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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식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468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3
조회수 : 366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2/06/12 22:16:42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전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통스럽다. 우선 자신의 생명이 끊임없이 적에게 위협받는다는 사실이고, 그로 인해서 행동의 자유를 극심하게 제약받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전쟁 중에는 먹을 것을 챙기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임진왜란 당시에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웠던 쪽은 단연 조선의 백성들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피난을 가느라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조정에서도 백성들이 굶주리도록 완전히 내버려 두지는 않았다. 1593년 4월 2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비변사에서 이런 구휼책을 제시했다.

  - 경기도의 백성들은 겨우 적의 위협에서 벗어났으나,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으니 경기 감사와 한성 판윤 유근에게 명하여 잡곡을 덜어내어 계속 구휼하게 하소서.

  하지만 이런 구휼책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혜택의 범위는 매우 제한되어 있었다. 절대 다수의 백성들은 전쟁 기간 동안 내내 굶주림에 시달렸으며, 그러다 보니 영양 섭취를 하지 못해 몸이 쇠약해져 전염병에 쉽게 죽어나갔다.
 
  백성들이 겪고 있는 기아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 유성룡의 저서인 <징비록>에서 있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자신이 본 비참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 명나라 군사들이 음식을 먹고는 그 중 한 명이 속이 안 좋아서 구토를 했더니,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백성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어 그것을 주어서 먹으려 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슬픈 마음이 들어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

  명나라 군사들이 토해낸 구토물을 먹을 정도로 조선 백성들의 굶주림은 극에 달했던 것이다.


  그나마 토사물조차 먹을 수 있는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오랫동안 음식을 먹을 수 없게 된 백성들 중 일부는 흙을 먹기까지 했다. 흙 중에서도 하얀 흙(白土)을 체에 잘 걸러 가장 부드럽고 고운 부분을 받아낸다. 그런 다음 그것을 물에 잘 씻어서 말린 후, 떡을 하는 방식으로 먹었다고 한다. 하얀 흙은 아무 곳에서나 있는 것이 아니고 몇몇 특정한 지역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얀 흙도 먹지 못하고 굶주렸던 사람들은 끔찍한 선택을 하기도 했다.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혐오스러운 범죄 중 하나가 바로 식인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배고픔의 극한에 시달린 백성들이 사람을 죽이거나 혹은 죽은 사람의 살점을 떼어 먹는다는 대목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1593년 12월 3일 <선조실록>에 따르면 선조가 좌의정 윤두수를 불러 “경상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하고 묻자 윤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 신이 팔거에 갔을 때에 사람을 잡아서 먹은 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즉시 군관을 보내어 베었습니다. 충청도와 전라도에 들어갔을 적에는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습니다.
 
  이해 당시 경상도는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었고, 모든 식량들은 일본군이 차지하고 백성들은 가장 굶주려 있었다. 반면 충청도와 전라도는 조선 수군과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에게 점령당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나마 식량 사정이 나아 식인이라는 끔찍한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았다.


  식인의 문제는 이후로도 자주 거론된다. 1594년 1월 17일, 사헌부에서는 이런 흉흉한 장계를 올렸다.

  - 기근이 극도에 달해 도성 안에서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살점을 먹으면서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길가에 쓰러져 있는 굶어 죽은 시체에 완전히 붙어 있는 살점이 없을 뿐만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산 사람을 죽여서 내장과 골수까지 먹고 있다고 합니다. 옛날에 이른바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 것도 이처럼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보고 듣기에 너무도 참혹합니다.

  백성들이 굶주림에 못 이겨 식인을 한다는 끔찍한 사실에 충격을 받은 선조 임금은 자신의 죄를 스스로 꾸짖는 교서를 지어 전국 각지에 내리게 했다. (1594년 4월 1일 선조수정실록 참조)

 
  같은 해 4월 6일에 사헌부는 이런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하고 심지어 부모 자식과 부부 간에도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으니 지금보다 더 환란이 극에 달한 때는 없었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어떻게 궁궐을 보수하는 공사에 그들을 동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상소를 읽고, 선조도 사헌부의 주장에 동의하여 궁궐 보수를 그만두도록 했다.





이하는 사설입니다.//


인육을 목적으로 살해를 했다고 추정이 되는 오원춘의 살인 이후 중국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반감을 기반으로한 민족주의적 발상 등에 근거하여 중국이 상시적으로 식인을 했다는 애기가 마치 정설처럼 나오고 있으나 그런일 없습니다, 

젓갈을 뜻하는 해醢 라는 한자를 인육을 뜻하는 단어로 변경시키는 것이나 남촌철경록을 요리책으로 둔갑시키는것, 환공의 고사를 악의적으로 해석하는것이나, 삼국지 정사에도 없는 내용을 있는것 처럼 내놓는 것등이 이런 소위 말하는 카더라의 주요한 사례겠지요,

(흔하게 일상적인 식인에 대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아즈텍의 경우는 인신 공양후 남는 시체를 호박꽃이나 토마토에 버무려 먹었습니다만 대부분의 인신공양이 수확기에 벌어진 점이나 그 들의 종교관 등을 볼때 단백질 공급원의 부족이 사유라기보다는 사실상 문화적 배경에 따른 차이라고 봐야 할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선택의 여지가 없던 극한의 기아의 상황에서 나온 식인은 세계에서 어느 문명권이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가령 이러한 사례는 앞서 본문에 언급된 조선의 임진왜란 이나 역시 조선에서 벌어진 2년 간의 대기근으로 최소 10%, 최대 25%가 사망하고 인구의 절대 다수가 기아를 체험했다는 경신 대기근,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대기근 등이 있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식인 기록은 상기의 내용말고도 자주 나오지만 극심한 기근이나 전란이 빈번하게 벌어지던 시절을 제하면 대개 민간요법에 의한 행동이 대부분입니다.(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병든 부모에게 삶아 먹이거나 병든 부모를 위해 손가락을 잘라 먹이거나 하는등 말이지요,)


식인에 관련된 사례를 간략하게 몇가지만 옮겨보자면


충청감사 이홍연이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다. 

"연산의 사노비 순례는 깊은 골짜기에서 사는데, 다섯살 난 딸과 세 살 난 아들을 잡아먹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가서 정말이냐고 물어보았더니, '자식들이 병으로 죽었다. 큰 병과 굶주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삶아먹었다. 죽여서 먹은 것이 아니다'라고 합니다. 순례의 꼴은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정도였고, 마치 사람이 아니고 귀신 같았습니다. 반드시 미친 사람일 것입니다." 

(현종개수실록 23권, 현종 12년 12월 신미) 

龍州饑 人相食 發倉賑之
용주(龍州)에 기근이 들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으므로 창고를 열어 구제하였다.

(고려사절요 1361년 기록)

이산해의 노방원을 보면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三人死路傍(삼인사로방) : 길가에 죽어 있는 세 사람

皆是流離子(개시유리자) : 모두가 유랑하는 사람들이라

一爲烏鳶食(일위오연식) : 까마귀와 솔개에 먹힌 한 사람

過者不忍視(과자불인시) : 지나가던 사람들 차마 못본다

一爲肌民斫(일위기민작) : 굶주린 사람들이 살 베간 사람

白骨無餘肉(백골무여육) : 뼈만 앙상하고 살 한 점 없도다 ... 


"남의 배를 갈라 사람을 죽인 자를 체포하는 일을 해조로 하여금 공사로 만들게 하라."

(선조 09(1576년)년 6월26일 기사.)

>조선시대, 인육(人肉, 사람의 고기)과 사람의 간담(肝膽, 간과 쓸개)을 창질(瘡疾, 매독)을 치료하는 약으로 썼기 때문에 배를 가르고 사람의 장기를 빼가는 무리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 흉악한 무리들이 소아(小兒)를 사람이 없는 곳으로 유괴하여 살해함은 물론이고 비록 장성한 남녀라도 혼자 길을 가는 경우에는 겁략하여 모두 배를 가르고 쓸개를 꺼내어 갔다고 하는데. 그 쓸개를 팔면 많은 값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지요,

그래서 나무에 묶여 배를 갈리운 자가 산골짝에 잇달아 있으므로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러 산에 갈 수가 없었고 이에 왕명으로 법을 만들어 현상금을 걸고 체포하게 한 것입니다.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 이어둔(李於屯)이 사람의 고기를 먹었는데 임금이 그것이 몹시 굶주려서 실성하였기 때문이라 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면하라고 명하였다."

(숙종22년(1696년) 2월5일자 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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