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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 왜구는 열도와는 무관한 중국동해안의 백제유민
게시물ID : history_3044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우익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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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 90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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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시간 : 2023/03/09 07:50:26

원의 쿠빌라이는 사무역을 금지하고, 관민 합자의 무역선(관7, 민3)만 허용하였지만, 성종은 해금을 철회하고 적성국이었던 일본과의 무역까지 허용하였으면서도, 백제유민과 고려와의 왕래는 금지시켰다. 김성호, 『중국 진출 백제인의 해상활동 천오백년 2』, 맑은소리, 1996. 176-179쪽.

고려와 백제유민이 결합할 경우 원의 통치에 위협이 될 것으로 우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원나라 말엽인 1348년부터 백제유민인 방국진과 장사성은 원의 쇠약을 틈타 독자세력화 하였지만, 주원장이 이들을 제압하고, 1368년 즉위하여 백제유민의 본거지격이었던 주산군도를 철저히 파괴하고 해금정책을 실시하자, 생활기반이 파괴된 백제유민은 해적이 되었다. 김성호, 위 책, 189-210쪽.

명나라는 이들을 왜구라 불렀다. 명이 이들을 왜구라 한 이유는 양자강 어귀가 원래 왜인들이 정착했던 곳이기 『후한서』 「동이전」 왜, 其地大較在會稽東冶之東, 與朱崖·儋耳相近

『삼국지』 「위서-동이전」 왜, 計其道里,當在 會稽、東冶之東。

때문이다.

따라서 명대 왜구의 왜는 고대에 사용되었던 종족의 명칭이고, 지역명으로서의 왜(일본)와는 무관하다. 백제유민을 당이 신라라 하고, 북송이 고려라 하였다는 것은 중국인이 백제유민이 조선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 명이 해적을 고려구나 조선구라 할 수는 없었으므로 고대에 사용되었던 왜라는 종족명을 사용하여 왜구라 한 것이다.

강단·중제·일제유사사학은 명이나 고려를 침략한 왜구가 일본의 해적이라고 사기를 친다. 당시 일본은 원양항해선을 만들 수 없어 백제유민이 배에 태워주지 않으면 중국 동해안에 갈 수도 없었다. 김성호, 위 책, 207쪽.

『명사』가 「일본전」에 왜구 관련 기사를 쓴 것은 『삼국지』와 『후한서』가 양자강 어귀의 왜집단과 열도를 의미하는 왜를 혼동하여 왜조에서 함께 기술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료에 왜구라 되어 있으니 일본의 해적인 줄 착각하여 「일본전」에 기술한 것이다.

중국을 탈출한 백제유민은 그들이 무역활동을 해서 알고 있었던 지역인 고려, 대만, 일본, 동남아시아 등지로 이주하였다. 김성호, 위 책, 363쪽.

동남아시아로 간 이들은 나중에 화교라 불려진다. 후술하겠지만 일본에서도 이들을 당인(唐人)이라 하여 중국인으로 취급하였다. 우리나라에 화교가 없는 이유는 조선이 해금정책을 완벽히 실행한 결과, 명과 밀무역을 할 수 없어, 그들 공동체의 해상무역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평화적으로 이주한 이들도 있었겠지만, 이들의 이주과정에서 원주민과 갈등이 있었던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해적행위를 했던 집단도 많아서, 이들은 명이 명명한대로 왜구라 불리어지게 되었다.

고려는 이들 백제유민이 노략질을 않는다 하고 거주하기를 원하는 경우 이들을 받아들였다. 『고려사』 공민왕 18년(1369년) 11월 戊午, 倭掠寧州·溫水·禮山·沔州漕船. 初倭人, 願居巨濟, 永結和親, 國家信而許之, 至是入寇.

이렇게 평화적으로 정착한 이들을 투화(投化)왜인 또는 향화(向化)왜인이라 하였다. 고려의 백제유민 수용과 이들이 일본 출신의 해적이 아니라 중국 동해안 백제 유민임은 1370년 진군상 사건으로 증명된다. 고려사의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고려사』 공민왕 19년(1370년) 6월 辛巳, 中書省遣百戶丁志·孫昌甫等來, 究蘭秀山叛賊陳君祥等, 咨曰, “君祥等, 積年在海作耗, 大軍克平浙東之後, 本賊旣降復叛, 劫殺將官. 已嘗調兵往討, 其賊畏罪逋逃, 今有明州人鮑進保, 自高麗來告, ‘君祥等挈其黨, 見於王京古阜, 匿罪潛居.’ 王國必所未知, 撫以爲民, 其賊詭計偸生, 姦心實在. 若使久居王國, 將見染惑善良, 爲患匪輕. 忽然復歸其穴, 則往來旣無少阻, 請將賊徒解來, 明正其罪, 庶絶姦惡.” 王命並其妻子及貲産以送, 凡百餘人.

중서성(中書省)이 백호(百戶) 정지(丁志)·손창보(孫昌甫) 등을 파견하여 난수산(蘭秀山)의 반적(叛賊)인 진군상(陳君祥) 등의 행적을 물었는데, 그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진군상 등이 여러 해 동안 바다에서 난리를 벌였는데, 우리 대군(大軍)이 절강성 동부 지역을 평정한 뒤에 이 반적이 항복하였다가 다시 반란을 일으켜 우리의 장수와 관리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이전에 일찍이 군대를 파견하여 토벌하였지만 그 반적들은 처벌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도망쳤는데, 이제 명주(明州) 사람으로 포진보(鮑進保)라는 자가 고려로부터 와서 아뢰기를, ‘진군상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고려의〉 수도와 고부(古阜)에 나타나 죄를 은닉하고 숨어살고 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왕국에서는 필시 알지 못하고 어루만져 민(民)으로 삼았을 터인데, 그 반적들은 모략으로 삶을 얻으려는 자들로서 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로 하여금 왕국에 오랫동안 거주하게 한다면 장차 선량한 사람들까지 오염시켜 결코 가볍지 않은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돌연 자신들의 소굴로 다시 돌아간다면 아무런 장애도 없이 왕래할 것이니, 청하건대 반적의 무리들을 압송하여 보내서 그 죄악을 올바르게 밝힘으로써 간악한 자들을 근절시켜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들의 처자 및 자산까지 함께 송환하도록 명령하니, 모두 100여 인이었다.

진군상은 절강성에서 해적행위를 하였으므로 명이 말하는 왜구이다. 이들이 일본구라면 일본으로 도망가야 하는데 고려로 왔다. 포진보도 백제유민으로 고려에 같이 왔다가 사이가 틀어져 진군상을 명에 고자질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명에게 해적행위가 발각되었던 경우는 예외적일 것이고, 해적행위를 하지 않고 바로 고려로 이주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므로, 상당한 수의 백제유민이 고려로 와서 정착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은 “왕국에서는 필시 알지 못하고 어루만져 민(民)으로 삼았을 터인데”라고 말하는데, 이는 명나라까지 당시 백제유민들이 고려로 와서 정착한다는 것을 알 정도로 이들의 고려 이주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말 조선초 1350년부터 1399년까지 해적의 침입을 경인년부터 시작된 침략이라 하여 경인왜구라 하는데, 침략은 서남해안뿐만 아니라 한반도 전역에 걸쳤고 50년 동안 369회 606개 지역에서 발생했다. 김성호, 위 책, 216-222쪽.

100척 이상의 대선단이 침략한 횟수만도 11회나 된다. 김성호, 위 책, 223쪽.

이들 경인왜구는 구주 서북의 해안가와 구주 서북의 섬과 대마도에 정착한 백제유민이다. 당시 일본은 분열되어 약탈하기는 어렵지만, 근거지를 찾기는 쉬웠다. 지방정권은 이들을 쫓아낼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지만, 약탈할 장소와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려는 강력한 중앙권력이 있어 근거지를 구하기는 어렵지만, 약탈하고 도망가기 쉬웠고 조운선이라는 쉬운 약탈대상도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대마도와, 구주 서북의 해안가와 섬들을 점거하고, 고려를 약탈하였다. 조선(고려)과 일본 지방정권이 연합하여 김성호, 위 책, 268-276쪽.

이들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고, 주원장 말기에 해금정책이 해이해지면서, 경인왜구는 종료되었다. 조선(고려)은 1389년 1396년 1419년 대마도의 정착지를 공격하여 힘을 보여주면서, 귀화 허용, 관직 부여, 삼포를 통한 무역 허용을 통해 이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포용하였다. 김성호, 위 책, 268-302쪽.

그러나 삼포왜란과 사량왜변 후 무역 규모를 줄이고 규제를 강화하여 이들을 실질적으로 격리하였다. 김성호, 위 책, 302-306쪽.

조선과 단절된 이들은 중국 동해안에서는 반상반구(半商半寇)가 되어 밀무역과 해적활동을 하고 여타 지역에서는 무역을 하며 일본의 해외무역상이 되었다. 1635년 일본은 해외무역을 통제하기 위해 이들을 나가사키로 이주시켰는데, 1670년대에 이르러서는 나가사키 전체인구 약 6만 명의 6분의 1인 약 1만 명이 이들 무역상일 정도로 번성하였다. 나가사키시 누리집 「당인 주거지의 역사」 (2022.6.22. 현재)

(https://www.city.nagasaki.lg.jp/sumai/660000/669001/p006909_d/fil/kore.pdf)

나가사키의 백제유민은 흥복사를 중심으로 한 삼강방 (三江幇: 절강·강남·상서), 복제사를 중심으로 한 천장방(泉長幇: 복건성 천주·장주), 숭복사를 중심으로 한 복주방(福州幇: 복건성 복주), 성복사를 중심으로 한 광동방(廣東幇: 광동성)이 있었다. 内田直作, ‘華僑’, 「世界歷史事典」, 平凡社, 1956. 273쪽. 김성호, 위 책, 346쪽에서 재인용.

이들이 일본 밖에서는 왜구라 불렸지만, 일본에서는 당인(唐人)이라 불리며 중국인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주원장이 왜구라 명명한 실체가 백제유민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나타낸다.

16세기 중엽 주환이 밀무역을 법대로 강하게 처벌하자, 백제유민과 명정부간 보복이 격화되면서 백제유민은 대학살과 추방으로 중국동해안에서 사라졌다. 김성호, 위 책, 307-328쪽.

『주해도편(籌海圖編)』 「구종분합시말도(寇踪分合始末圖譜)」에 기재된 해적집단의 두목 이름은 김자노·이광두, 허동, 왕직·진사영, 등문준·임벽천·심남산, 숙현, 정종흥·하아팔·서전·방무, 서해솔·왕강경, 진동솔, 엽명솔, 홍택진, 엄산노, 허서지, 숙설봉·장련, 사노이고, 이들 중 일본을 근거지로 한 집단은 왕직, 등문준, 서해솔, 진동솔, 엽명솔이었다(김성호, 위 책, 314-315쪽).

모두 중국식 이름이고 일본식 이름은 단 하나도 없다. 김성호, 위 책, 314-315쪽.

『명사』는 대개 진왜가 30%이고 종왜자가 70%라 했는데, 『명사』 「일본전」 [가정 34년(1555년) 5월 부분] 大抵真倭十之三,從倭者十之七

이는 구주나 대마도에 근거지를 둔 백제유민들이 사무라이를 용병으로 고용했기 때문이다. 김성호, 위 책, 319-322쪽.

15세기 초의 정화 함대는 복건 광동 절강의 백제유민으로 인해 가능했다. 김성호, 위 책, 349쪽.

16세기 중엽의 탄압으로 백제유민이 중국에서 사라지자, 명나라에서는 조선(造船)과 항해에 관한 책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는 백제유민이 사라져 중국인 스스로 배를 만들고 항해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성호, 위 책, 348-350쪽.

여말선초의 왜구가 열도에서 온 것처럼 사기치는 강단 일제 중제 유사사학은 백제유민의 실상이 드러나 중국 동해안 백제의 위용이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중제 일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강단이 이들에 동조하는 것은 이들이 매국세력 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강단유사사학은, 자신들이 일제 부역자임을 숨기기 위해 사고력이 떨어지고 일제에 충성하는 자들을 그들의 후계자로 삼고 그것이 대대로 계승되는 매국카르텔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한 상고사 에서 인용]

출처 https://blog.naver.com/bbondd0/22303919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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