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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전성기조차 신라의 똘마니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게시물ID : history_300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DireK
추천 : 0
조회수 : 200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0/10/22 08:24:12

애초에 고구려전성기라는 것을 비정했던 학자들은 친일파였음. 그러함으로써 당시에 일본의 만주국수립을 합리화시키면서 조선의 역사를 축소했던 것이었다고.

 

조선왕조는 적어도 이성계라는 놈의 개인적인 영도력으로 말미암아서 건주여진을 대략 200년 정도 복속시켰었음.

비교론적으로 볼 때에 조선과 건주여진의 관계와 신라와 고구려의 관계는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는 것임.

고려조에서조차도 윤관의 동북9성에 대한 여진족들의 반응은 고려왕의 권위를 인정할테니 통교를 막지는 막아달라는 것이었음.

 

그러므로 서울사가들이 인지하려고 하는 국가주의적 사관과는 다르게 정작 동북지역과 백두대간, 원산말 일대의 로컬내에서 정주민들의 갑이 일반적이었지, 여진족들이 그 동네에서 갑이었다고 할 그 어떤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되려 여진족들은 그들의 필수품인 소금과 후대에는 식량얻기 위해서 신라와 고려인들의 불합리한 조건도 받아들여야 되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대왕릉비의 내용 역시도 있는 그대로 해석하지 않는 편인데, 통상 알바뛰는 놈이 을이고, 가만 앉아서 부리는 놈이 갑이라는 입장으로 보자면 신라 이사금이 갑이고, 광개토가 을인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담덕이 입장으로야 자신이 신라를 구원하러 간 것이지만 신라의 입장으로는 고담덕이 씨;발놈아 빨리 군사끌고 온나 요런 것인 것이다.

 

그리고, 교과서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신라는 고구려세력을 당과의 투쟁에도 잘 활용해 먹었다. 당서에 의하면 신라가 고구려인들을 당이 점유한 백제지역으로 이주시키려고 하면서 나당전쟁이 발발했다고 나온다. 이러한 정황으로 보자면 고구려는 신라의 전가의 보도에 가깝지 않나 그렇게 간주된다.

 

심지어 고구려의 남하정책조차도 신라에 의해서 기획된 것이다.

 

애초에 신라는 남부지역에서는 매우 불안정한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는 기원후 3세기경에 포상팔국전쟁을 통해서 서경상연합과 전쟁을 했는데, 전쟁은 이겼지만 서경상세력의 뒤에 있는 백제나 왜가 개입해올 여지가 있는 불안정한 안보정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서경상지역은 진주, 합천 따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예로부터 인서울 권문세족새끼덜 2중대 성향이 강한 곳으로써 동경상권인 부산, 울산, 경주 지역과는 민심이 사뭇 다른 지역이다.

친서울성향이 아무 강한 지역이라고 보면 된다. 촉석루에도 우봉 이씨들 놀다간 흔적이 대놓고 새겨져 있는 곳이고, 오늘날에는 카이랑 대한민국 항공산업들이 들어가 있다.

그 느낌조차도 서울큰손들이 지덜 나와바리쪽에 핵심안보자산들은 박아놨다 그렇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렇지만 경제력으로는 예나 지금이나 동경상지역이 서경상지역을 압살하는 편이다. 그러니 전쟁을 하면 당연히 부산쪽이 이긴다.

그렇지만 서경상 새끼덜은 한성백제나 왜구의 개입을 추진할 여지가 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신라가 독립국이 아닌 것 외에는 지정학적인 이해관계는 별반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예전부터 일본의 고유한 양식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광주광역시 등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도 일부 발견되었고 발견되었을 당시 임나일본부설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하지만 한반도에서 전방후원분의 이전 형태인 주구묘가 대량으로, 그것도 일본보다 한 세기 이상 앞선 시기의 것들이 대량 발굴되면서 역관광당했다. 자세한 것은 임나일본부설 문서 참조.

 

물론 임라일본부설은 완전히 박살이 났지만 역으로 전라남부와 서경상세력이 일본에 정착했을 가능성만 더 열어놨지만 어찌되었던 속지적으로는 서경상세력이 일본에 존재하는 우호세력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내물 마립간 때와 선덕여왕때에 그러한 우려는 현실화되었다.

게다가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뻥카를 좀 많이 쳤지만 당시의 신라 마립간은 고구려의 항구적인 속국이라기 보다는 당대의 고구려 우위를 인정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정작 관계자체는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인 것이다.

 

되려 신라의 가려운 부분을 고구려가 많이 긁어줬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말하기는 뭣하지만 신라새끼들은 존나 야비해서 광개토에게 군사를 청하다가도 정작 군사를 거느린 집단이 내지에 다다르자 아따 성님 상석 여기 있소. 요지랄이나 한 것 같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본다면 모략의 주체는 신라라고 보는 것이다.

 

나아가서 장수왕의 남하 또한 언제 서경상세력과 야합할지 모르는 돌발변수인 백제와 왜를 견제하기 위해서 신라가 조장한 정황까지도 보여진다.

그러하다가 백제와 신라의 결혼동맹이 맺어지고, 결혼동맹내에서 사실은 신라가 조금 더 잘 나가는 사돈인 축인 것으로 백제와의 서열이 정리되고 나니까 고구려를 내쳐버리고는 고구려가 먹고 있던 땅들을 대거 쳐 먹어버리는 권모술수를 구사하는 것이다.

 

여기서 전반적으로 보면 고구려의 남하는 신라의 요청 혹은 묵인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고, 광개토 대왕은 분명히 신라 이사금에게 조금 좋은 칭호 좀 들었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애초에 신라가 고구려를 가지고 노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후대에 여진족들이 고려왕에게 교역 좀 해달라고 싹싹 비는 장면과 비교하면 아쉬운 것은 고구려이고, 신라가 갑질을 할 수 있게끔 하는 교역관계가 있어서 고구려따위 얼마든지 가지고 놀 수 있지 않았나 그렇게까지 비춰진다.

 

그러한 지점에서 신라의 전가의 보도가 고구려카드이고, 

신라야말로 정작 고구려카드로 

 

서경상놈들이 왜구와 결탁해서 쳐 들어온다=>고구려카드를 쓴다.

서경상놈들이 백제와 결탁한다=>고구려카드를 꺼낸다.

반도내에서 백제가 신라보다 더 우위이고, 중국왕한테 더 좋은 타이틀도 받았다=>고구려카드로 백제를 견제한다.

당이 백제지역을 먹었다=>고구려인들에게 백제지역에 살 수 있게 해준다고 유혹해서 처리한다.

 

이러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신라놈들이 살 땅이 부족하다=>고구려를 쳐서 프론티어를 개척해서 해결한다.

신라의 백성이 부족하다=>고구려놈들을 동화시켜서 사용한다.

신라의 강원지역거점이 없다=>고구려 퉁구스카새끼덜의 도시인 강릉(=퉁구스 이름 하슬라)를 뽀려서 사용한다.

 

 

도대체 광개토의 정신승리는 둘째치고, 누가 누구를 이용한단 말인가? 광개토가 신라땅에 군세를 끌고 왔을 때에 신라왕이 똥구녕 좀 빨아줬다고 고구려의 우위라고?

유럽의 중세로 치자면 왕이 권신들인 공작들의 후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심지어 공신들의 court에서 성장한 왕들도 있었다. 실성 이사금이 광개토에게 볼모로 간 것도 그러한 맥락인 것이다.

그러니 정작 광개토라는 놈의 정권은 관점에 따라서는 신라의 지방정권이고, 결코 후대의 사가들의 관점인 전제화된 국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되려 고구려야 말로 신라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만주지역에서 패권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독점적 교역권을 가지고 있으며, 문물도 신라문물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앞섰을 것이다. 당시에 중국쪽은 선비족들이 설칠 시절로써 어쩌면 한반도보다 중국쪽이 더 미개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신라문물을 받는 것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라의 민정문서를 보면 이미 신라는 조선조신분제의 근간이 될만한 촌내에서 촌민들의 종속을 완성시켰다. 그 점에서 신라나 왜나 매우 악의적인 생산계급을 천시하던 문명권이었다.

그 것은 교역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인들과 신라간의 사무역은 거의 성립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신라의 잉여는 철저하게 촌과 지방의 보호자들의 것이었고, 신민들은 마치 가축과 같이 문서상으로 관리되었다.

따라서 신라와 고구려의 교역형태 역시도 국가간의 거래인 조공무역으로써 왕과 왕의 거래인 것이다.

그러니 충분히 신라매금이 이런저런 컨디션을 붙여서는 갑질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그간 고려조의 삼국통일을 신라의 통일과 매칭시키려고 한 구체제 사가들의 관점과는 다르게 신라는 고구려를 아주 적절하게 이용함으로써 남부지역의 통일인 삼한일통을 달성할 수 있었다.

고구려가 남하정책을 폈다고 하는 것 조차도 신라의 안보정책에 카운터파트가 되어서는 신라의 손 위에서 조종당한 것이며, 신라는 반도 서부지역에서 백제와 고구려간의 상호갈등이 발생하도록 조장함으로써 오늘날에도 1300만 남동임해지역의 유일한 경쟁지역인 수도권지역을 안보혼돈에 빠뜨리면서 신라의 나와바리만이 반도의 내수와 교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지역이 되도록 함으로써 신라의 삼한일통을 획책하였다.

 

애초에 동경상계들과 서경상계들이 맞붙었을 때에 양자의 own 파워는 거의 대등했지만 동경상계들이 지닌 유일한 장점이자 모든 장점은 동경상계들을 반도동북지역을 통해서 오랑캐들을 이용해먹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단지 그 것 하나때문에 장기적으로 신라와 경주및 김해, 부산, 울산, 포항지역인들이 진주, 고성, 마산, 합포(=창원)새끼덜을 이겼던 것이다.

 

대저 고구려새끼덜은 신라입장으로는 소금이랑 쌀만 좀 챙겨주면 얼마든지 부려먹으면서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놈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왕좌의 게임에서 노예만의 주인(=신라)들이 이용해먹는 도트라키 셀소드 새끼덜과 똑같은 놈에 불과했던 것을 가지고 고구려찬양이라는 개씹덕이 엉터리로 비정된 것이다.

 

요컨데 한민족 삼국론은 엉터리이고, 신라노예마스터 지주왕새끼의 도트라키 용병들의 도트라키왕 새끼가 담덕이라는 놈에 불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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