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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영웅, 한국인 양칠성 (feat. 일본군?, 미얀마 힘내라
게시물ID : history_301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재즈매니아
추천 : 2
조회수 : 1229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1/04/06 14:36:12

 

자신들은 미국덕분에 나치독일의 지배에서 벗어났으면서 베트남, 알제리에서수많은 사람들을 학살하며 야욕을 불태웠던 프랑스처럼 네덜란드 역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독립을 선언한인도네시아를 수만명의 병사를 동원해서 다시 침략했습니다. 참… 어이가없네요.

 2차 세계대전당시 네덜란드의 공백을 이용해 손쉽게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군은 네덜란드보다 나은 점도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어 사용을 금지하면서, 일본어 사용을 강제한 것이 아니라권장한 것 입니다. 쓰기싫으면 인도네시아어를 써도 된다는 선택권을 준거죠. 이렇게 일본 제국주의가 상대적으로 좋아보이면 안되는데…

그리고 일본은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총알받이로 쓰려고 군사훈련을 시켰고, 패전시에 소총과 폭격기, 경전차등의 무기를 많이 남겨두고 철수했습니다. 이것들이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에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영국군과네덜란드군은 같이 인도네시아를 재점령하면서 독립파 인도네시아인들을 납치하고 학살하는 동시에 무장을 해제하고 불법무기를 내놓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럴때 보면 1791년 12월 15일 비준된 미국의 수정헌법 2조가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요즘 미얀마를 봐도 비무장 투쟁은 상대방이 그래도 상식적이고 인간다울 때 통하는 것인데 지금의 미얀마군부는 짐승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대항하려면 잘 조직된 무장조직이 필요하겠죠. 다시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서영국군과 네덜란드군이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 불법무기를 내놓으라고 하자 무장한 인도네시아인들은 이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1945년 11월27일부터한달간 벌어진 수라바야 전투에서 12만의 민병대와 중무장한 3만의영국군이 충돌했고 영국군은 지휘관이 사망하며 가까스로 승리했지만 암바라와 전투에서는 독립군에게 패배해서 후퇴했습니다. 영국군은 인도네시아 독립에 찬성하며 철수를 약속했는데 1946년인도네시아는 46년전 영국이 남아프리카에 보어전쟁 (보인인: 네덜라드 출신)을 위해 18만명에이르는 영국국을 파병했던 것 처럼 그 규모에 필적하는 12만여명의 병력을 2차 세계대전으로 초토화가 된 입장에서도 긁어모아 보냈습니다.

네덜란드군은 1947년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취해서 사상자6천명의 피해로 인도네시아 독립군 15만명을 사상시켰습니다. 1948년 네덜란드와 인도네시아 독립파는 휴전을 하고 한반도처럼  분단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수카르노’가 이끄는 독립파는 공산당의 반란을 확실하고 가혹하게진압하며 미국의 지지를 이끌어냈습니다. 1948년 12월네덜란드가 휴전을 깨고 재침공하자 미국은 네덜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계속 침공이 이어지면 마셜플랜의지원을 중단하고 물자지원을 끊어버리겠다고 했습니다. 금융치료에 들어갔네요. UN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네덜란드의 침공행위 중지를 요구했고 1949년1월에는 인도네시아 독립정부 수립을 요구했습니다.

이 인도네시아독립전쟁에 한국인 영웅이 등장합니다. 그의 이름은 양칠성(梁七星)입니다.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전북 완주에서 태어나 24살이었던 1942년 일본 남방군의연합군포로 감시원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 배속되어 복무했습니다. 이 당시 연합군의 포로는 8만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2014년 안졸리나 졸리가 감독한 영화 ‘언브로큰’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네요. 실존인물 루이스 잠페리니의 이야기를 바탕으로한연합군 포로의 이야기 입니다. 양칠성은 일본군에 끌려온 한국인 동료8명과함께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투신했습니다. 1945년 가을부터 그는 PPP부대에서영국군에 맞서 전투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폭파전문가 였다고 합니다.

1948년 11월 산속에서 게릴라 작전회의중 네덜란드군의 기습작전에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는 휴전하루전날, 가루트 시장에 끌려나와공개총살을 당했는데 죽기직전에 “메르데카! 메르데카! 나는 죽어서도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원한다!”외쳤다고 합니다.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주인공을 연기했던 맬깁슨이 “프리덤”이라고 외치는 장면같네요.

1975년 양칠성은 네덜란드에 의한 공개처형 26년만에 인도네시아군의장성이된 당시 동요로 인해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추서되었습니다. 1995년에는 그의 묘비명이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에서 ‘Komarudin, Yang chil-sung’으로바뀌었습니다.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는 양칠성(梁七星)이란 이름에 내천(川)자를 더해만들어진 일본이름으로 그 당시 흔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외조부께서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셔서 같이 일본학교에가 생활기록부를 하루종일 찾아봤는데 김(金)씨가 없었는데혹시나 해서 ‘가네야마(金産)’로 찾아봤더니 임의로 이름을 바꿔놓은 기록이 있었습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당연히 일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의일본유족을찾았는데찾을수가없었습니다. 수소문중에그가조선인이라는사실을알게된무라이요시노리, 우쓰이아이코일본인교수부부가양칠성의조카를직접찾아냈고, 전북완주까지직접방문해서여동생에게그가인도네시아독립영웅이었으며그나라의영웅묘지에묻혀있다고알려줬습니다. 정말고마운그리고대단한일본인입니다. 존경합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양칠성을‘인도네시아를비추는빛’이라는의미로‘Komarudin’이라는이름을붙였다고합니다. 그는인도네시아인부인과그들사이에낳은자식도있었다고합니다. 현재남은가족은며느리와손자두명, 증손자들이있다고합니다. 손자들은할아버지인양칠성이너무나도자랑스럽고한국을인도네시아와같은조국으로생각한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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