤다는 전제하에서 말하지만 중국의 초기산업화에 크게 기여한 향진주의는 적어도 중국의 지방시스템은 한국에 비해서 훨씬 더 경쟁력이 있다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향진기업.png



중심주의 세계관.png


이 사람이 지나치게 한국과 중국의 정치전통을 양분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중심주의 세계관'이라는 문제는 정작 우리자신의 문제인 것이다.

그만큼 중국의 정치전통과 한국의 정치전통은 유사한 점이 많으며, 특히 베이징체제는 한민족을 분석했을 때에 신석기 동굴인들쪽의 출계집단과는 사실상 동일한 출계집단들이 세운 체제이다.

즉, 한국과 중국의 정치전통의 역사성은 보편성과 특수성의 범주로 묶을 수 있는 것의 수준이고, 보편성은 통경의식으로 연결되는 중심주의 세계관이라면 특수성은 적어도 중국의 지방조직은 한국보다 훨씬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중심주의 세계관을 비난하는 것은 실상 제얼굴에 침뱉기라는 것이다.


실상 북경이라는 도시도 요나라의 5경에서 비롯하였고, 서울이라는 것도 고려의 4경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누가 누구를 비난하냐는 것이다. 그게 한국의 존나게 비효율적인 지방행정이 이루어지는 지방행정구역에 사는 지방인으로써 내가 보는 시각이다.

따라서 문재인과 시진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배근이 중국체제를 더 이상 공산주의로 보지 않듯이 문재인의 체제 또한 실상은 전혀 좌파적이지 않다.

오래전부터 조금 식견있는 논객들은 한국에 (적어도 양당내에는) 진짜 좌파는 없다고 하였고, 민주당 역시도 중도우파에 더 가깝다고 하고 있었다.

최배근이 시진핑 체제의 중국의 문제가 관성적으로 국가(=베이징 행정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것은 우파인 민주당이 취하는 조세율 인상, 뉴딜등의 정책 또한 중앙정부의 힘으로 뭐든 해보겠다는 것이다.

즉 그가 중국에 행하는 비판은 고스란히 우리에게도 돌아오며,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욕하는 격이 된다.

(중략) 뒤는 나중에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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