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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공부중 -7
게시물ID : history_75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구이일
추천 : 1
조회수 : 570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3/02/06 20:00:49

이번엔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과 쇠망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


먼저 간략하게 신라의 시기는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을 지었는데, 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한 구분입니다.


상대는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 삼국시대 이며 성골 출신의 귀족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중대는 삼국을 통일 시킨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약 100년이며, 진골출신의 귀족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약 120년간 이며, 경순왕을 끝으로 멸망을 하였습니다.


신라의 발전은 보통 왕권의 강화와 연결이 되며, 쇠락기에는 왕권이 약화되는 모습으로, 왕권에 관련하여 설명하겠습니다.


먼저, 이전에 적은 것처럼, 내물왕,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을 거쳐 왕권을 강화했고,


중대에는 전제왕권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이로서 집사부의 시중은 역할이 강화되었고,


귀족들의 수장인 상대등은 역할이 약화되었습니다.


진골출신 최초왕인 무열왕에 이은 문무왕 시기에 외사정과 같은 지방조직 관찰 조직을 정비하고, 상수리 제도를 통해 지방 귀족들의 자식을


신라의 수도에 불러서, 중앙집권화를 하였습니다.


특히, 신라의 중대에 신문왕은 여러 방법으로 전제왕권을 꾀하였는데, 


먼저,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들을 숙청해내어 권력의 집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김흠돌의 난은 현재 해석으로는 실질적으로


난을 일으킨 것이 아닌 명분을 위해서 난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9주 5소경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신하들에게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여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켰습니다.


관료전은 단순히 수조권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녹읍은 수조권만이 아니라, 공납, 노동력까지 징발할 수 있는 권한으로,


녹읍을 통해, 귀족들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 녹읍을 폐지하여, 왕의 권력을 키웠습니다.


또한, 진골 출신만이 아닌 6두품을 등용하여 자신의 사람을 늘렸으며, 국학을 통해 유교를 가르침으로서 왕에 대한 충성해야하는 


학문적인 이유를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신라가 증훙이 되고 왕권이 강화될 것 같았지만, 신라 하대에 왕의 권력이 약해짐에 따라 쇠퇴기에 들어갑니다.


집사부의 시중의 권한이 축소하고, 상대등이 권한이 커짐음 물론, 녹읍이 부활하여 귀족의 힘이 기반이 생성되었고,


6두품이 천대를 받아 지방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6두푸뫄 지방호족들이 결합하여


지방에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고, 이는 후삼국시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후삼국시대가 일어나기 위한 정신적 학문은 새로이 풍수지리가 발달하여, 경주의 기가 쇠한것을 명분으로 삼고,


불교 중 선종이 발달하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진골 출신의 왕만이 아니라, 우리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지방 세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신라가 쇠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행정조직


중앙에는 귀족회의로 화백회의(상대등)이 있었고, 수상으로 시중이 있습니다.


중앙 직계의 행정조직으로 왕 및에 집사부 외 13부가 있었고,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의 가르쳤습니다.


지방의 행정조직으로는 수도에 6부, 지방에 8주, 군, 현, 촌이 있었으며, 특수구역으로 5소경이 존재했습니다.


6부에는 9서당이라는 중앙군이 있었는데, 이 중앙군은 백제, 고구려, 말갈, 신라인 들이 전부 포함된 군대로 신라의 유화 정책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래 지방에는 9주가 있었으며 지방관의 명칭이 도독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전 삼국시대에서는 군사적 + 행정적 모습이라면,


이제는 행정적 성격이 강화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방은 외사정이라는 기구를 통해 감사하고, 상수리 제도를 통해서 권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상주하는 군대로는 10정이 있습니다.


특수구역으로는 5소경이 있는데 이는 수도의 치우침을 보완하고, 지방문화가 발달시키기 위해서 구역을 만들었습니다.


원주에 북원경, 남원에 남원경, 충주에 중원경, 청주에 서원경, 김해에 금관경이 존재했습니다.



발해의 발전과 쇠망


발해는 분명 고구려를 계승한 역사이고, 우리가 인식해야할 역사이지만 사료가 많지 않아 많은 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먼저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698년에 건국을 하였고, 무왕, 문왕, 선왕 차례대로 성쇠를 계속해왔으며, 10세기에 급작스러운 멸망을 한 국가 입니다.


무왕은 상당한 정복군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북만주를 장악하였고, 요서 및 산중 지역을 공격하엿습니다. 또한,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의 별개로 선을 그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외교는 돌권 일본과 친선외교이고, 당, 흑수말갈, 신라와 적대적인 성격을 취하였습니다.


문왕시기에는 무왕과는 다르게 당나라와 친선을 유지하고, 신라와의 교류를 시작하엿습니다.


또한, 수도를 동모산 -> 중경 -> 상경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


선왕시기는 발해의 전성기 였으며, 드디어 요동에 진출을 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해동성국으로 불렸습니다.


그 이후에 926년에 거란이 침략하여 발해는 멸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


발해는 역사적인 사료가 별로 없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우리의 역사로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


그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계승 근거로는 정치적으로 문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낸적이 있는데 이때, 스스로 고려왕이라고 칭한 것이 있습니다.


이 고려왕은 그 시기에 고구려왕을 고려왕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지배층은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피지배층이 말갈인으로 이원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


고구려부터 내려온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온돌문화가 발해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에 반하여 당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는데,


이는 행정체제인 3성 6부 체제가 있습니다.


또한 상경에 있는 용천부 앞에 주작대로라는, 궁전 앞에 큰 대로가 있는데 이는 중국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쓰고 나니깐 많이 어색하네요..


앞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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